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올려진 칠레 연극, 오늘날 한국 사회를 비추다

[극장가는 길] 극단 호감

연재 "극장가는 길"은 어둠이 번지는 저녁, 극장을 향해 걷는 발걸음에서 시작된다. 객석과 무대에서 벌어지는 밀고 당기며 교차하는 숨소리, 조명기 점멸, 사라졌으나 사라지지 않는 세계 변화의 순간을 길어내고 이를 기록한다. 나는 지역의 연극과 축제의 현장을 묵묵히 걷고 보면서 그 무대의 잔상과 스쳐간 감정과에 대해 적으며 동시대적 의미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편집자말]
칠레의 연극, <THE PRAYING MANTIS>

극단 호감이 낯선 칠레의 연극, '알레한드로 시에브킹'의 〈THE PRAYING MANTIS〉를 무대에 올렸다. 칠레 현대 연극을 대표하는 작가의 작품이라지만, 희곡을 따로 읽지 못하고 극장에 들어선다는 것은 또 다른 상상의 출발점이기에 기대가 컸다. 대전이라는 지역에서 칠레 연극을 볼 수 있다는 드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작품이 갖는 시의성도 있는 만큼 1971년에 발표한 이 작품이 현재형으로 어떻게 소환된 것인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전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칠레 연극은 여전히 낯설다. 이 희곡이 과거 오래 전 서울 무대에서 한차례 소개된 바 있다고 들었지만, 어떻게 우리 지역 무대에 이 작품이 다시 올려지게 되었는지 궁금함이 클 수밖에 없다.

결코 넘어서지 못하고 끝내 열리지 않는

무엇보다 이 작품의 배경인 1970년대 남미 칠레는, 계급 갈등과 정치적 폭압, 이념 대립이 극명했던 시기다. 시에브킹은 이 격동의 시간을 거대한 정치 담론의 언어가 아니라, 외딴 저택에 고립된 한 가족의 미시적 일상 속으로 끌어들인다. 라이라(신선희), 리나(이성희), 아델라(김도윤)라는 세 자매가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며, '무언가'를 숨기며 존재한다는 설정은 곧 국가 폭력과 사회 억압이 사적인 공간의 공기와 심리 구조를 어떻게 바꿔놓고 있는가에 대한 고도의 은유라 할 수 있다.

극단 호감의 이번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가족극'적 전개로 충실히 따라가는 듯하지만, 관객이 이 극장의 폐쇄된 공간 속에 또 다른 문을 통한 '보이지 않는 방'을 긴장감 있게 바라보도록 극적 분위기의 구축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렇다고 칠레의 1970년대가 밀실화된 정치극의 장(場)을 읽을 수 있도록 강요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선택된 무대 공간 연출은 이번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 중에 하나다.

작은 소극장 중앙 전면에 자리 잡은 삼각형의 틀과 중앙의 굳게 닫힌 문, 그리고 하이그로시로 처리된 무대 바닥의 공간 구성은 작은 극장 안이라는 물리적 제약을 넘어 작품의 정치적·심리적 구조를 시각적으로 응축하는 장치로 쓰이게 된다. 작품의 배경을 아는 관객에게는 물론 단조롭게 보일 수도 있는 삼각형의 상징은 오히려 시각적 긴장을 간명하게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무대 중앙에는 응접실을 구성해 연극은 시종 이 불안한 공간을 중심으로 벗어나지 않는다.

이는 곧 가족극을 빌어 내부의 힘의 위계, 계급적 상하 구조, 그리고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한 질서를 상징적으로 도식화한다. 그래서 관객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수렴되는 삼각형 틀 안에 굳게 닫힌 문에 머무르게 된다. 이 문은 단순한 출입구가 아니라, 결코 넘어서지 못하고 끝내 열리지 않는 진실의 경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의 갇힌 존재들

또 무대는 검은 하이그로시 바닥을 깔았는데, 극중 인물들의 몸은 바닥 위에 반사되며, 그들은 끊임없이 자기의 그림자와 마주선 존재로 제시된다. 연극은 마을 외곽의 큰 저택으로 설정되어 있고, 이 집에 살고 있는 세 자매 중 막내 아델라의 연인 후안이 방문하면서 분주하게 손님맞이 준비를 하는데 이 세 자매의 태도는 기이하고 이질적이다.

극은 전반적으로 온전치 못하고 그로데스크하다. 그들이 풀어놓는 이야기들도 심상치 않다. 두 언니들 모두 자신들의 남자친구를 집에 초대했는데 우발적인 사고로 둘 다 이 집에서 죽었다. 그러고는 어둠 속에서 도둑으로 착각해 쏜 총이 불행히도 맞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소문은 마을에 파다하게 퍼졌고 이후 자매는 자연스레 고립됐다는 것이다. 연극 안의 모든 게 하나도 자연스러운 게 없다.

