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명> 스틸
시네마토그래프
2024년 12월 3일, '계엄의 밤'이 한국 사회에 불러온 충격은 수치로 계측하기 힘들 정도의 파장을 일으켰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다시는 벌어질 일 없다던 쿠데타 시도가 21세기 한복판에서 공공연히 벌어진 탓이다. '일찍 자고 일어나니 다 지나간 일'이 아니란 것. 상당 기간 적지 않은 이들이 정신적 충격에 혼란함을 토로했다. 그 후유증은 현재 이어지는 극심한 사회 갈등, 정신적 내전 상태로 고스란히 계속 이어지는 중이다.
문화예술은 시대의 불안을 반영하게 마련이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작년부터 시작된 계엄 시도와 이후 과정을 다룬 영화는 국내 영화제에서 쏟아지는 중이다. 그런 가운데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픽션 형식 장편영화도 등장했다. <검은 여름>을 선보였던 이원영 감독의 신작 <미명>이 극장에서 관객을 맞이하려 한다. 기록영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표현할까 궁금할 만하다. 그런 기대에 영화는 아주 기이한 방법론으로 보답한다.
영화는 12.3 계엄 전후의 어수선하고 혼란하기 그지없던 사회 분위기를 농축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체험했고 공유하는 객관적 'fact' 체크가 작품의 목적은 아니다. 그건 이미 다 알고 있으며 다큐멘터리의 몫이라 판단했기 때문. 극영화가 차별화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 대안적 형태의 창작은 어떻게 가능할지 모색이 도파민 중독과 극도의 상시적 불안 사이를 롤러코스터처럼 널뛰는 작금 한국인의 심정 묘사를 향해 폭주한다.
개인의 비극과 세상의 붕괴가 연결되는 방식
젊은 부부는 혼란한 세상에서도 서로를 의지하고 기대며 작은 섬처럼 존재해 왔다. 기성세대 방식 표현대로라면 '금슬 있는 부부'의 전형이라 해도 좋겠다. 미래는 불확실하지만, 그래도 함께 하기에 꿈을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하필 그들을 둘러싼 세상이 혼돈으로 치달을 때, 서로 의지하던 부부에겐 돌이킬 수 없는 부재 상황이 덩달아 터진다. 이는 회복할 수 없는 영구적 피해다. 극단적인 돌발 사태에 남자는 아무런 대응도 가능하지 않다.
제작진은 여기에서 비범한, 혹은 과잉의 도전의식을 발휘한다. 작중 남편의 처지는 그야말로 비극적 신파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세상은 암흑으로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건만, 유일한 등불이자 위안이던 사랑하는 이를 손 써볼 틈도 없이 영영 잃고 말았다. 아무리 가까운 이라도 온전히 공감하기도, 이해하기도 불가능한 그들만의 비극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듯, 그의 심장은 갈가리 찢기고 삶에 아무 의지를 찾을 수 없으리란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극한 정서를 감독은 시대의 불안과 절묘하게 버무리고자 도전한다. 영화 속 극단적 상황은 가로와 세로, 씨줄과 날줄로 교차하듯 이중의 구조로 엄습한다. 한쪽에는 누구나 객관적으로 인지하는 계엄 사태 이후 흉흉한 혼란상이 자리한다. 다른 쪽에는 벼랑 끝에 선 한 남자의 지독한 우울과 불안이 도사린다. 이 공적/사적 통틀어 희망이란 찾을 길 없는 황폐한 풍경을 어떻게 하나의 거대한 추상화로 구현할 것인가가 작가적 야심을 거쳐 구현된다.
시각 이미지와 문학적 서사에서 '소리'의 울림으로 중심이동
▲<미명> 스틸
시네마토그래프
영화는 도입부부터 의외성으로 가득하다. (아마도) 주인공 부부는 남편의 동생 부부와 식사하며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던 참이다. 그들의 간격 없는 대화는 친밀감을 상징한다. 대개 본격적으로 영화가 출발하며 등장인물들을 관객이 식별할 수 있도록 조감도를 눈앞에 가득 펼치는 게 정석이건만, 어째 얼굴을 확인할 수 없는 노릇. 그래서 더 청각에 의지해 인물들을 파악해야 한다.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평범해 보여도 삶의 고민으로 가득하다.
둘만의 보금자리로 돌아온 부부, 단출한 밥상이 올라온다. 바쁜 와중에 아내가 차린 밥상을 감사히 받는 남편, 맞벌이 부부가 공들여 반려의 식사를 챙긴다는 건 무엇보다 강렬한 사랑과 유대감의 표출일 테다. 밥술 얻어먹는데 감지덕지한 신랑과 시간 쪼개 장만한 상을 함께할 짬도 없는 바쁜 아내의 외출. 그리고 영영 마지막이란 충격적 순간은 벼랑으로 추락하듯 툭툭 단절되며 파편적으로 연출된다. 후련하게 이어붙이기보단 부조리한 상황의 상징화 표현이다.
