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을 내려놓자, 함께 갈 사람이 보였다"

[현장] 춘천에서 첫발 뗀 '아르코 댄스 UP:RISE'... 작품보다 먼저 창작자의 관계를 만든 1박 2일

7월 초, 강원도 춘천 이상원미술관의 통유리창 너머로 짙은 녹음이 펼쳐진다. 여름 햇빛을 머금은 산과 나무가 창을 가득 채운다. 미술관 1층 카페의 테이블에 둘러앉아 커피와 카메라를 앞에 놓고 이야기를 나눈다.

함초롬, 손정현, 이세승, 기무간 등 네 명의 안무가를 비롯해 '아르코 댄스 UP:RISE(업라이즈)' 참여하는 모든 창작진들이 춘천에서 처음으로 긴 시간을 함께 보냈다.

 7월 1일~2일까지 춘천 이상원미술관에서 진행아르코 댄스 업라이즈 창작 워크숍
7월 1일~2일까지 춘천 이상원미술관에서 진행아르코 댄스 업라이즈 창작 워크숍이종철

이날 일정에는 미술관 전시를 관람하고 체험 프로그램도 있었다. 금속판을 두드리고 문양을 새겨 키링과 책갈피, 팔찌와 목걸이를 만들었다. 같은 재료에서 시작했지만 완성된 모양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서로 다른 안무가들이 하나의 프로젝트 안에서 각자의 작품을 만드는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다.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하지만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하지 않는 것. 저마다 다른 질문과 감각을 자신의 작품에 불어넣는 시간이다.

미술관 일정을 마친 참여자들은 KT&G 상상마당 춘천 아트센터로 이동했다. 저녁에는 식사와 아이스브레이킹, 네트워킹 프로그램이 이어졌고, 다음 날에는 창작교류 라운드테이블까지 마련됐다.

일정만 보면 전시 관람과 체험, 공간 투어를 결합한 공식적인 행사처럼 보인다. 그러나 7월 1일부터 2일까지 이어진 1박 2일 워크숍의 중심에는 작품보다 사람이 먼저였다. 앞으로 최대 2년 동안 창작의 시간을 함께할 안무가들과 아크로예술극장(이하 '극장')이 서로의 목소리와 말투, 생각의 속도를 알아가는 자리였다.

 네 명의 안무가들이 서로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진행한 공방 체험
네 명의 안무가들이 서로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진행한 공방 체험이종철

발표자료가 사라지자 사람이 보였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댄스 UP:RISE'는 작품 한 편의 제작을 넘어 안무가의 성장과 터닝포인트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기존에 창작지원사업이 제작비와 결과발표에 무게를 뒀다면, 이 사업은 극장이 가진 공간과 제작 환경, 관객과의 접점을 활용해 창작과정 전반을 함께하는 것이 특징이다. 사업을 기획한 김자은 PD는 "극장만이 가진 강점을 살려 안무가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은 무엇일까라는 고민에서 출발했다"라고 설명했다.

이 사업에서 극장은 안무가들로부터 완성된 작품을 받아 무대에 올리는 데 머물지 않는다. 작품이 태어나기 전의 질문과 망설임, 실패와 수정의 과정까지 함께하는 창작의 동반자를 자처한다. 안무가의 성장 역시 하나의 기준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도전에 나설 용기를 얻는 것이 성장일 수 있다. 무너졌던 자존감을 회복하거나 여러 창작진을 이끌며 작품을 책임질 역량을 갖추는 것 역시 성장이다.

첫 워크숍을 극장이나 연습실이 아니라 머나먼(?) 춘천에서 연 이유도 서로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익숙한 공간에서는 제작 일정과 작품의 진행 상황이 대화의 중심이 되기 쉽다. 반면 함께 이동하고 전시를 보고 식사를 나누는 동안에는 공식적인 회의에서 나오기 어려운 이야기가 들어설 여지가 생긴다.

 함초롬 안무가
함초롬 안무가이종철

"우리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왔지만,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경쟁의 플랫폼 안에 들어와 있잖아요. 솔직히 여기서도 자기 작품을 프레젠테이션해야 하나 걱정했어요." (함초롬 안무가)

함초롬 안무가는 워크숍에 오기 전 마음 한편에 부담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춘천의 분위기는 예상과 달랐다. 안무가와 스태프, 극장 관계자는 수평적인 관계에서 의견을 주고받았다. 작품을 증명하거나 누구보다 준비돼 있음을 보여줄 필요도 없었다.

