대구서 존재감 높인 후 서울 진출... 중국 뮤지컬은 뭐가 다를까

[리뷰] 중국 고전 <홍루몽>을 현대 뮤지컬로 되살린 뮤지컬 <보옥>

 중국 창작뮤지컬 '보옥' 장면
중국 창작뮤지컬 '보옥' 장면해소문화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무대가 붉게 열렸다. 객석은 아직 본 공연의 긴장감으로 가득 찬 밤은 아니었다. 서울 관객을 위해 이튿날(10일) 개막을 앞둔 최종 드레스리허설. 하지만 배우들이 의상을 갖춰 입고, 조명이 켜지고, 무대 바닥의 물빛이 흔들리는 순간, 이 공연이 왜 대구에서 먼저 관객을 뒤흔들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뮤지컬 〈보옥〉은 중국 고전 <홍루몽>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보기 위해 원작을 모두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날 리허설에서 먼저 다가온 것은 줄거리보다 중국의 향연을 오롯이 담은 분위기였다. 붉은 커튼, 높은 기둥, 검은 그림자, 물 위에 비친 배우들의 연기, 느리게 흘러가는 옷자락까지 우리가 예상했던 중국 본토의 냄새가 짙게 풍겼다.

처음에는 (작품의 배경지식이 부족해) 자막을 따라가며 인물 관계를 붙잡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줄거리를 이해하려는 마음보다, 무대가 만들어내는 감각에 더 오래 머물렀다. 〈보옥〉은 논리적으로 따라가기보다 꿈처럼 받아들일 때 더 강하게 다가왔다. 장면과 장면 사이가 빠르게 건너뛰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 비약마저 어떤 문법처럼 느껴졌다. 꿈에서는 모든 일이 친절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어느 순간, 시나브로 그곳에 와 있음을 눈치챈다.

드레스리허설 객석에는 정식 개막 전의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배우뿐 아니라 객석을 채운 전 스태프는 모두 중국의 현지 관계자로 오랫동안 손발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공연은 이미 완성된 몸을 갖추고 있었지만, 객석 한쪽에는 스태프의 시선이 남아 있었다. 조명이 바뀌는 순간의 짧은 정적, 배우가 물 위를 디딜 때 번지는 소리, 의상이 바닥을 스치는 낮은 마찰음이 객석까지 전해졌다. 리허설임에도 배우들은 힘을 빼지 않는다. 오히려 정식 공연 직전의 마지막 점검이라는 생각이 무대 전체를 더 예민하게 만들고 있었다.

물 위에 선 보옥

 중국 창작뮤지컬 '보옥' 장면
중국 창작뮤지컬 '보옥' 장면해소문화

보옥은 태어날 때부터 운명을 품은 인물이다. 원작에서 그는 '통령보옥'을 입에 물고 태어난 존재다. 이 작품은 그 옥과 인간 가보옥을 하나로 겹쳐놓는다. 보옥은 한 사람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운명의 상징이다. 그는 가문의 기대와 세상이 정해 놓은 길 앞에서 사랑과 자유, 진정한 자신을 갈망한다.

이날 가장 오래 남은 것은 물이다. 수무대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배우가 그 위에 설 때마다 무대는 정원이 되었다가, 마음속 깊은 곳이 되었다가, 다시 허무의 가장자리가 되었다. 물에 비친 얼굴은 실재 같기도 하고 환영으로 보이기도 한다. 발걸음마다 번지는 파문은 보옥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의 흔적처럼 보였다.

무대 바닥의 물은 작품 전체의 정서를 붙잡는 장치다. 사랑은 그 위에서 아름답게 반짝였지만, 동시에 쉽게 흐트러졌다. 배우가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빛이 깨지고, 물결이 번지고, 인물의 얼굴이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보옥의 마음과 닮아 있었다. 그는 사랑을 붙잡고 싶지만, 붙잡는 순간 그것이 흩어질 것임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임대옥을 향한 보옥의 마음은 달콤하기보다 아팠다. 순수하지만, 그래서 더 잔인했다. 이미 사라질 것을 예감한 사랑, 붙잡을수록 더 깊어지는 슬픔이다. 무대 위 임대옥은 푸른빛의 슬픔으로 서 있었다. 대사는 자막으로 따라가야 했지만, 몸짓은 번역을 기다리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는 순간, 천천히 물러나는 걸음, 말보다 먼저 떨리는 표정이 객석에 먼저 도착했다.

