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블 채널이나 OTT 플랫폼이 지금처럼 활성화되기 전, 대한민국에는 드라마 시작 시간이 되면 거리가 한산해지던 시절도 있었다. 온 가족이 저녁 식사를 마친 뒤 TV 앞에 둘러앉아 같은 드라마를 시청했고, 다음 날 직장에서는 전날 방영된 드라마 이야기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는 <모래시계>, <첫사랑>, <허준>, <대장금>, <여명의 눈동자>, 그리고 <야인시대>를 빼놓을 수 없다. 특히 2002년~2003 방영된 SBS <야인시대>(총 124부작)는 최고 시청률 51.8%를 기록하며 명실상부한 국민드라마로 자리매김했다.
실존 인물 김두한의 삶을 그린 이 작품은 그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제작되어 역사 왜곡과 미화 논란도 있었지만,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박진감 넘치는 액션으로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불러 모았다.
액션의 빈 공간을 채운 강렬한 존재감, '시라소니'
드라마 초반을 이끌었던 청년 김두한 역의 배우 안재모가 하차하고 성인 역을 김영철이 맡으면서 시청자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김영철의 연기력은 흠잡을 데 없었지만, 갑작스러운 이미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시청자들도 적지 않았다. 이후 드라마는 주먹 세계를 중심으로 한 액션물에서 정치와 현대사를 다루는 역사극으로 무게중심을 옮겨갔고, 이 과정에서 시청률이 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변화의 시기, 액션이 비워둔 공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인물이 있었다. 바로 '시라소니'였다. 극 중 시라소니를 연기한 배우 조상구는 단 몇 회의 등장만으로도 강렬한 존재감을 남겼다. 실존 협객 이성순을 모티브로 한 그의 거친 카리스마는 성인 김두한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실제 시라소니 이성순의 아내는 드라마 속 조상구의 연기를 본 뒤 "우리 남편은 저렇게 건들거리는 사람이 아니었다"며 외면했다고 한다. 조상구 역시 최근 방송에서 이 일화를 직접 소개하며, 실제 시라소니의 모습과 드라마 속 캐릭터에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역설적으로 이는 그의 연기가 대중에게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야인시대> 방영 당시 날카로운 눈빛과 거친 카리스마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던 조상구
SBS
흥미로운 사실은 '조상구'라는 이름이 배우의 본명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본명은 최재현(崔在賢)이다. 1986년 이장호 감독의 영화 <이장호의 외인구단>(원작 이현세)으로 데뷔한 그는 극 중 '조상구' 역을 맡았고, 작품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대중은 그의 본명보다 배역 이름을 더 많이 부르기 시작했다.
초창기에는 본인이 지은 이름도 아닌 데다 배역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주변에서 "넌 천상 조상구야"라는 말을 워낙 많이 들은 끝에 결국 활동명으로 받아들이게 됐다고 한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그의 학창 시절 친구인 이현세 화백의 대표작, <공포의 외인구단> 속 주인공 오혜성(일명 '까치')의 실제 모델이 바로 조상구(본명 최재현)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별한 인연 때문인지, 그는 이후 영화 <지옥의 링>(1987)에서 주인공 오혜성 역을 직접 맡아 연기하기도 했다.
배우로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그는 사실 1980년대 후반부터 영화 번역가로 활동하며 <레옹>, <타이타닉>, <맨 인 블랙>, <밀리언 달러 베이비> 등 약 1400편에 이르는 해외 영화를 우리말로 옮긴 베테랑 번역가로도 알려져 있다. 생계를 위한 선택이었다고는 하지만, 배우와 번역가라는 두 영역 모두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그의 삶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라 할 만하다.
비로소 시작된 야인들의 '인생 2막'
최근 그는 유튜브 예능 <요즘 뭐해>를 통해 다시 대중 앞에 섰다. 잊힌 줄 알았던 시라소니의 귀환에 필자를 비롯한 많은 팬이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어느덧 70세를 넘긴 그의 나이였다. 하지만 특유의 카리스마는 20여 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매력은 출연하는 게스트들이 오직 드라마 <야인시대>의 주역들이라는 점이다. 마치 '드라마에 출연했던 모든 배우가 나오고 나면 이 프로그램도 아름답게 마무리하자'고 약속이라도 한 듯, 배우들이 차례로 등장해 근황을 전하며 시청자들의 오랜 궁금증을 시원하게 해소해 주고 있다.
시라소니의 최대 라이벌 이정재 역을 맡았던 김영호를 비롯해 사북청년단의 정팔 역을 맡았던 배우 정형기 등이 출연하여, 실제인지 연기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정교했던 그들의 '연기 비화'와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특히 두 배우 모두 힘겨운 투병의 시간을 고백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 많은 시청자의 마음을 울렸다.
무엇보다 반가웠던 인물은 명동 주먹 이화룡 역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안승훈이었다. 그는 드라마 <첫사랑>(1996)의 송왕기 역을 비롯해 <불멸의 이순신>의 녹도 만호 정운, <연개소문>의 검모잠 등 시대극에서 선 굵은 연기로 큰 사랑을 받았던 그는 한동안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져 많은 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던 터였다. 항간에는 그가 연예계를 완전히 떠나 은퇴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번 방송을 통해 그동안 떠돌던 은퇴설을 단호히 일축했다. 배우를 은퇴한 것이 아니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건강보조식품 판매 등 다양한 일을 하며 치열하게 살아왔을 뿐이라는 것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에서 평범한 가장으로 살아온 그의 고백은 날 것 그대로의 묵직한 감동을 안겼다.
거기다 시청률(65.8%)을 기록한 전설적인 드라마이자 <첫사랑> 방영 당시의 황당하고도 웃픈 일화도 털어놓았다. 조소혜 작가로부터 "시청자들에게 욕 좀 먹을 수 있다"는 언질을 받고 악역을 승낙했는데, 워낙 실감 나게 연기한 탓인지 출근하려다 보니 자신의 차량 타이어 4개가 모두 펑크가 나 차량이 주저앉아 있었다는 고백은 그 시절 국민드라마가 가졌던 파급력을 다시금 실감케 했다.
▲반가운 투샷 유튜브 예능 <요즘 뭐해>에서 서로 만난 배우 조상구(왼쪽)와 안승훈(오른쪽)유튜브 <요즘 뭐해>
이제 드라마 <야인시대>가 종영한 지도 어느덧 20여 년이 흘렀다.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하는 사이 세상은 급박하게 흘러갔고,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도 완전히 달라졌다. 그러나 여전히 유튜브 예능 <요즘 뭐해>가 우리에게 건네는 인사는, 단지 흘러간 추억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친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
이제 그 시대의 야인들은 우리네 삶과 마찬가지로 치열한 현실이라는 링 위에서 인생 2막을 당당히 열어가고 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지막이 그 시절의 멜로디를 흥얼거려본다.
"나는 야인이 되겠어, 거친 비바람 몰아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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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1일 만우절, 거짓말처럼 뇌경색이 찾아왔습니다. 재활병원 병상에서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 자판을 두드리며 세상과의 대화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투병 3년, 100편이 넘는 기사를 오마이뉴스에 게재하며 오늘도 사람과 삶, 희망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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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뭐해" <야인시대> 시라소니가 전하는 안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