함초롬은 그 시간에서 "자유가 주는 평안"을 느꼈다고 했다. 공식 프로그램이 '워크숍 같지 않았다'는 말은 모순처럼 들리지만, 이날을 설명하기에는 가장 적절해 보였다. 무엇인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이 사라지자 비로소 옆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다.

 손정현 안무가 (오른쪽)
손정현 안무가 (오른쪽)이종철

손정현 안무가 역시 이전의 공식적인 만남과는 다르게 다가왔다고 말했다. 네 안무가는 불과 며칠 전에 상견례를 가졌지만, 당시에는 각자 발표자료를 준비해 작업을 설명해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미리 준비한 답을 꺼낼 필요가 없었다. 손정현은 부담을 내려놓고 나서야 사람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그때는 PPT에 대한 부담을 안고 만났어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눈과 귀를 열기가 쉽지 않았어요. 들을 수 있는 귀도 생기고, 볼 수 있는 눈도 생겼어요. 같이 가는 사람, 같이 가는 동료를 얻은 듯한 느낌이 큽니다." (손정현 안무가)

작품은 각자 만들지만 그 과정의 실패와 고민은 서로가 가장 가까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춘천에서 확인한 것은 같은 작품을 만든다는 동질감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작품을 만들면서도 같은 시간을 건너갈 사람이 있다는 감각이었다.

네 안무가가 발견한 '함께 가는 시간'

 이세승 안무가 (맨 왼쪽)
이세승 안무가 (맨 왼쪽)이종철

"저는 한없이 깊어지는 이야기를 좋아해요. 이번에 같이 식사하면서 다음에는 작업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세승 안무가)

이세승 안무가는 진지한 분위기에서 작업 이야기를 깊게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만, 낯선 사람과 빠르게 친해지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에게 이번 워크숍은 관계를 단번에 완성하는 자리가 아니라 앞으로 더 깊은 대화를 시작하기 위한 시간이란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고민하는지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이후 작품에 대한 의견도 단순한 평가가 아닌 실제적인 대화로 이어질 수 있다.

 기무간 안무가 (가운데)
기무간 안무가 (가운데)이종철

"한 번 이런 시간을 보내고 나면 목소리도 알게 되고, 어떤 말투로 이야기하는지, 어떻게 행동하는 사람인지 알게 되잖아요. 그러면 훨씬 마음이 편해집니다. 계속 소통하고 마주쳐야 하잖아요. 불편한 상태보다 편안하고 여유롭게 이야기하기 위해 꼭 필요했던 시간입니다." (기무간 안무가)

기무간 안무가는 새로운 환경과 사람에게 적응하는 데 비교적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고백했다. 그가 이번 시간을 중요하게 받아들인 이유는 사업의 '긴 호흡'에 있었다. '아르코 댄스 UP:RISE'는 한 차례 공연으로 끝나는 단기 사업이 아니다. 월간 정기모임과 작품별 맞춤 프로그램, 드라마투르그 협업이 이어지고 일부 작품은 다음 단계로 발전한다.

함초롬이 말한 '자유가 주는 평안', 손정현이 발견한 '같이 가는 동료', 이세승이 기대한 '더 깊은 대화', 기무간이 느낀 '긴 호흡을 위한 적응'. 네 사람의 표현은 달랐지만 작품에 앞서 관계가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날 가장 깊은 이야기는 토론 시간이 아니라 식사 자리에서 나왔다. 누군가 한 작품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고, 대화는 곧 좋은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지로 이어졌다.

"작품에는 정답이 있을까."
"관객의 해석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움직임을 직접 구성하는 것만이 안무인가."

대화는 어느새 '안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으로 향했다. 워크숍에 모데레이터로 참여한 이단비 작가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작품의 계획과 결과를 설명하느라 이런 원론적인 이야기를 꺼내기 어렵다고 했다.

