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장면 이후 우리 사회는] 영화, 방송, 책등 작품 속 한 장면을 통해, 오늘의 사회적 장면과 감정의 흐름을 살펴봅니다.[기자말] |
(* 이 글은 시리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린 이강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부모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그날 이후 줄곧 혼자였다고. 처음으로 누군가를 믿고 자신의 상처를 꺼낸 순간이었다. 그의 말을 묵묵히 듣던 허문오(최민식)는 돌아가는 길에 아내에게 무심히 말한다.
"구질구질한 얘기야. 다 똑같아."
그 말을 우연히 들은 이강은 처음으로 마음을 열었던 순간이 가장 먼저 부정당한다. 어렵게 꺼낸 자신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그저 흔한 사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날 이강은 자신의 상처보다, 상처를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을 먼저 배웠다.
12년 뒤, 이강(최현욱)은 허문오의 강의실 맨 끝줄에 다시 앉는다.
"다 볼 수 있는 자리거든요. 사람들 눈에는 안 띄면서 뭐든 볼 수 있는 자리."
공교롭게도 그 끝줄은, 젊은 시절 허문오 역시 사람들을 지켜보던 자리였다. 같은 자리를 선택한 두 사람은 닮았지만, 한 사람은 이야기를 탐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탐닉을 지켜본다.
<맨 끝줄 소년>은 한 문학 교수와 그의 강의실 맨 끝줄에 앉은 학생 사이에서 시작되는 심리 스릴러다. 학생이 과제로 제출하는 이야기를 따라가던 교수는 어느새 타인의 삶에 깊이 개입하고, 현실과 소설의 경계는 조금씩 무너진다.
이 작품은 '관음'에 관한 드라마로 읽힐 수도 있다. 누군가의 삶을 훔쳐보는 욕망, 그리고 그 욕망이 불러오는 죄책감과 파멸 때문이다. 그러나 드라마가 끝난 뒤 오래 남는 질문은 다른 데 있다. 허문오는 왜 끝내 멈추지 못했을까.
결핍은 왜
▲맨끝줄소년공식예고편
넷플릭스
"이야기는 재미있어야지. 뭔가 특별한 게 있어야 이야기가 되는 거라고."
허문오는 늘 그렇게 말한다. 20년째 두 번째 소설을 쓰지 못한 작가. 한때 그는 작가 김수훈(허준호)에게 추천사를 부탁했다가 "할 얘기가 없으면 그냥 쓰지 않는 게 낫다"라는 말을 듣는다. 훗날 그는 김수훈 신작 소설 공개 대담 자리에서 학생의 질문을 빌려 그 말을 그대로 되돌려준다.
그 모욕은 오래도록 그의 안에 남아 있었다. 두 번째 소설을 쓰지 못한 스무 해 동안, 그는 어쩌면 같은 질문을 반복했는지 모른다. '나는 정말 더 이상 쓸 이야기가 없는 사람인가.'
그때 이강이 나타난다. 매주 한 편씩,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들고. 허문오는 어느새 학생의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빈자리를 메워 줄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기 시작한다. 그 이야기가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느새 윤리보다 앞선다.
이강의 프로그래밍 경진대회 입상을 위해 허문오는 시험문제를 훔친 뒤, 아내 조현숙(진경)에게 "나답지 않은 짓이라서 더 짜릿했어. 난생처음 내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어 본 그런 느낌?"이라며 그날의 감정을 털어놓는다. 결핍은 종종 옳고 그름의 판단보다 먼저 움직인다.
허문오는 사람을 들여다본 것이 아니라, 타인의 이야기로 자신의 빈자리를 메웠다. 이런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도 낯설지 않다. 베스트셀러 자기계발서와 성공 인터뷰는 끊임없이 팔린다. 유튜브에는 '의대 합격 브이로그', '30억 자산가의 하루', '퇴사 후 성공한 사람' 같은 영상이 끊임없이 추천된다.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며 용기를 얻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루지 못한 자신의 욕망을 그 사람의 이야기에 기대어 채운다.
고통이 이야기가 될 때
▲맨끝줄소년공식예고편
넷플릭스
어린 이강의 상처는 허문오에게 "구질구질한 이야기"였다. 너무 흔해서, 그의 말대로 '다 똑같은'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강이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은, 공교롭게도 그가 오래 열등감을 품어 온 작가 김수훈의 가족이었다.
평범해 보이던 김수훈의 집안에서 균열이 드러나고, 의혹은 죽음으로 번진다. 그 순간부터 허문오는 더 이상 "다 똑같은 이야기"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이야기의 다음 장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김수훈의 가족은 자신들이 누군가의 이야기 재료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들에게는 하루를 버텨 내야 하는 현실이었지만, 허문오에게는 다음 장을 기다리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허문오는 이강에게 더 깊이 들어가 보라고, 더 자세히 보고 오라고 재촉한다. 누군가의 삶은 그의 손을 거치며 조금씩 이야기로 바뀐다. 마침내 그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지운 채 외친다. "이건 진실이야." 그리고 곧바로 덧붙인다. "이건 내 소설이야." 진실은 플롯이 되고, 사람은 인물이 된다.
오늘 우리의 시선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형 사고가 발생하면 뉴스는 사고 자체보다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 '첫 출근을 하루 앞둔 청년', '홀로 아이를 키우던 가장' 같은 사연을 앞세운다. 애도의 마음에서 시작된 이야기지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사고보다 그 사연을 더 오래 기억한다. 허문오 역시 김수훈 가족의 비극을 멈춰 세우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 비극이 어디까지 이어질 이야기인가였다.
특별해졌습니까
▲맨끝줄소년공식예고편넷플릭스
"당신의 이야기가 이제 좀 특별해졌습니까?"
마지막 과제를 건네며 이강은 묻는다. 12년 전 어린 이강의 상처는 "구질구질하다"라는 말로 밀려났다. 12년 뒤 같은 상실은 허문오의 소설이 되었다. 고통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특별한 이야기'라는 옷을 입었을 뿐이다.
허문오의 시선은 화면 밖에서도 낯설지 않다. 우리 역시 누군가의 삶이 '이야기'가 되는 순간에 더 오래 머무를 때가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세상을 떠나면 뉴스에는 '마지막 문자', '생전 마지막 인터뷰', '마지막 CCTV'가 연이어 올라온다. 사건의 진실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한 사람의 마지막 장면을 한 편의 이야기처럼 따라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람을 기억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오래 남는 것은 종종 그 사람보다 그 사람에게 붙은 이야기다. <맨 끝줄 소년>이 끝까지 응시하는 것도 바로 그 순간이다. 사람이 '특별한 이야기'로 바뀌는 순간. 우리는 사람을 기억하는 걸까. 아니면 '특별한 이야기'가 된 사람만 기억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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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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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질구질해" 최민식의 한 마디가 불러온 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