연구자로 대학 주변에서 살아가던 남자는 청산유수 언변을 지녔다. 그러나 비극의 주역이 된 후 그는 목소리를 잃는다. 영문도 원인도 알 방법이 없다. 정신적인 후유증이라 짐작할 뿐, 현대의학은 그에게 속 시원한 답도 해결책도 제시할 수 없다. 정신병이 사회적 요인에서 기인한다는 증명으로 작용하는 대목이다. 이제 그는 필담으로만 타인과 소통할 수 있다. 대화 수단을 상실함과 동시에 그의 얼굴도 화면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때부터 그의 존재감은 오히려 두드러진다. 말할 수 없어 고통을 겪는 와중에도 사회적 관계 때문에 업무 공백을 최소화해야 한다. 남자는 자신의 비통한 사정을 제대로 풀어내지도 못한 채 사죄하듯 여기저기 이메일과 sns 메시지로 보고하느라 분주하다. 그것이 관객도 공감할 현실 우리들의 삶이다. 그런 남자를 위로하고자 찾아온 (영화에서 얼굴이 주인공 부부 외엔 유일하게 공개되는) 지인은 자신의 고충 털어놓느라 바쁘다. 누구나 삶이 팍팍하다.
속사포처럼 자신의 기구한 상황을 늘어놓는 친구에게 남자는 휴대전화 자판을 두드려 대화를 잇는다. 현대판 '필담'의 순간이다. 속도 차이에 버거워하면서도 그는 조금씩 타인과의 소통을 복구하려 애쓴다. 온전히 음성 언어를 회복하지 못해도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이 이룩한 성과를 열심히 활용한 덕분이다. 그렇게 다시 여러 결의 비극을 겪은 이후 삶이 시작된다. 남자는 계획했던 몽골 여행을 떠나고 코로나 때 많은 이가 그랬듯 자연을 통해 안정을 꾀한다.
21세기 한국의 오르페우스처럼 비할 데 없는 슬픔의 표현
▲<미명> 스틸시네마토그래프
몽골에서의 시간은 그저 현실 잊기 위함이 아니다. 그의 연구 주제인, 몽골 대초원 유목민의 예술이자 의사소통 수단이기도 한 '흐미'가 지금 주인공이 처한 언어와의 단절과 연계되며 울림을 전한다.
그렇게 가장 원초적인 인류의 메시지 전달 방식에 주목하면서 다시금 현실로 귀환한 남자, 하지만 겉으론 위기를 극복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찾은 듯 보이는 그에겐 치유 불가능한 상처가 여전히 남은 채다. 겉으론 어쨌듯 홀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하지만, 과연 그에게 무엇이 남아 있을까? 그는 프로메테우스가 신들에게 저항한 징벌로 매일 독수리에게 가슴을 쪼이듯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아내를 잃은 그로선 끔찍한 무저갱의 저주와 같은 일.
목소리가 나오지 않지만, 그는 마음의 언어로 애타게 아내를 찾는다. 혹시라도 지금 곁에서 지켜보고 있을 것 같다. 아내라면 당연히 그럴 테다. 비록 증명할 수 없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픈 심정으로 그는 영혼의 노래를 틈만 나면 부른다. 오르페우스가 저승길을 거슬러 아내를 찾으려는 모험에 나선 것처럼 말이다. 영혼과 소통하던 고대 탱그리 신앙의 무당이라도 불러올 기세다. 냉혹하고 답답한 세계에서 그를 버티게 해준 유일한 존재를 지울 수 없다.
그렇게 세계가 12월 3일 이후 간신히 감추고 있던 균열의 틈새가 열리는 순간 벌어진 부부의 비극은 극점에 닿는다. 오르페우스의 실패처럼, 남자 역시 전철을 밟기에 정한은 사무친다. 영화는 기이한 추모와 경각심의 조응을 예상하지 못한 파격적 실험으로 연결한다. 대체 어떻게 끝낼지 머리를 쥐어뜯어도 애초 보법이 다르기에 부질없는 노릇. 지독히 음울하지만, 예측 불능에서 기인한 흥미로움은 끝까지 잃지 않는다.
실제 감독 부부인 이원영 감독&임정은 PD의 기이한 합작 결과물을 누군가 올해의 '괴작'에 꼽을 테지만, 모두가 비슷비슷 성공 사례에 달려드는 세태에 이들의 작업은 충격으로 각인될 만하다. 실제 기록영상과 극적 연출을 혼합하고, 사실상 부부의 노동으로만 완성한 최소규모 장편영화가 걸어갈 길은 무엇일까? 어쨌건 문제작임은 확실하다.
<작품정보>
미명
The Glimmering
2025 한국 드라마
2026.07.08. 개봉 64분 12세 관람가
감독/각본/촬영/편집/음악/음향 이원영
PD 임정은
출연 이원영, 임정은, 손승범
제작 화목한영화사
배급 시네마토그래프
2025 2회 남도영화제 장편경쟁 작품상
2026 14회 무주산골영화제 영화평론가상, 뉴비전상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공유하기
어쩌면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가장 문제적인 계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