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폭풍 속 미국 서부로의 초대, 강렬한 여정의 시작
무대를 마주하는 순간, 미국의 어느 황량한 서부 거리가 자연스레 연상 된다. 무대 양옆에 걸린 영어 간판과 갈색 톤의 거대한 대도구들은 관객을 순식간에 모래 폭풍 속 공간으로 이끈다. 극이 시작되고 관객과 배우 사이를 가로막던 철장이 사라지는 순간, 본격적인 모험이 시작된다.
네 개의 강렬한 불빛과 극장을 울리는 경쾌한 시동 소리와 함께 거대한 지프차가 눈앞에 등장한다. 차에 올라탄 배우들의 덜컹거리는 움직임은 머나먼 여정의 시작을 알린다. 이 과정에서 흘러나오는 팝송과 슬로우 모션 연기는 관객을 극 속으로 무섭게 몰입 시킨다. 강약 조절이 훌륭한 연출 덕분에, 관객들은 어느새 한국의 소극장이 아닌 미국의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며 연극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연극 <하붑> 포스터연극 <하붑> 포스터극단 문지방
가족이라는 지독한 굴레, 그리고 뒤틀린 기억
우리에게 가족이란 어떤 존재일까. 한국 사회에서 가족은 피로 섞인 강렬한 유기체들의 모임이다. 혈연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절대적인 고리이며, 때로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개인의 수많은 선택과 삶이 포기되기도 한다. 물론 가족 간의 유대가 끈끈하고 행복하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현실에서는 학대와 폭력, 무관심 등 가족이라는 이름의 비극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연극 <하붑> 역시 가족의 무관심과 학대라는 깊은 상처에서 출발한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던 아빠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딸은 극심한 정신 착란을 겪는다. 딸은 자신의 곁에 있는 아빠를 아빠가 아닌 남편으로 인지하며, 자신이 잃어버린 아이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끝없는 모험을 떠난다. 그러나 아이는 이미 낙태로 인해 존재하지 않는다. 딸은 과거 상처 받았던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린 아이에게 투영한 채 멈추지 않는 여정을 이어가고, 아빠는 자신의 과거 잘못을 되돌리기 위해 딸의 곁을 묵묵히 지킨다.
영화 <델마와 루이스>를 연상시키는 플롯 속, 신진 극단의 영리한 연출
극단 문지방은 최근 연극계에서 주목 받는 신진 극단이다. 이미 여러 작품을 통해 작품성을 인정받았으며, 이들의 대표작인 <하붑> 역시 촘촘하게 잘 짜인 구성을 자랑한다. 영화 <델마와 루이스>를 연상시키는 로드무비 형태의 플롯 속에 적절한 유머와 감동을 배치해 극적 재미를 충분히 확보했다. 신진 연출가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과도한 연출의 부담감 없이, 군더더기 없고 깔끔하게 극을 이끌어간 점이 돋보인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여겨볼 점은 결말이다. 흔히 가족 비극을 다룬 작품들이 보여주는 신파조의 뜨거운 포옹이나 극적인 반성, 억지 결합으로 끝을 맺었다면 이 작품은 평범한 신파극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극 중 딸은 가족이라는 가혹한 연을 스스로 끊어내는 주체적인 선택을 하고 자신의 길을 떠난다. 그런 딸이 다시 아빠에게 발걸음을 돌리는 이유는 연극의 제목이기도 한 '하붑(Haboob, 거대한 모래폭풍)' 때문이다.
딸은 모래 폭풍이라는 거대한 재앙 속에 갇힌 아빠를, 가족이라서가 아니라 한 인간을 향한 인류애적 마음으로 구조하기 위해 돌아간다. 혈육이라는 의무감을 넘어선 숭고한 사랑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마지막 모습은 관객들에게 묵직하고 먹먹한 여운을 남기며 막을 내린다. 배우들의 연기에서 간혹 미묘한 미숙함이나 경험의 부재가 느껴지는 아쉬운 순간도 있었으나, 극의 흐름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서툰 거침이 황량한 모래폭풍 속 인물들의 불안한 심리와 묘하게 어우러지는 매력이 있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한 서사를 던지는 극단 문지방의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공연정보
<하붑> / 작 공동창작 / 연출 박한별 / 주최,주관 문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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