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간에 무너지는 최민식을 보며 되짚어보는 일상의 무게

휑한 거실에서 마주한 <맨 끝줄 소년>

아침 일찍 작은 손주, '에그'의 손을 잡고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다 보면 마음이 묘해지곤 했다. 에그보다 훨씬 개월 수가 적은 아이들도 저마다 가방을 메고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단지 안 놀이터는 텅 비어, 늘 나와 에그 단둘뿐이었다.

노란 등원 버스 앞에서 형아를 보낼 때면, 에그는 말없이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까만 눈망울이 "나도 형아랑 같이 가고 싶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직 기저귀도 떼지 못했고 말문도 트이지 않은 아이였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집에 있으니 더 데리고 있어도 좋으련만, 마음을 굳혔다. 아이는 또래와 어울려야 사회성도 배우고 성장도 빨라질 터였다. 형이 거실에서 자동차를 타면 따라 타고, 밥을 먹거나 우유를 마시면 똑같이 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의 모방 심리를 보며, 그저 집에만 두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엄마와 함께 어린이집에서 두 시간 남짓 놀다 온 것을 시작으로, 오늘은 드디어 에그가 형아 손을 잡고 첫 등원을 했다. 잘 적응하리라 믿으면서도, 문이 닫히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짠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이가 어린이집으로 가고 난 집안은 적막했다. 거실이 이토록 넓었나 싶을 만큼 휑한 공기가 감돌았다. 허둥지둥하는 마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적응 기간이라 언제 일찍 돌아올지 몰라 멀리 외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관계를 잃어버린 이들의 위태로운 게임

 넷플릭스 드라마 <맨 끝줄 소년> 포스터
넷플릭스 드라마 <맨 끝줄 소년> 포스터넷플릭스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다스리려 내 오랜 마음의 친구, 넷플릭스를 켰다. 화면을 넘기다 여러 번 지나쳤던 6부작 시리즈 <맨 끝줄 소년> (2026) 앞에 멈춰 섰다. 평소 믿고 보는 최민식 배우의 신작이었기에, 긴 호흡이 필요한 시리즈임에도 재생 버튼을 눌렀다. 문학적 욕망과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통찰하는 이 드라마는 보는 내내 마음을 아슬아슬하게 흔들어 놓았다.

최민식이 연기하는 대학교수 '엄문오'는 제자 이강(최현욱 분)의 천재적인 글쓰기 재능을 빌려 못다 이룬 자신의 꿈을 이루려 한다. 과거 자신을 무시했던 친구이자 첫사랑의 남편이며, 딸까지 등단 작가로 둔 김수훈에게 "나도 이만큼 제자를 잘 키워냈다"라며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타인을 통해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는 문오의 집착은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한때 명문대 국문학과 교수라는 명예를 누렸지만, 제자 '이강'의 지어낸 이야기에 대한 병적인 집착과 질투에 눈이 멀어 명예도, 일자리도, 아내도 모두 잃었다. "이강이 당신을 속였다면 그는 왜 그랬을까?"라고 묻는 교권위원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왜 나한테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지금까지는 그 집 식구들을 너무 피상적으로만 보고 있어. 부족한 것 하나 없는 완벽한 중산층 가족. 뻔하고 상투적이지만 아주 전형적인 모습. 그게 왜 그런지 알아? 네가 그렇게 보고 싶기 때문이야. 네가 바라는 모습이니까."

드라마 속 문오의 대사처럼, 인간은 보고 싶은 대로 세상을 보고 타인을 판단한다. 문오는 제자에게 "인간은 그 사람 자체보다 관계가 더 중요하다"라며 관계를 보라고 훈수 두지만, 정작 본인은 주변의 소중한 관계들을 모두 잃어가고 있었다. 13년간의 각방 생활 끝에 "나도 이제 내 이야기를 시작하겠다"라며 떠나는 아내의 등 뒤에 "가지 마"라고 애원하는 그의 모습은 처절하다 못해 고통스러웠다.

"문학은 게임이 아니야, 태도가 진실되어야지"

마치 늪으로 자꾸만 빠져드는 인물을 지켜보는 일은 힘들었다. 가슴이 초조하고 불안해져 "제발 현실을 직시하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드라마는 문오의 추락을 통해 우리에게 나지막이 경고한다. 그것이 욕망이든, 꿈이든, 무엇이든 지나치면 안 된다고.

세상에 공짜는 없다. 어떤 이득이 생겼다면 내가 치러야 할 값이 반드시 존재한다. 12년 전, 보육원에서 오리 가족에 자신의 이야기를 얹으며 비로소 문오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이야기'가 가진 힘과 흥미를 깨달은 이강. 그리고 문오에게 편지를 쓰겠다며 문오의 아내에게 주소를 물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전하는 아내에게 문오는 "구질구질해서 특별할 게 없다"라며 이강의 이야기를 무참히 짓밟고 여덟 살 아이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타인에게 무심히 던진 그 모진 말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대학교수직에서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짐으로써, 문오는 작가로 실패한 상처와 오랜 열등감에 사로잡혀 괴팍해진 자신의 이야기를 아주, 아주, 아주 특별하게 완성하게 된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무심코 던진 그 한마디가 평생의 무게가 되기도 하는 법이다. 한없이 구겨지고 추락하는 문오의 등 뒤로 이강은 질문을 던진다. 드라마를 보고 있는 당신에게.

"그래서 당신의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당신의 이야기는 특별합니까? 당신의 이야기가 이제 좀 특별해졌습니까?"

우리의 평범한 이야기가 특별해지는 순간

<맨 끝줄 소년>은 좋은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는 먼저 '진실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소설과 현실, 꿈과 환상의 경계에서 무너진 엄문오의 얼굴을 보며 역설적으로 지금 내 앞의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괴테의 <파우스트>가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더하고 고치기를 반복하며 완성되었듯, 우리의 삶이라는 이야기 역시 매일 조금씩 수정되고 보태어지며 쓰이고 있다.

엄마의 손을 잡고 겨우 두 시간 놀다 온 뒤, 오늘은 형아의 손을 잡고 세상이라는 거대한 어린이집으로 첫발을 내디딘 나의 작은 '에그'. 아이가 없는 거실은 여전히 휑하지만, 드라마를 끄고 나니 허둥대던 마음이 조금은 차분해진다.

남들이 보기에 그저 평범하고 대수롭지 않은 할머니와 손자의 일상일지 모른다. 그러나 아이를 염려하고, 아이의 성장을 기다리는 이 성실한 하루하루의 태도가 진실되다면, 나의 이야기 역시 충분히 특별한 것 아니겠는가.

시간을 확인한다. 혹시나 아이가 일찍 올까 싶어 거실 창밖, 노란 버스가 들어오는 길목을 자꾸만 바라보게 되는 오후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자의 브런치,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맨끝줄소년 최민식최현욱 넷플릭스시리즈 서스펜스드라마 드라마리뷰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