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시작 전, 세 개의 의자와 액자 모양의 프레임이 돋보이는 뮤지컬 <안녕, 크로아티아>
아트컴퍼니 두루
무대 위에는 의자 세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조명이 켜지자 마이크를 든 한 남성이 무대로 걸어 나왔다. 조금 전 주차장에서 관객들을 맞이하던 그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을 아트컴퍼니 두루의 대표라고 소개하며 공연 관람 예절을 유쾌하게 설명한 뒤 배우들에게 무대를 넘겼다. 공연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무대 안팎의 경계를 허물며 관객을 맞이하는 모습에서 소극장 공연만의 정겨움이 느껴졌다.
공연이 시작되자 크로아티아로 향하는 연인과 한 명의 이방인이 이야기를 풀어갔다. '설마 세 사람만 등장하겠어'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뮤지컬 <안녕, 크로아티아>는 단 세 명의 배우만으로 100분 가까운 무대를 채워간다. 특히 연출을 맡은 송광일은 주인공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인물을 혼자 소화했다. 택시기사였다가 수녀가 되고, 박물관 직원과 여행객으로 변신하는 등 쉼 없이 무대를 오가는 1인 7역이었다. 의상과 말투, 몸짓만으로 전혀 다른 인물을 만들어내는 그의 연기에 객석에서는 웃음과 감탄이 번갈아 흘러나왔다. 연출까지 직접 맡았으니 어쩌면 '1인 8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주 출신 배우 이주순과 무대의 홍일점 나서영은 웃음과 슬픔을 넘나드는 섬세한 연기와 노래로 객석의 몰입을 이끌었다. 공연이 끝나고 배우들의 인사가 이어지던 순간, 또 한 명이 무대에 올랐다. 공연 시작 전 티켓을 건네고 객석까지 안내해주던 바로 그 스태프였다. 알고 보니 <안녕, 크로아티아>의 작가였다.
그 순간 이 공연의 매력이 더해졌다. 무대 위에서는 배우가 1인 7역을 소화하고, 무대 밖에서는 대표가 주차 안내를 하며, 작가는 관객들에게 객석을 안내한다. 누구 하나 자신의 역할에만 갇혀 있지 않았다. 모두가 일당백으로 움직이며 하나의 공연을 완성해가고 있었다.
사랑이 남기는 시간들
극 속에는 '실연박물관(Museum of Broken Relationships)'이 등장한다. 사랑의 상처가 깃든 물건을 맡기면 아픈 기억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공간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설정이 허구가 아니라는 점이다.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는 실제 실연박물관이 있다. 헤어진 연인들이 추억이 담긴 물건과 사연을 기증해 전시하는 이곳은, 사랑을 잊기 위해 남겨진 기억들이 또 다른 누군가의 공감이 되는 특별한 박물관이다.
객석에서 받은 프로그램북에는 작품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열쇠가 담겨 있었다. 영국 화가 프랭크 딕시(Frank Dicksee)의 <고백(The Confession)>(1896)이 또 다른 모티브였다. 한 여성이 사랑을 고백하고, 남성은 두려움과 망설임 속에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는 장면을 담은 작품이다. 작가는 이를 "세상에서 가장 힘든 고백 가운데 하나는 불확실한 사랑을 바라는 일"이라고 풀이한다. 밝음과 어둠의 대비는 사랑을 고백하는 이의 희망과 이를 받아들이는 이의 두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국 화가 프랭크 딕시의 명화 <고백(The Confession)>(1896)아트컴퍼니 두루
필자는 극 속 실연박물관을 보며 자연스럽게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의 소설 <순수 박물관>을 떠올리게 했다. 소설 속 주인공 케말이 사랑했던 여인 퓌순의 흔적을 평생 모았듯, 이스탄불의 실제 순수 박물관에는 담배꽁초 4213개를 비롯해 한 남자의 지독하리 만큼 순애보적인 사랑의 흔적이 전시돼 있다. 반면 크로아티아의 실연박물관은 아픈 사랑을 잊기 위해 추억을 맡기는 공간이다. 하나는 기억을 위해, 다른 하나는 망각을 위해 존재하지만, 두 박물관을 관통하는 본질은 결국 사랑이다. 뮤지컬 <안녕, 크로아티아>는 이처럼 기억과 망각 사이를 오가며 사랑이 남기는 시간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돌발 상황도 공연의 일부가 되는 소극장의 힘
공연 도중 예상치 못한 유쾌한 해프닝도 있었다. 두 남자 배우가 대사 없이 몸짓으로 코믹 연기를 펼치자, 객석의 어린 여자아이가 큰 소리로 "뭐 하는 거야?"라고 외친 것이다. 순간 객석은 웃음바다가 됐고 배우들 역시 웃음을 참느라 애쓰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배우들은 프로다웠다. 끝까지 흐름을 잃지 않았고, 공연이 끝난 뒤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는 그 아이를 무대로 불러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다정함을 보여주었다.
"그때 정말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그런 순간도 공연하는 맛이더라고요."
배우들의 솔직한 답변에 객석은 다시 한번 따뜻한 웃음과 박수로 가득 찼다. 코로나19 시기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에서 오페라 <나비부인>을 관람한 이후 4년 반 만에 찾은 라이브 무대였다. 하지만 이번에 만난 소극장은 공연의 규모가 감동의 크기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줬다. 무대는 작았지만, 그곳에서 만난 생동감 넘치는 장면들은 어느 대극장의 화려한 무대보다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 같다.
공연장을 나서며 로비에 붙어 있던 포스터를 다시 바라봤다. 작품은 며칠 더 전주의 작은 무대에서 관객들을 만난다. 화려한 광고나 대규모 마케팅은 없지만,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의 입소문으로 객석을 채워가는 창작 뮤지컬은 지역 공연 예술이 가진 가장 큰 힘을 보여준다. 지역 문화는 거창한 무대가 아니라, 이런 작은 공연장을 찾는 발걸음 하나하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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