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 빠진 공포는 가라... 몰아치는 대신 조여드는 공포

[김성호의 씨네만세 1387] <키퍼>

많은 영화는 같은 곳을 향한다. 보는 이를 움직여내는 것이다. 창작자와 관객 사이를 매개하는 영화란 매체의 가치는 결국 관객에게 닿는 순간에 있다. 창작자의 자기만족을 넘어 관객에 닿아 그를 움직여내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많은 영화인의 꿈이다.

관객을 움직인다는 건 같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제각각이다. 멜로와 스릴러, 공포와 드라마의 지향이, 또 관객을 움직이는 방식이 같을 리 없다. 감성을 자극하고 낭만을 극대화하는 건 멜로의 방식이다. 반대로 부조리를 드러내고 현실을 일깨우는 영화 또한 존재한다. 공포영화를 찾는 관객은 오싹함, 또 놀라움을 바란다. 그를 충족케 하려는 영화들이 꾸준히 개발해온 방법론이 이제는 몇 가지 흔한 방법론으로 자리하기도 했다.

어떤 공포영화는 윽박지르는 방식을 활용한다. 갑자기 나타나는 귀신이라거나 괴기스런 모양의 괴물, 자극적인 폭력과 끔찍한 장면들을 통해 관객에게 원초적인 공포를 안긴다. 이 같은 장치가 가장 효험을 발하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설정 또한 이제는 정형화되어 있다. 거듭 위기에 빠질 수 있도록 주인공 일행 가운데 모자라거나 속 터지는 선택을 하게 하는 이가 배치되는 것, 이런 녀석들이 한 명 씩 죽음을 맞는다거나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와 같은 설정이 너무나 흔히 쓰여 관객을 지겹게 할 정도가 되면 소위 클리셰의 문제가 효과를 압도하는 순간이 나타난다. 일단의 공포영화가 빠지는 함정이 바로 여기다.

키퍼 스틸컷
키퍼스틸컷그린나래미디어

사귄 지 1년, 처음 떠난 시골 여행

오늘 소개할 영화 <키퍼>는 한국서 곧 개봉을 앞둔 공포영화다. 감독은 지난 10여 년 간 줄곧 공포영화를 연출해온 오즈 퍼킨스, 저예산으로도 제법 볼 만한 작품을 내놓는 그 솜씨 덕분에 공포영화 애호가들 사이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진 이다. 퍼킨스는 올해 북미에서 화제작으로 떠오른 <백룸> 제작자이기도 한데, 직접 연출한 <키퍼> 또한 독창적인 공포물이란 호평이 나온다. 한여름 무더위 속 볼만한 공포영화를 목 빠져라 기다리는 관객에게 이 영화 개봉 소식이 반가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영화는 한 커플이 교외 외딴 별장으로 향하며 시작한다. 리즈(타티아나 마슬라니 분)와 말콤(로시프 서덜랜드 분)으로, 사귄 지 꼭 1년이 된 커플이다. 보조석에 탄 리즈가 친구와 통화하는 내용을 통해 영화는 이들의 성격과 배경을 짐작하게 한다. 리즈는 도시에서 나고 자란 자유분방한 여성이다. 전 애인들과는 1년을 버티기 어려웠던 리즈가 말콤과는 꽤나 안정된 연애를 하고 있는 건 주변인들에겐 놀라운 일인 듯하다. 투박한 시골 출신 남자와 거침 없는 도시 여자가 사귀고 처음으로 집을 떠나 말콤이 나고 자란 시골에서 겪게 되는 일, 그게 <키퍼>의 출발이 된다.

설정만 보면 새롭지 않다는 생각을 가질 법하다. 왜 아닐까. 저예산 공포영화가 일상을 보내는 곳을 떠나 고립된 지역으로, 그것도 애인이 나고 자란 곳으로 향하며 시작하는 건 흔한 설정이라 해도 좋겠다. <겟 아웃> 같은 영화가 대표적인데, 이와 같은 설정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고립된 장소는 외부의 도움을 구하기 어렵게 한다. 낯선 장소는 익숙한 이들의 조력 또한 차단한다. 심지어 애인에겐 친숙하고 자기에겐 그렇지 못한 장소라면 둘 사이가 달라질 경우 극명하게 유불리가 나뉘게 되는 것이다. 이 설정으로 <키퍼>가 누리는 효과가 이러하다.

