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정신과 의사가 단골 환자 죽자 벌인 일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파리의 사생활>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정신과 의사 '릴리안'은 9년 간 상담하던 '폴라'가 예약 시간에 방문하지 않자 연락을 보내지만, 답장은 오지 않는다. 염려하던 찰나, 환자의 사망 소식을 받고 당혹감에 빠진다. 항상 평상심을 유지하던 그녀는 갑자기 계속 눈물이 흐르는 증상을 겪는다.

안과의인 전남편에게 진찰받아도 뾰족한 답을 얻지 못해 답답한 나머지 최면술사를 찾기까지 이른다. 최면 상태에서 예상 못한 내용을 듣게 된 릴리안은 환자의 죽음에 석연찮은 사연이 감춰져 있다고 확신한다.

비밀엄수와 정의구현 사이에서 증폭되는 미스터리

 <파리의 사생활> 스틸
<파리의 사생활> 스틸㈜티캐스트

주인공은 파리 한복판 아파트에서 내방 상담을 진행하는 정신과 의사다. 경력이 길고 제법 명성도 높은지 장기 상담환자가 적지 않다. 그녀는 환자와의 상담을 소형 녹음기에 저장한다. 서랍에는 상담 내역이 보관된 미니 디스크가 환자별로 가득하다. 한 번씩 아들에게 대량으로 온라인 주문을 부탁하는 릴리안에게 왠만하면 디지털 녹음 기능 활용하라 해도 요지부동으로 아날로그 지향이 확고하다. 비단 녹음기뿐 아니라 당사자의 완고함을 드러내는 예시 격.

이혼하고 혼자 사는 데다 자식도 장성한 터라 릴리안의 일상은 일로 채워진다. 환자는 많고 상담은 고된 감정노동이라 자신을 소모하는 일이다. 냉철하게 공사를 구분하며 복수의 상담을 수행하는 와중에 강한 척해도 이미 권태로운 기색이 역력하다. 게다가 완벽하게 진행되던 심리 상담도 삐걱대기 시작한다. 친구처럼 지내던 폴라의 죽음은 주인공의 일상에 파문을 던진다. 예의상 빈소에 방문하지만, 고인의 남편은 아내의 죽음에 의사가 책임 있다며 몰아붙인다.

반면에 딸은 자꾸만 릴리안에게 불쑥 나타나 엄마의 죽음을 상기시킨다. 상담자와 공적 관계만 고수하던 의사로선 곤혹스럽기만 하다. 한편 어쩔 수 없이 세속적인 추론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에게 뭔가 불이익이 오지 않을까 염려하며 긴장하던 그녀 주변에 석연찮은 사건이 거듭 터진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은 없다. 겉으론 애써 태연한 척하지만, 혼자 사는 중년 여성에겐 실체적 위협이다. 주변에 원한 품을 이를 살펴봐도 아무래도 폴라의 가족만 아른거린다.

자연스럽게 단골 환자의 죽음이 현재 겪는 기현상과 연결된 것이라 추리하던 릴리안. 거들떠보지 않던 최면술사에게 듣게 된 충격적인 과거는 혼란을 배가한다. 이제 폴라의 사인을 캐는 것과 자기에게 벌어지는 일련의 혼란은 하나의 수수께끼로 통합된다. 그녀는 맹목적으로 용의자들을 차례로 미행하거나, 집을 몰래 수색하는 등 위험 한복판으로 빨려든다. 사건은 점점 범위가 커지다가 급기야 연쇄살인 의혹으로 커진다. 미스터리 추리극의 긴장은 높아만 간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기묘한 감각 속으로

 <파리의 사생활> 스틸
<파리의 사생활> 스틸㈜티캐스트

릴리안을 조이는 긴장은 점점 밀도를 높인다. 정신적인 위기로만 치부하던 게 어느새 자동차를 망가뜨리고 자택에 침입하는 사태로 번진 것. 게다가 또 다른 단골 환자는 다년간의 상담이 허송세월이라며 손해배상 소송을 걸겠다고 통보한다. 이젠 단순히 감정 문제를 넘어 실존의 위기다. 주인공은 점점 평상심을 잃고 가족과의 관계도 악화 일로다. 그렇지 않아도 이혼 이후 서먹하던 아들과의 관계도 최악으로 치닫는다. 폴라의 가족은 자꾸만 주변을 맴돈다.

