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의 산장으로 휴가 보내러 간 여자가 겪은 끔찍한 일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키퍼>

화가 '리즈'는 연인 '맬컴'이 소유한 산장으로 휴가를 보내러 왔다. 방해받지 않고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낼 기대에 부풀었지만, 도착부터 성가신 일이 거듭 발생하고 누군가 자신을 계속 주시하는 듯 꺼림칙한 기분이 그치지 않는다.

이웃 오두막에 산다는 맬컴의 사촌 '대런'은 무례한 행태로 불편함을 증폭하고 이상한 환영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게 현실인지 환상인지조차 헷갈릴 지경이다. 대관절 리즈가 느끼는 악몽의 실체는 무엇일까?

1차전: 관계 호러

 <키퍼> 스틸
<키퍼> 스틸그린나래미디어㈜

<키퍼>의 전반부는 불친절하게 여겨질 만큼 상황 해설이나 배경 정보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대도시에서 안정된 삶을 살던 주인공은 자신의 그림을 구매했던 고객과 사랑에 빠진 지 1년이 막 된 참이다. 자상하고 친절한 데다 의사라는 신용 있는 직업을 가진 상대는 지금껏 만나봤던 별 볼 일 없는 남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다. 둘은 진지하게 미래를 함께 고민하는 사이로 발전했고, 둘의 관계에서 전환점이 될 휴가를 위해 시간을 만들고자 애써 노력해왔다.

예술가의 영혼을 지닌 리즈는 대도시의 삶에서 벗어난 고립된 산장이 부담스럽다. 오직 맬컴에 대한 신뢰로 인내하며 여기까지 따라온 것. 자신이 너무 예민한 탓이라 여기며 집 곳곳에서 느껴지는 기괴한 감각을 애써 외면해 본다. 연인은 친절하고 꼼꼼하게 챙겨온 덕분에 겉으로는 아무 부족함이 없는 멋진 휴가다. 그렇지만 서서히 예기치 않은 변수가 불청객처럼 그녀 앞에 도착한다. 불쾌한 남자친구의 사촌은 참아내지만, 설명할 수 없는 불길함은 도리가 없다.

맬컴은 그녀가 낯선 장소에 과민한 것뿐이라 위로하지만, 리즈는 점점 신경쇠약 직전으로 접어든다. 그러고 보니 애인의 태도도 뭔가 석연치 않다. 초콜릿을 먹지 않는다고 거듭 말해도 성의를 봐서 맛 좀 보라며 관리인이 갖다둔 케이크 시식을 강권하고, 화장실 문앞을 서성이며 자꾸만 말을 걸고 들어가도 되냐며 종용한다. 주변에서 감각되는 불편한 현상을 호소해도 얼버무리거나 기분 탓이라며 번번이 말을 돌리기만 한다. 내가 모르는 뭔가 있는 걸까?

급기야 맬컴은 급한 환자가 생겼다며 혼자 도시로 떠나버린다. 애써 혼자 시간을 보내도 괜찮다며 연인을 격려한 리즈이지만, 홀로 남게 되자 기현상은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된다. 초현실적 존재가 집을 거듭 침입하고, 내가 헛것을 본 건지 모든 게 환상인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이 집 전체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느껴진다. 벽 틈에선 끼익대는 소리가 들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형상이 말을 걸어오거나 복도를 서성인다. 하지만 막상 돌아보면 혼자뿐이다.

친구 '매기'와 통화하며 마음을 다잡고자 하지만, 묘하게 갑자기 친구에게 불쾌감을 느낀 리즈는 도움의 손길을 거절하고 거칠게 전화를 끊는다. 마침 맬컴이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다. 안도한 리즈였지만, 그의 행동은 점점 수상하다. 급기야 상대에게 신뢰가 무너진 리즈는 이제 모든 게 의심스럽기만 하다. 겉으로 봐선 주인공이 흥분상태일 뿐이지만, 서서히 불길한 조짐이 그녀 주위를 휘감듯 스며든다. 형언할 수 없는 불길함이 안개처럼 산장을 감싸고 말았다.