키퍼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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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아치는 대신 잠식한다... 이 공포영화의 접근법

리즈는 도착 직후부터 무언가 이상한 조짐을 느낀다. 때로는 집 밖에서, 또 집 안에서 뭐라 집어 말할 수 없는 불온한 느낌과 마주한다. 탁자 위에 놓인 케이크 상자 위에 피처럼 보이는 자국이 묻어있다거나, 혼자 목욕을 하는데 배관을 타고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다거나, 누군가 밖에서 저를 훔쳐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거나 하는 식이다. 그러나 그 모두는 불편한 느낌쯤으로만 남을 뿐, 명확히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키퍼>가 독특한 지점이 여기에 있다. 통상의 공포영화라면 벌써 사람이 여럿 죽어나가거나 적어도 위협이 표면 위에 드러나야 할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이렇다 할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교외의 별장으로 와서 지내기로 한 주말 동안 애인은 갑자기 일터에 일이 생겼다며 저를 두고 도시로 나간다. 혼자 남은 리즈가 거듭 이상한 현상과 마주하는데, 막상 일이랄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리즈가 조금씩 이상해진다.

명확한 사건, 거듭된 위기를 통해 지속하는 영화가 아니다. <키퍼>는 극중 리즈에게 그러하듯, 관객 또한 불온하고 기괴한 분위기에 노출되도록 한다. 실재하는 위협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채로 리즈가 낯선 공간에서 마주하는 불유쾌한 감정을 겪도록 한다. 그녀가 보는 현실에선 일어나기 어려운 현상들이 영상으로 표현될 때 관객은 그것이 실재인지 환상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로 마치 극중 리즈가 된 듯 상황을 경험한다. 신비함보다는 기괴함이라 표현해야 좋을 불유쾌한 일들이 지속되며 고립된 공간에서 리즈가 느끼는 압박감이 커져간다.

키퍼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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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과 새로움을 적절히 취한 결과

마치 목적이 관객을 잠식하는 것이라는 듯 영화는 조금씩 강도와 빈도를 높여가며 낯설고 기괴한 장면을 펼쳐낸다. 그러나 그 모두가 통상의 공포영화에서처럼 갑자기 거세게 닥쳐오지 않는다.

언제고 충분히 리즈와 관객 모두를 함락시킬 수 있다는 듯 서서히 산 자의 영역을 잠식해 들어온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극장 안에 붙들린 관객처럼, 말콤이 돌아올 때까지 꼼짝 없이 별장 안에 있어야 하는 리즈의 상황이 묘한 긴박감을 던진다.

<키퍼>는 전형과 새로움을 적절히 취한다. 애인과 함께 고립된 공간에 간다는 설정, 그 애인을 주인공으로 놓는 대신에 믿을 수 없는 인물로 묘사한다는 점 등이 그렇다. 후반부 극을 전환하는 반전 또한 근래의 공포물이 일반적으로 갖추는 형식이다. 이들만 놓고 보자면 영화가 과연 새로운 작품이냐 반문할 수 있겠다.

키퍼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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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지 않은 연출이 반갑다

그러나 <키퍼>는 클리셰에 매몰되지 않는다. 사건을 통해 전개되는 통상의 작품과 달리,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영화적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단 걸 확인하게 한다. 알 수 없는 것들과 맞닥뜨리는 리즈의 상황이 기괴한 영상연출과 맞물려 사건이 없는 상태에서도 불유쾌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불편함이 쌓여 불안을 이루고, 다시 그 불안이 퍼져나가며 공포가 태어나기 좋은 환경으로 이어진다.

근래 유행하는 이른바 '바디 호러', 신체 훼손이 주는 공포감 또한 영리하게 활용한다. 신체가 온전하다고 믿는 상과 다를 때 관객이 느끼는 이질감, 육체가 훼손될 때 느끼는 본래적 불쾌감을 공포영화의 효과를 위해 효과적으로 동원한다.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식상해지기 쉬운 장치를 섬세하게 다루는 걸 보면 퍼킨스가 어째서 주목받는 공포영화 감독으로 꼽히는지를 알겠다.

<키퍼>는 흔한 공포물에 질린 관객에게 반가운 작품이다. 몰아치지 않고 잠식하는 방식으로 공포란 효과에 닿으려는 시도가 생각만큼 흔치 않다는 점에서 그렇다. 뻔하고 빤한 접근법이 오늘의 관객 앞에 더는 효율적이지 않기에 그 선택이 영리하고, 제가 택한 방식을 충실히 이행한다는 점에서 성실하기도 하다. 서사가 아닌 영상연출에 상당부분 기대야 하기에 누군가는 난해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공포란 감정을 들여다본 이라면 그것이 이해와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해하지 못해도, 어쩌면 바로 그러해서 두려울 수 있다. 이 영화가 서사보다는 분위기에 치우쳐 있는 것도 그에 대한 믿음 때문이겠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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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