이런 지경에 유일한 의지는 전남편 '가브리엘' 뿐이다. 멈추지 않는 눈물 탓에 찾아갔던 그와 오랜만에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자주 만나다 보니 고충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다.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가브리엘은 전처의 위기를 여러모로 조력한다. 그러다 보니 타인을 극도로 불신하게 된 릴리안은 분명히 과거에 다툼과 불화로 결별했을 가브리엘에게 참 오랜만에 진심을 토로하며 급한 상황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도움을 청한다. 그런 찰나가 묘하게 훈훈하다.

분명 위기일발 상황인데 중년에 다시 만난 커플의 궁합이 이물감을 묘하게 안긴다. 뭔가 다른 각도로 분위기가 기이하다. 그런 의심에 기름을 붓는 건 마치 추임새 맞추듯 긴장감이 고조되어야 할 순간에 뜬금포 삽입되는 경쾌한 리듬감의 음향효과다. 주인공 표정과 상황은 심각한데 이질적으로 오락실 뿅뿅거리는 사운드 마냥 중화제가 투입되는 셈. 미스터리 스릴러 구조 정석에서 피해야할 요소가 천연덕스럽게 끼어드니 보는 이로선 헷갈릴 수밖에 없는 노릇.

이쯤되면 과연 영화의 장르가 뭘까 관객은 주인공과 다른 입장에서 의혹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자살로 위장한 연쇄살인마를 추적하는 과정이라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파리 중산층 지식인, 중년 여성이 감당하기엔 너무 위험한 상황이 속출하는 데다, 초현실적 전생 체험까지 끼어든다. 대체 어디까지 치달을지 종잡을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하게 훈훈한 중년 로맨스가 뒤섞이는 풍경이 거듭 교차하며 정서적인 혼란은 점입가경. 헷갈리지 않고 배길 도리가 없다.

한 길 사람 속이란 광대한 소우주 체험

 <파리의 사생활> 스틸
<파리의 사생활> 스틸㈜티캐스트

주인공의 좌충우돌 행보를 통해 냉탕 온탕 들락날락하듯 관객을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제작진의 큰그림(Big Picture)는 서서히 설계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물론 영화를 극장에서 보면서 확인할 노릇이지만, 연출 감각이 범상치 않은 대목. '중년의 위기'에 떨어진 주인공이 늪에 빠진 것처럼 조여오던 수수께끼 사건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와 더불어 이제 화석처럼 굳어버린 듯 보이던 사람이 감추던 속내와 변화의 가능성이 어우러진다. 뜻밖의 '성장물'인 셈이다.

'고인 물'로 전문가 권위를 무형의 갑옷처럼 자기 주변에 칭칭 두르고 있던 릴리안은 주변 가까운 이들을 자의적으로 밀어내며 혼자만의 요새에 갇힌 것과 다를 게 없다. 영화 시작부터 주인공이 오르내리던 파리의 구축 아파트 나선계단은 마치 달팽이 모양 미로처럼 클로즈업돼 특유의 인상을 관객 뇌리에 아로새긴다. 인물의 심리가 고스란히 형상화된 꼴. 예민한 이라면 공포증 질릴 정도로 주인공의 속마음과 달팽이 집 마냥 무한 순환 이미지가 결속한다.

릴리안의 뇌내망상은 과연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부터 허상일까? 유려한 솜씨로 감독은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관객을 쥐락펴락하며 팽팽하게 조이다가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자마자 일거에 개방한다. 봇물 터지듯 정교하게 꼬아둔 매듭이 술술 풀리자 비로소 피식 실소할 만큼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다. 물론 억지 코미디로 마무리하진 않는다. 인생의 교훈과 부질없는 의심의 허망함이 동시에 충족되는 양가적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든다.

전문가라는 자존심은 어느새 관성과 수직적 위계로 변한 지 오래였다. 이를 깨닫지 못한 채 '자기만의 방'이 아니라 '독방'에 셀프 감금한 듯 살고 있던 주인공은 아집 때문에 스스로 고립되고 있음을 애써 부정하고 있었다. 부정적 방어막이 돌발 사건에 의해 구멍이 뚫리고 자가수복 과정에서 혼자선 해결할 수 없던 위기를 지고지순 기다리던 과거 연인의 헌신으로 극복한다. 순간의 소중함, 솔직하게 본심 드러내기가 선사하는 삶의 기쁨을 뒤늦게 깨달은 것.