"안무가라는 같은 명칭을 가진 분들이지만, '안무'라는 단어를 모두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 한 번은 짚고 가야 할 중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최근 저도 '안무란 무엇인가'를 고민해왔는데, 실제 안무가들이 같은 질문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어요. 그분들도 그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감동적이었어요. 동료를 만난 것 같았어요." (이단비 모더레이터)

작품을 바라보는 작가와 작품을 만드는 안무가 사이에는 거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같은 질문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역할의 경계는 느슨해졌다. 이 작가는 네 안무가의 작품이 잘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잘 풀리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까지 생겼다고 말했다. 사업 관계자의 관심이라기보다 동료의 시간을 지켜보는 사람에게 생긴 애정에 가까웠다.

창작의 외로움을 함께 건너는 법

 홍승욱 극장장 직무대행 (오른쪽)
홍승욱 극장장 직무대행 (오른쪽)이종철

"예술 작업의 전체 일정 안에는 누구나 아주 외롭고 고통스러운 지점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느냐는 결국 내가 외로운가, 외롭지 않은가의 문제인 것 같아요." (홍승욱 팀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홍승욱 팀장(극장장 직무대행)은 이번 자리를 만든 이유를 예술가가 창작 과정에서 마주하는 외로움으로 설명했다. 작품을 만드는 동안에는 혼자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다른 사람이 문제를 대신 풀어줄 수는 없다. 그러나 고민을 들어주고 애정 어린 조언이나 위로 한마디를 건넬 사람이 곁에 있는가에 따라 그 시간을 통과하는 방식은 달라질 수 있다. 그는 결과물보다 과정에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가 더 오래 남기도 한다고 했다.

"이 사업이 끝났을 때 만족할 만한 작품을 만들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래도 이 시간이 이후의 안무가로서의 삶, 한 인간으로서의 삶에 도움이 됐다고 느꼈으면 합니다."

그가 말하는 관계는 단순한 친목이 아니다. "나는 무용을 하며 열심히 살아왔지만 지금 너무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가까운 가족에게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운 예술적 고민을 나눌 동료를 얻는 일이다.

'아르코 댄스 UP:RISE'는 스테이지1과 스테이지2로 이어진다. 스테이지1에서 네 안무가는 약 30분 분량의 작품을 만들고, 일부 작품은 스테이지2에서 약 1시간 분량의 완성작으로 발전한다. 사업을 기획한 김자은 PD는 이 사업을 "결과를 관리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창작의 과정을 함께하는 프로그램"이라고 설명했다. 극장은 정답을 제시하는 대신 질문을 건네고, 안무가가 필요로 할 때 공간과 사람, 제작 환경을 연결한다. 작품의 최종적인 선택과 결정은 안무가에게 남겨둔다.

오는 11월 관객들은 네 안무가가 스테이지1에서 발전시킨 작품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 사업의 성과는 공연의 완성도와 관객 수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네 안무가가 자신의 창작 언어에 대해 조금 더 확신을 얻는 것, 춘천에서 만난 사람들이 사업이 끝난 뒤에도 서로의 작업을 지켜보는 동료로 남는 것 역시 중요한 결과물이다.

워크숍을 함께한 참여자들은 건물 앞에 나란히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누군가는 손가락으로 작은 하트를 만들었고, 한 사람은 팔을 높이 들었다. 자세도 표정도 제각각이었다. 같은 사업에 참여하지만 이들이 향하는 작품의 방향은 모두 다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창작의 어려움을 혼자서만 견디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확인했다.

안무란 무엇인가. 좋은 작품을 누가 판단할 수 있는가. 예술가는 가장 외로운 순간 누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가. 춘천에서 보낸 1박 2일 동안 어느 질문에도 하나의 답은 내려지지 않았다. 대신 같은 질문을 붙잡고 함께 이야기할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경쟁의 부담을 내려놓자 옆에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작품보다 먼저 창작자를 만나고, 완성된 결과보다 그곳에 도달하는 시간을 지원하는 극장. '아르코 댄스 UP:RISE'의 첫 번째 움직임은 그렇게 시작됐다.

 아르코 댄스 업라이즈 창작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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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문화예술계에서 글을 써왔다. 월간지<문화+서울> 편집장(2013~2022)으로, 한겨레신문 필진(2016~2023)으로 취재와 예술가를 인터뷰했다. 현재는 서울 대학로 일대에서 공연&전시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을 만나 이아기를 전하며, '서울문화투데이'와 '더프리뷰' 등 매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