축복보다 장례에 가까운 아름다움

 중국 창작뮤지컬 '보옥' 장면
중국 창작뮤지컬 '보옥' 장면해소문화

〈보옥〉에서 가장 강렬하게 남은 장면은 대혼 장면이다. 결혼은 보통 축복의 형식으로 무대화되지만 이 작품의 붉은색은 따뜻하지 않았다. 눈부시게 화려한데, 어딘가 싸늘하다. 혼례의 형식은 성대했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비어 있다.

붉은 천과 조명, 의식의 질서, 배우들의 정제된 움직임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관객을 편안하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편하게 흔들었다. 이 결혼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사랑이 빠져나간 의식은 축제인가, 장례인가. 무대 위 붉은색은 기쁨의 색이라기보다 운명이 들이미는 도장처럼 보였다.

그 장면에는 묘한 공포가 있었다. 누군가를 해치려는 공포가 아니라, 아무도 악인이 아닌데 모두가 정해진 방향으로 밀려가는 데서 오는 공포다. 아름다운 의상과 장엄한 음악, 정교한 군무가 쌓일수록 마음은 오히려 서늘해졌다. 화려함이 극에 달하는 순간, 이 작품은 사랑의 결실이 아니라 사랑의 부재를 보여주고 있었다.

보옥과 설보채의 관계도 단순한 삼각관계로만 보이지 않았다. 설보채는 사랑의 경쟁자가 아니라 현실의 언어를 지닌 인물이다. 가문과 질서, 예의와 생존의 감각을 품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임대옥과 설보채는 서로를 밀어내는 두 여성이 아니라, 각자 다른 방식으로 시대와 운명을 견디는 인물처럼 보였다.

그 점에서 〈보옥〉은 <홍루몽>의 유명 장면을 나열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보대공독서상, 대옥장화, 금옥양연 대혼 같은 원작의 장면들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보옥의 내면을 통과한 기억처럼 배열된다. 때로는 서사가 급하게 건너뛰는 듯한 아쉬움도 있지만, 그 빠른 전환은 한편으로 꿈의 속도에 가깝다. 모든 감정이 차곡차곡 설명되지 않아도, 장면은 이미 다음 상처 앞에 도착해 있다.

두 마리 토끼를 쫓는 어려움

 중국 창작뮤지컬 '보옥' 장면
중국 창작뮤지컬 '보옥' 장면해소문화

중국어 원어 공연이라는 점은 한국 관객에게 분명히 높은 장벽이다. 특히 원작의 인물 관계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이라면 초반에는 이름과 관계, 상징을 따라가느라 조금 늦게 작품 안으로 들어갈 지 모른다. 드레스리허설에서도 그 지점은 분명히 보였다. 서사는 친절하려 애쓰지만, 원작이 워낙 방대하므로 인물의 감정이 충분히 쌓이기 전에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는 인상도 있다.

무엇보다 아쉬웠던 것은 (철저하게 한국 관객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시선의 문제였다. 〈보옥〉은 화려한 무대와 의상,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를 오롯이 바라보는 즐거움이 큰 작품이다. 그런데 공연이 중국어 원어로 진행되고, 자막이 무대 좌우 작은 스크린에 배치되다 보니 관객은 자연스럽게 두 방향 사이에서 시선을 나눠야 한다.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자막에 집중하면 배우의 표정과 몸짓, 물 위에 번지는 빛의 결을 놓치기 쉽다. 반대로 무대에 시선을 두면 대사의 의미를 따라가는 데 늦어진다. 결국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쫓기 어려운 구조였다. 이것을 탓할 필요는 없다. 하루는 원어 공연이 지닌 원론적 한계이기도 하지만, 〈보옥〉처럼 시각적 미장센이 강한 작품에서는 더 크게 느껴지는 아쉬움이다.