심지어 이런 저택으로 용감하게 찾아온 청년 후안(오해영)부터, 자매들은 손님대접을 핑계 삼아 유난스럽게 후안을 유혹하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여자의 비명소리가 자꾸 들린다. 바로 굳게 닫힌 문 뒤에 끝까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존재, 넷째 딸 테레사에 대해서도 자매들은 수상하리만큼 설명이 다르다. 아델라는 이유도 없이 남자친구에게 은행을 털라고 종용하고, 극 사이사이 문 뒤에서 들려오는 괴성과 실성한 듯한 아버지의 등장까지 어느 것 하나 일반적인 게 없다.

 극단 호감의 , 무대 이미지
극단 호감의 , 무대 이미지조훈성

어떻게 보면 엽기적인 잔혹극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결국은 극적 긴장이 쌓여갈수록 이 가족의 파탄을 통해 우리는 문 뒤의 진실을 파헤쳐가게 된다. 이는 작품의 다양한 의도, 계급의식이든, 한 죄책감이든, 숨겨진 폭력이든, 각각의 시선에서 각 인물이 떼어낼 수 없는 자기의 이면의 동반을 뚜렷하게 시각화한다.

이 반사 효과가 소극장 무대에서 효과를 드러내기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연출적으로 의도한 수직적 구성의 장면으로 바꿔본다면, 이 연극의 계급성과 불균형의 의미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세트가 이 연극에서 크게 인상에 남는 것은 작은 소극장 무대에서 그 상징이 과잉되지 않고, 작품의 핵심 구조를 구체적으로 시각화했다는 점 때문이다.

덕분에 관객은 세 자매의 동선과 목소리를 따라가면서도, 항상 그들 뒤와 아래에 깔려 있는 시대적 구조를 무의식적으로 의식하게 된다. 극 중 설정된 외딴 저택은, 말 그대로 세계로부터 차단된 공간이다. 그러나 이 단절은 앞서 '살해'가 벌어졌다는 소문, 바로 그 외부의 폭력으로부터의 피신이면서, 동시에 자기 안의 폭력을 축적하는 격리 장치라고도 볼 수 있다. 세 자매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 단절을 내면화한다.

큰 언니인 라이라는 오래된 규범과 질서를 상징적으로 표상한다면, 리나는 이와 다른 차갑고 이성적 감각을 가진 것 같지만 오히려 숨겨진 열정과 욕망이 엿보인다. 한편 아델라는 '후안'을 집에 데려온 것처럼 외부 세계와 가장 강하게 밀착되어 있고, 이 폐쇄된 집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존재로, 이 연극적 세계의 균열이자 변화를 끌어오는 매개체라고 말할 수 있다.

세 자매를 둘러싼 두 인물, 아버지와 후안은 이 불안한 구조에 각기 다른 압력을 가하고 있는데, 아버지는 집안의 권위이자, 쇠락한 과거, 숨겨진 실체를 드러내는데 일조하면서 발화가 많지 않음에도 이미 그의 존재로 이 공간 전체가 수축하는 느낌을 준다.

반면 후안은 아델라의 욕망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면서 이 집에 찾아오는 손님이자 침입자이며, 끝내 받아들여지지 못할 변화의 매개 대상으로 작품의 연극성을 극대화시킨다. 연출은 이 다섯 인물을 통해, 폐쇄된 공간 안에서 지속·유지되려는 힘과 이의 균열을 내고 밖으로 나아가려는 힘의 대립선을 또렷하게 그려내고자 노력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처럼 무거운 이야기 구조와 설정에도 불구하고, 공연의 리듬을 완전히 무겁고 느리게 전개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장면마다 경쾌한 인물 대사의 템포와 신체 리듬의 변화는 관객을 지나치게 극적 긴장감에 짓눌리지 않도록 숨통을 트인다. 어쩌면 그것은 극적 분위기에 부담을 덜어내고자 하는 배려 차원일 수도 있으나 작품적으로 본다면, 그러한 사소한 리듬의 변주를 동반하는 것은 추상적이고 관념화된 비극적 정황을 고착화하지 않고, 현실의 질감을 살려 이 시대 살아 있는 인간의 이야기로 새롭게 재편하는 장치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사마귀 의미

작품 제목이기도 한 〈THE PRAYING MANTIS〉, '사마귀'의 의미는 이 연극의 실상을 보다 명확하게 접근하게 해준다. 극중 인물의 대사에서 드러나지만, 사마귀는 '기도하는 듯한 자세'를 지닌 곤충으로 흔히 인식되지만, 실제로는 사냥을 준비하는 포식자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이중성은 곧 이 작품 속 인물들의 조건을 함축한다.

그들은 은신, 은둔하고 있는 이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생존과 욕망을 위해 끝없이 계산하고, 강한 열망으로 바라는 것을 움켜쥐고, 때로는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한다. 세 자매는 피해자와 공모자의 위치를 동시에 점하고 있으며, 이들이 머무는 저택은 피신처이자 감옥이디.

