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만에 다시 선 무대, 35명의 인물을 혼자서 연기한 배우

[안지훈의 연극 읽기] 연극 <나는 나의 아내다>

극장 문을 열고 객석에 들어서면 왠지 보석함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든다. 무대는 붉은 보석함의 내부를 연상케 한다. 이곳은 일차적으로 샤로테의 방인 동시에 궁극적으로 샤로테의 기억이 보관된 보석함이다.

지난달 28일 관람한 연극 <나는 나의 아내다>의 주인공은 단연 '샤로테'다. 동베를린 출신 샤로테는 히틀러의 나치와 동족의 사회주의를 모두 경험한 여장 남자로, 본명은 '로타르 베르펠데'다. 그는 본명 대신 샤로테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며 성소수자를 향한 폭력을 경험하고 목격했다. 이후 그는 축음기, 시계, 가구 등을 수집하고 당대 성소수자들의 안식처였던 카바레를 자기 집에 옮겨놓았다.

하지만 연극에서 샤로테의 이야기는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 조용히 말년을 보내던 샤로테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기록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더그'가 바로 이 역할을 수행한다. 그래서 더그도 샤로테와 함께 이 연극의 주인공이다.

더그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게이 작가로, 독일 특파원이자 친구인 존으로부터 샤로테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그를 찾아간다. 더그는 성소수자인 동시에 암흑의 시대를 견뎌낸 생존자인 샤로테의 삶에 흥미를 느끼고 취재를 시작한다.

 연극 <나는 나의 아내다> 공연 사진
연극 <나는 나의 아내다> 공연 사진두산아트센터

1인 35역, 지현준·백석광의 모노 드라마

더그는 샤로테에게 질문하고, 샤로테는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털어놓는다. 샤로테의 이야기에는 한때 동료였으나 나치에 끌려가 억압을 당한 알프레드도 등장하고, 억압을 가하는 인물도 등장하며, 샤로테의 보석함에 관심을 보이는 인물도 등장한다. 그렇게 <나는 나의 아내다>에는 총 35명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중요한 건 35명의 인물을 오직 배우 한 명이 연기한다는 점이다. 이 연극은 배우 한 명이 35역을 맡아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무대를 채우는 모노 드라마다. 지난달 24일 개막해 오는 12일까지 2주 반 가량 공연되는 이번 시즌에는 배우 지현준과 백석광이 캐스팅됐다.

지현준은 <나는 나의 아내다> 한국 공연의 산증인이다. 2013년 한국 초연, 2014년 재연에 모두 참여했고, 12년 만에 돌아온 삼연에도 참여했다. 특히 지현준은 이 작품을 통해 2013년 대한민국 연극대상에서 신인연기상을 수상했고, 2014년에는 동아연극상 유인촌 신인연기상을 수상하며 단숨에 공연계가 주목하는 신예로 등극했다.

필자가 관람한 회차는 지현준의 회차로, 마침 공연 종료 후 '관객과의 대화'도 진행되어 그의 이야기도 직접 들어볼 수 있었다. 지현준에게 유독 특별했던 이 작품은 이번에도 특별하게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지난해 막연히 <나는 나의 아내다>를 한 번 더 하고 싶다고 생각한 날로부터 약 일주일이 지난 후 운명처럼 출연 제의를 받았다는 고백에 객석에선 일제히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지현준은 스스로를 "샤로테에 가까워진 나이"라고 소개했다. 13년 전 지현준의 나이가 더그에 보다 가까웠다면, 이제는 샤로테에 가까워진 것이다. 그는 "꺾이는 나이가 되면서 내 고향으로 돌아가 나를 돌아봐야겠다는 마음에 참여했다"고 밝혔고, 이어 강량원 연출가도 "13년 전에는 지현준이 더그였다. 이제는 무대 위에서 샤로테가 됐다"고 평가했다.

 연극 <나는 나의 아내다> 공연 사진
연극 <나는 나의 아내다> 공연 사진두산아트센터

샤로테는 보석함 속 가구였다

필자는 13년 전 지현준의 <나는 나의 아내다>를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지금의 지현준이 선보이는 더그와 샤로테가 원숙했다는 것 정도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급하지 않게, 조심스레 샤로테와 더그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어느 순간부터 삐걱대며 위태롭게 이어졌다.

샤로테는 시대를 견뎌낸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영웅이나 비범한 인물을 아니다. 그는 사회의 폭력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빗겨가는 방법을 택했다. 때로는 숨었고, 상대를 속이며 폭력과 공존하기도 했다. 그래서 샤로테의 이야기는 마냥 아름답지 않고, 또 매끄럽게 연결되지도 않는다. 그의 인생 이야기에는 일관성이 부족해 더그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 당황하는 건 관객 역시 마찬가지다.

샤로테의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연극의 서사가 선명해지기보다는 흐릿해진다. 샤로테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샤로테의 삶을 따라가던 관객은 어느 순간이 되면 어떤 이야기를 큐레이팅할 지 고민하는 더그에게 이입하게 된다. 더그에게 샤로테를 소개해준 존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샤로테에게 돌아가려 노력해야 한다는 걸, 더그는 깨닫는다. 언젠가 더그는 샤로테에게 오래돼서 낡고 광택이 사라진 가구를 어떻게 하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다. 샤로테의 답은 명확했다. 수정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다고 답했다. 가구에 묻은 얼룩, 부서진 흔적도 그 가구의 일환이라고.

샤로테는 그 가구들과 닮았다. 부서지고 낡았고 얼룩졌다. 이제는 아름답지도, 그다지 멋있지도 않다. 삐걱대고 엇갈린 그의 삶에는 애당초 큐레이팅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삶은 그저 그 자리에서 고이 지켜져야 했다. 그가 오래된 가구들을 자신의 보석함 안에 고이 보관해온 것처럼.

 연극 <나는 나의 아내다> 공연 사진
연극 <나는 나의 아내다> 공연 사진두산아트센터
공연 연극 나는나의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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