특히 이 작품의 매력은 말보다 장면에 많이 기대고 있다. 붉은 혼례의 온도, 물 위로 번지는 파문, 푸른빛으로 사라지는 임대옥의 얼굴, 보옥의 몸짓에 실리는 망설임은 모두 눈으로 붙잡아야 하는 순간들이다. 그런데 자막을 따라가는 동안 그 순간들이 조금씩 미끄러져 지나간다. 그래서 공연을 보는 내내 관객은 선택해야 한다. 지금은 의미를 읽을 것인가, 장면을 볼 것인가. 그 선택의 반복은 작품의 몰입을 돕기도 하지만, 동시에 온전한 감상을 방해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배우들의 얼굴은 그 빈틈을 메운다. 보옥 역의 장저는 소년성과 운명성을 동시에 품고 있다. 그는 철없는 도련님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자신이 이미 끝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선다. 임대옥은 병약한 슬픔으로만 소비되지 않는다. 섬세하지만 단단하고,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자기 감정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 설보채는 조용하지만 결코 희미하지 않다. 화려하게 밀고 나가는 왕희봉은 무대에 다른 온도를 만든다.

결국 이 공연에서 가장 많이 보아야 할 것은 배우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가장 자주 보게 되는 것은 좌우의 자막이었다. 이 아이러니가 아쉽다. 〈보옥〉은 눈으로 따라가야 할 장면이 많은 작품이다. 그 얼굴들을 더 오래 바라볼 수 있었다면, 이 작품의 매혹은 훨씬 더 온전히 전달됐을 것이다.

대구를 거쳐 서울로, 중국 창작뮤지컬의 현재

 중국 창작뮤지컬 '보옥' 서울공연 공식 포스터
중국 창작뮤지컬 '보옥' 서울공연 공식 포스터아르코

〈보옥〉은 지난 7월 3일~4일까지 대구수성아트피아 대극장에서 제20회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공동 폐막작으로 관객을 만났다. 여기에 대상 수상으로 그 존재감을 재확인했다. 그리고 이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공동기획 공연으로 서울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 오른다. 공연은 7월 10일과 11일까지 단 이틀간만 주어진다. 대구에서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한 작품이 서울로 옮겨오며, 한국 관객은 중국 창작뮤지컬의 현재를 가까이에서 확인하게 됐다.

이 작품은 완벽한 공연이라기보다 흥미로운 공연이다. 우리가 또 언제 중국의 오리지널 뮤지컬을 경험할 수 있을까. 『홍루몽』을 모르는 관객에게는 낯설 수 있고, 원작을 깊이 아는 관객에게는 생략과 변형이 거칠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음악 역시 모든 넘버가 일관되게 귀에 남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곡은 장면의 정서를 밀어 올리지만, 어떤 곡은 이미지의 힘에 비해 다소 설명적으로 다가온다.

다만 〈보옥〉은 분명 볼만한 이유가 있는 작품이다. 중국 창작뮤지컬이 고전을 어떤 방식으로 다시 무대화하고 있는지, 전통미학과 현대 뮤지컬 문법을 어떻게 접합하고 있는지 증명한다. 특히 무대미술, 의상, 조명, 수무대의 활용은 한국 관객에게도 충분히 흥미로운 관극 경험이 될 만하다.

드레스리허설이 끝나고 객석의 불이 켜졌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줄거리가 아니다. 물 위에 번진 빛, 붉은 혼례복의 싸늘한 아름다움, 푸른빛으로 사라지던 임대옥의 얼굴, 그리고 끝을 알면서도 앞으로 걸어가던 보옥의 뒷모습이다.〈보옥〉은 완벽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한 가지 장면을 오래 남긴다. 허무를 알고도 사랑 쪽으로 걸어가는 한 사람의 뒷모습. 그 뒷모습이 이 낯선 중국 뮤지컬을 한국 관객에게도 꽤 오래 남게 만든다.



뮤지컬 해소문화 보옥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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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문화예술계에서 글을 써왔다. 월간지<문화+서울> 편집장(2013~2022)으로, 한겨레신문 필진(2016~2023)으로 취재와 예술가를 인터뷰했다. 현재는 서울 대학로 일대에서 공연&전시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을 만나 이아기를 전하며, '서울문화투데이'와 '더프리뷰' 등 매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