또한 극중 아버지는 보호자와 가해자의 그림자를 동시에 두르고 있다고 할 것이다.이런 의미에서 극단 호감의 〈THE PRAYING MANTIS〉는, '왜 지금 대전에서 칠레 연극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1970년대 칠레의 이야기는 어쩌면 점차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이 세계, 폭력이 은폐된 제도권, 외부와 단절된 삶의 구조, 말해지지 않는 진실과 공모의 침묵은 오늘 한국 사회와 긴밀히 연결해 볼 만하지 않을까.

지역 관객이 이 작품을 통해 마주하는 것은, 칠레라는 멀고 먼 남미의 다른 세계의 얼굴, 타자성이 아니라, 그 공간을 통해 비추어지는 바로 지금 여기, 우리 얼굴이다. 한편, 작품의 배후, 즉 역사적·정치적 맥락이 강한 이번 작품이 과연 이 소극장을 찾은 관객에게 어느 수준으로 그 맥락이 잘 전달되었는지는 질문이 남는다. 칠레 연극도 연극이지만 남미 현대사는 더 변방이기도 한 우리에게 그 메시지가 충분히 잘 전달되었을까.

어쩌면 어느 관객은 밀실 스릴러 혹은 그로데스틱한 가족극정도로 수용될 수도 있다. 프로그램북에 1970년대 칠레의 배경이나 권력 구조에 대한 간략한 해설이 더해진다면, 작품이 지닌 본래 층위가 보다 잘 공유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닫힌 문에 대한 소극장 무대의 제약도 다소 아쉽다. 상징적 무대 구조를 설계하고, 그 상징을 극대화할 수 있는 보다 세밀한 인물의 동선, 조명 위치나 가구의 배치를 달리하면 어땠을까. 하이그로시한 무대 바닥 안에 인물도 신부드레스와 같은 상징적 소품, 가구가 다 올라와 있는 게 조금은 답답해 보였다.

무엇보다 극적 인물의 대별, '후안'과 '세 자매'의 구별만큼 '세 자매' 역시 보다 그 관계와 이면의 폭력성이 더 선명하게 보일 수 있었다면 그 감각의 강도에 따라서 작품의 메시지의 체감이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예측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정된 재원으로 소극장 환경에서 이만큼의 상징과 역사성을 가진 〈THE PRAYING MANTIS〉가, 지역 연극무대에 올려졌다는 것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다. 생소한 칠레 연극을 현재 시점의 지역 관객과 만날 수 있게 했다는 점, 남미의 과거를 빌려 한국의 오늘을 돌아보게 한 점, 계급성과 억압, 숨겨진 진실의 구조 등과 같은 다양한 접근을 해볼 수 있는 상징적 무대를 집약해냈다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할 만하다.

태극기와 성조기와 십자가를 든 이들보다

본래 'mantis'는 그리스어로 예언자, 점치는 자를 뜻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앞다리를 모은 이 곤충의 자세에서 신탁을 기다리는 예언자(seer)의 형상을 보았고, 그래서 이 작은 육식 곤충에게 예언자의 이름을 부여했다고 한다. 기도와 예언, 기다림의 몸짓 안에 사실은 치밀한 사냥과 폭력이 숨어 있는 셈이다. 이 양가성은 1970년대 칠레 사회를 가르는 구조적 폭력의 얼굴과도 닮아 있다.

'슬라보예 지젝'의 말을 인용한다면, 자본주의의 근본적 폭력은 더 이상 악의적 의도를 지는 특정인물에 환원되지 않고, 사회 시스템 그 자체의 객관적 폭력으로 작동한다고 하였다. 〈THE PRAYING MANTIS〉의 외딴 저택은 바로 그 구조적 폭력이 응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연극에서 진짜 폭력의 주체는 무대 위 인물이라기보다, 그들을 이 외딴 저택으로 몰아넣은 시대와 구조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면서 다가올 파국을 예감하면서도 결코 바깥을 향해 말하지 못하는 '사마귀적 존재들'의 은신처가 바로 오늘의 극장 안이었는데, 극장 밖을 나서니 어쩌면 이 세계가 바로 그 자매들이 살고 있는 외딴 저택이 아닌가도 싶다. 태극기와 성조기와 십자가를 든 이들의 폭력보다, 그 폭력을 낳는 이 세계의 구조 자체, 그럼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일상'이 무척 오싹하고 무섭다. (*)

극단 호감 <THE PRAYING MANTIS>
(2026.07.03. 드림아트홀)

작: 알레한드로 시에브킹
번역: 문삼화
연출: 정준영
출연: 신선희, 이성희, 김도윤, 오해영, 정아더

극단호감 칠레연극 사마귀 지젝 구조적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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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서 나고 자랐으며, 전통연희, 굿, 마당극 등을 연구하고, 또 그 마당을 보러 다녔다. 공연장 안팎을 분주히 걷다 보니,연극, 공연 축제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이 생업이 되었다. 지역 문화예술정책에 관심이 많아 이와 관련한 심의, 자문 등의 일도 겸하고 있다. 2024년, 『묵음_ 다음에 걸음, 그리고 스페이스바』 (그래도, 2024) 등을 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