관록의 명배우, 새로운 도전을 감행하다

 <파리의 사생활> 스틸
<파리의 사생활> 스틸㈜티캐스트

<파리의 사생활>을 한국 관객이 고른다면, 가장 우선순위는 릴리안 역을 맡은 조디 포스터의 존재감일 테다. 20대에 아카데미시상식 여우주연상 2회에 빛나는 자타공인 할리우드 대표 여배우도 이제 60줄에 들어섰다.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하고 소일하듯 쉬엄쉬엄 활동해도 뭐라 할 이가 없는 경지. 그러나 명배우는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최초로 프랑스어 영화에 주인공 롤을 맡는 모험에 나선 것. 실은 프랑스어에 능통했으나 누구도 감히 제안하지 않은 역할이다.

주인공 릴리안 역시 실제 배우와 겹치는 캐릭터다. 영어권 출신이지만, 아마 학업 중에 남편을 만나 파리에 정착한 과거가 연상된다. 눌러앉은 지 오래 되었지만, 여전히 약간은 이방인의 태도가 남아 있다. 여행자와도, 토박이랑도 결이 다른 시선이 탐정 추리물처럼 전개되는 이야기 구조와 화학반응 일으키듯 잘 어울린다. 조디 포스터의 명불허전 연기력이 가미되니 화룡점정이 완성된다. 신경쇠약 직전 상태와 은근 소녀 같은 인상이 위화감 없이 교차한다.

조디 포스터와 합을 맞추는 건 상대역에겐 마치 심해에 빠져 수압에 짓눌리는 체험이다. 주눅 들지 않고 버티기 위해선 무게를 맞춰야 한다. 프랑스 영화하면 떠오르는 대표 배우들이 출동해 그 부담을 기꺼이 떠맡았다. 환상의 콤비를 결성하는 가브리엘 역은 다니엘 오테유, 주인공의 숙적(?)이자 또 다른 탐정이기도 한 시몽 역은 마티유 아말릭이 감당한다. 마치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구현하는 황금비율이 구현되는 실시간 체험처럼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요즘 프랑스 영화 좀 찾아보는 이라면 익숙한 배우들도 등장한다. 엄마와 소원한 아들로 <쁘띠 아만다> 뱅상 라코스트, 폴라의 딸로 모호한 기운을 더하는 존재감 발산하는 <레벤느망> 루아나 바이라미가 나온다. 국내 관객에겐 한국계 프랑스 배우 박지민의 깜짝 출연도 반가운 구석. 근래 <파티마가 사랑한 계절>에 이어 또다시 극장에서 재회할 기회다.

사운드트랙이 양질이지만, 마치 주제가처럼 쓰이는 토킹 헤즈의 "Psycho Killer" 활용은 숨겨둔 보물상자처럼 작동한다. 뉴욕 포스트 펑크를 대표하며 후대 밴드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 그룹의 초기 대표곡은 제목에서 암시되듯 히치콕의 명작 <사이코>에서 영감을 얻은 노래다. 정신병자 살인마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섬뜩한 가사를 낭창거리며 흥얼대는 노래엔 심지어 프랑스어 가사도 포함된다. 알고 보면 영화 전체를 압축한 것처럼 싱크로를 자랑한다.

<파리의 사생활>은 시치미 뚝 떼고 살인마와 탐정의 대결로 몰아가다 예상외의 반전을 감춰놓고 관객과 겨루는 영화다. 관록의 여성 감독과 프랑스 영화계 드림팀이 총출동한 진용이 막강하지만, 무엇보다 '파리'라는 문화도시가 품은 '소프트 파워'가 천연덕스러운 이야기를 뭐든 가능케 해주는 마법의 장치로 기능한다. 조디 포스터의 중단없는 연기 도전이 여기에 첨가되며 인생살이 소박한 교훈 극을 완성한다. 이 정도면 충분히 모두가 만족할 작업이다.

<작품정보>

파리의 사생활
Vie Privée
A Private Life
2025 프랑스 범죄/드라마
2026.07.15. 개봉 103분 15세 관람가
감독 레베카 즐로토프스키
출연 조디 포스터, 비르지니 에피라, 마티유 아말릭, 다니엘 오테유 등
수입/배급 ㈜티캐스트

2025 78회 칸영화제 비경쟁부문 초청

파리의사생활 레베카즐로토프스키감독 조디 포스터 비르지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