2차전: 포크 호러

 <키퍼> 스틸
<키퍼> 스틸그린나래미디어㈜

전반부는 주인공이 가장 안전해야 할 한적한 사유지 속 산장, 사랑하는 연인에게 오히려 두려움을 느끼며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형상화한다. 건조하게 표현하면 리즈에겐 별다른 사건은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았다. 불편한 애인의 친척이 잠깐 방문한 건 관객도 일상에서 종종 겪는 체험에 불과하다. 세상 혼자 사는 것 아니니 오히려 감정이입 안되는 주인공이라며 넌더리 낼 이도 나올 법하다. 하지만 타인의 사정이라 치부하기엔 수상한 구석이 한둘이 아니다.

맬컴이 자신에게 감추는 게 있다는 결정적 증거를 확보한 리즈가 상대를 따져묻자 곤란해하던 남자친구는 비로소 진실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죄의 고백이 아니라 여태껏 그녀가 느꼈던 초현실적 경험은 모두 실체가 있다는 폭로다. 리즈는 고양이에 쫓기다 구석에 갇힌 가련한 생쥐에 불과한 것. 이제 감출 필요가 딱히 없는 포식자는 자랑과 과시가 뒤섞인 설명을 잔뜩 겁에 질려 울부짖는 연인 앞에 털어놓은 것. 자신이 승리자란 여유가 한껏 느껴진다.

모든 게 모호하기만 한 덕분에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던 이야기는 이제 실체가 밝혀지며 장르가 뒤바뀐다. 수백년 묵은 끔찍한 사건과 그로 인해 발생한 불가사의한 현상, 가해자가 득세하고 불의가 승리한 뒤집힌 역사가 한꺼번에 개방된다. 정복자의 의기양양한 자화자찬과 자신의 지배를 영속하기 위한 제물 봉헌의 시간이 다가온다. 물론 리즈가 그 산제물로 낙점된 것. 모든 건 계획대로다. 맬컴과 사촌 대런, 웨스트브리지 가문의 담합은 이번이 처음일 리 없다.

이제 영화는 역사물, 그것도 교과서에서 어물쩡 넘기는 과거의 추악한 정복과 식민주의, 승자 위주로 편집한 기록 이면에 대한 폭로와 오랜 세월 첩첩이 쌓인 원한과 증오를 화면 가득 개방한다. 역설적으로 피해자의 한을 달래고자 또 다른 희생자를 던져주는 불쾌한 대물림이 비로소 실체를 공개한다. 그리고 잔혹한 역사가 지금 현재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선연한 증명이 자연히 관객에게 전염된다. 현대인의 소외와 불안은 원치 않은 유산에서 비롯된다는 것.

공포 문학의 매혹과 연결되는 계승작업

 <키퍼> 스틸
<키퍼> 스틸그린나래미디어㈜

<키퍼>는 서구 공포문학의 무한한 원천을 계승한 작업이다. 맬컴의 추악한 배경은 현존 미국 최고의 대중작가, 스티븐 킹이 자기 작품세계의 근원이라 추앙하는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 속 세계관과 직결된다. 20세기 초반, 미국으로 물밀 듯이 들어온 이민자에 대한 두려움, 유럽 개척자가 선주민을 절멸하고 차지한 북미 대륙 곳곳에 잔존한 정복 이전의 흔적, 시대 변화에 휩쓸려 쇠락한 미국 동부 개척민 사회의 불길한 변이가 곳곳에서 은유된다.

아무 죄 없지만, 그저 폭력에 굴복당한 가련한 희생자에 대한 사과와 반성 대신, 그들을 조롱하고 비웃으며 정복자들의 추악함을 감출 생각 없는 웨스트브리지 일가의 태도는 자연스레 미국 주류 백인사회를 상징한다. 'W.A.S.P', 영국계 기독교 백인이 미국의 주류이자 정체성이란 시대착오적 신념을 놓지 않은 세력이 극우화하고 자신들에게 기어오르는 열등 인종과 신입 이민자, 소수자 집단을 적대하며 벌이는 온갖 부도덕과 폭력이 압축되듯 펼쳐진다.

과거에 맬컴 집안은 자신들의 대토지에 흘러 들어온 이들을 재미로 사냥하길 거리끼지 않았다. 그들에게 아무 피해도 끼치지 않은, 그저 조용히 살던 존재를 재미 삼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집단은 부유한 백인 남성 정체성을 오랜 기간 유지해 왔다. 수백 년째 그들은 단죄는커녕, 대를 이어 여성을 제물로 바치며 그림자 세력으로 세상에 군림해온 것. 미국 사회가 태생적으로 갖는 부도덕함을 고스란히 압축한 영화 속 풍경이다.

여기에서 제작진은 흥미로운 설정을 가미한다. 가문의 정체성을 거리낌 없이 노출하는 대런과 달리 맬컴에게 개별적 특성, 로맨티스트로서의 면모를 추가한 것. 리즈에 대한 그의 호감은 온전히 위장과 기만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오랜 세월 축적된 가문의 죄악은 숙명으로 그를 짓누른다. 고작 '악어의 눈물'이 그가 보일 수 있는 전부다. 마치 샤를 페로의 대표작 <푸른 수염>을 현대 미국을 배경으로 시각화한 느낌의 이미지가 관객 눈앞에 선연하게 전시된다.

말초적 공포를 초월하려는 공포 장르의 도전

 <키퍼> 스틸
<키퍼> 스틸그린나래미디어㈜

<키퍼>는 은근히 모험심 넘치는 도전이다. 순수 공포영화 팬이라면 현대사회에서 고립된 개인이 겪는 관계 갈망과 역으로 증폭되는 타인에 대한 경계심을 극대화한 전반부를 보다 선호할 테다. 설명할 수 없기에 더 두려움을 촉발하는 '형언할 수 없는 공포'의 마성 덕분이다. <롱레그스> 등 여러 편의 수작 공포물을 선보인 감독과 근래 화제가 된 <백룸> 스태프를 고스란히 옮긴 제작진의 내공이 어우러진 결과다. 심지어 오스굿 퍼킨스 감독은 <백룸>의 제작자다.

오스굿 퍼킨스 감독의 혈통에는 공포영화가 흐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기와 연출 경력 태반이 한우물로 공포 장르를 굴착하는 듯하다. 집안 내력이라도 있나 해서 살펴보면 살짝 놀랄 만하다. 공포영화에서 '고전'이라 불릴 만한 몇 안 되는 작업이자, 세계 영화 역사에 굵직한 흔적을 남긴 알프레드 히치콕의 명작 <사이코>에서 무표정한 살인마 역할을 맡은 명배우 안소니 퍼킨스가 감독의 부친이니 말이다. 역시 가족 환경은 무시할 수 없나 보다.

전반부를 그냥 이어만 가도 꽤 흥미로운 작업일 텐데, 밸런스 붕괴를 감수하며 감독은 미국 역사에 대한 전복적 시각을 가미해 잔혹 판타지와 대안적 역사를 버무리는 후반부로 과감히 질주한다. 중세의 주술과 백인 정복자들이 오리엔탈리즘과 유사하게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풍습과 전설에 가졌던 수집벽이 뒤틀린 형태로 혼합되어 이 영화 속 짧지만 기괴한 공포로 연결된다. '푸른 수염'의 그로테스크한 재연과 원주민의 악마화가 뒤섞인다.

여기에 북미 대륙 마녀재판의 기억이 부활한다. 근대 초기까지 소외된 여성을 향한 가학적 폭력은 <키퍼> 속 공포의 실체다. 백인 남성 지배집단은 승리자의 역사로 과거를 덮고 자신들의 시대가 영원하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억눌린 원한과 분노는 언젠가는 한이 서린 공간을 잠식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은 '여성-괴물'화로 완성된다. 21세기 백인 여성은 인종을 초월해 주류 지배층의 '괴물'이란 낙인을 기꺼이 받아들여 희생당한 자들과 완벽히 동기화한다.

전후반의 이질감이 꽤 큰 작품이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감독이 관객에게 던지는 퍼즐 맞추기처럼 '떡밥'이 시작부터 정직하게 제시되고 있다. 현재의 불안은 사회적 맥락과 연결되고, 그 근본은 과거의 역사와 직결된다는 성찰은, <키퍼>가 피서대책을 위한 깜짝 흥행몰이에만 함몰되지 않고 공포영화와 작가주의를 이어내려는 도전이란 믿음을 확신으로 바꾼다. 포크 호러 장르의 특성, 중세 역사와 고대 민담 등을 숙지하면 훨씬 흥미롭게 누릴 성격의 작업이다.

<작품정보>

키퍼
Keeper
2025 캐나다, 미국 공포
2026.07.08. 개봉 98분 15세 관람가
감독 오스굿 퍼킨스
출연 타티아나 마슬라니, 로시프 서덜랜드
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
제공/공동배급 ㈜플레이그램
키퍼 오스굿퍼킨스감독 타티아나 마슬라니 로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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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