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들은 불황을 경험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공황을 경험할 것이다. 반면 다른 이들은 여전히 번영을 누릴 것이다. 어떤 직업들은 위태롭게 생존을 연장하는 반면, 시대흐름에 따른 전혀 새로운 직업들이 생길 것이다. 어떤 산업은 존속의 위기에 직면하는 반면, 다른 산업은 잠재력을 실현할 것이다. - 숀 두브라박, <디지털은 운명이다> 중에서
실리콘 시대다. 실리콘 트랜지스터, 디지털 연산을 위한 칩의 기초를 이루는 반도체 소자가 우리 시대를 규정짓는 대표적 물질이다. 석기와 청동기, 철기를 건너 오늘을 실리콘 시대라 부리는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역사가 각 시대를 핵심 된 기초소재로써 분류하는 건 각 문명을 특징짓는 도구와 그를 이루는 소재가 있다는 인식이 바탕이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룩되는 건 그 문명을 먹여 살리는 산업이다.
요컨대 석기에서 청동기, 다시 철기를 거쳐 실리콘 시대에 이르는 인류의 문명은 지난 시대의 체제를 혁파하며 전진해왔다. 소재가 도구가 되고 도구는 산업의 바탕을 이루어 마침내 지난 시대 갖지 못했던 부와 기술을 이루었던 것이다. 석기시대엔 돌을 의도한 바대로 잘 깨는 것이, 청동기엔 주물을 매끄럽게 만지는 일이, 철기는 더 고온으로 철을 다루어 강도 높게 제련하는 작업이 하나하나 결정적 차이를 이루었다. 한 시대엔 중요했던 일이 다음 시대엔 전혀 가치가 없어지는 광경이 인류 역사 내내 수시로 발견된다. 말하자면 역사의 순리다.
▲훌라 걸스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
변화는 숙명이다, 도무지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올 7월 재개봉한 <훌라 걸스>의 배경이 이와 같다. 한 시대의 끝에서 저물어가는 산업, 쇠락하는 마을이 있다. 1960년대 일본 후쿠시마현 이와키시 조반 탄광지역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광부들로 가득한 이 마을의 딸들을 주인공 삼아 이야기를 풀어간다. 석탄이 산처럼 쌓인 마을 외진 곳에서 두 소녀가 전단지 하나를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다. '하와이언 댄서 모집'이라 적힌 전단지는 일본 산간벽지의 외딴 마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한데, 이 부조화가 도리어 눈길을 붙드는 건 왜일까.
기미코(아오이 유우 분)와 사나에(토쿠나가 에리 분)는 이 마을 소녀들이 모두 그렇듯이 광부의 딸이다. 탄광마을에서 태어나 광부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것이 소녀들의 삶 전부처럼 여겨지던 때다. 사내라면 마땅히 광부가 되어 막장에 들어가 석탄을 캐고 돈을 벌어 가정을 지탱하는 것이 또 그렇다. 이 탄광마을에서 다른 삶의 모양은 없다. 있다 해도 기미코와 사나에 같이 평범한 아이들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있다. 막장에 들어가 죽을힘을 다해 고생한 끝에 겨우 제 가족을 건사할 만큼 벌 수 있었던 탄광의 시대가 끝에 다다르고 있는 것이다. 사측은 경영난을 이유로 상당수 임직원을 해고해야 한다고 발표하지만 거센 광부들에게 먹힐 리 만무하다. 그렇다. 광부들은 그저 탄광 속에서만 막장을 캐고 있는 게 아니다. 배움도 기술도 없이 탄광을 전전하는 노동자들에게 다른 일을 하라는 건 길거리에 나앉으란 말이나 다름없다. 식솔 딸린 가장으로선 택할 수가 없는 일이다. 말하자면 탄광의 광부는 또 다른 막장이다.
▲훌라 걸스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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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광촌 딸들이 훌라춤 추는 이유
'하와이언 댄서 모집'은 거센 반대에 맞부딪쳐 사측이 내놓은 방안이다. 광산은 더 이상 채산성이 없으니 어떻게든 다른 살 길을 마련해야 한다는 고육책이다. 이렇다 할 산업 없는 낙후된 마을이 그래도 내세울 건 도호쿠 지방에선 최남단에다 바다에 면하고 있다는 위치, 그에 따른 남다른 풍광이다. 이를 조금만 매만지면 하와이 못잖은 관광지로 변신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 바로 이것이 이 계획을 입안한 이들의 계책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야 있다지만, 입 벌리고 하늘만 보아서는 그 구멍이 벌어질 리 만무한 것. 후쿠시마와 하와이 사이의 먼 거리라도 어떻게든 좁혀보자는 게 이들의 절박한 생존방안이다.
멀리 도쿄에서 하와이안 댄스에 정통한 실력자를 데려오는 게 계획의 시작이다. 어느 누가 몰락한 탄광마을에 하와이안 댄스를 일으키러 올까 싶었지만, 마침 빚에 쪼들리는 댄서 히라야마 마도카(마츠유키 야스코 분)가 석 달 치 봉급을 미리 받는 조건으로 달구지에 실려 마을에 들어오는 것이다. 도무지 재능이라곤 없어 보이는 탄광촌 촌스런 계집애들과 첫 수업을 진행하고는 '아이고 큰일이다' 싶어졌다지만 이미 때는 늦다.
영화는 도무지 가망이라곤 없어 보이는 아이들이 탄광촌의 희망으로 거듭나는 성장기다. 기실 쇠락하는 탄광촌에서 예술로써 일어나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이미 하나의 영화적 전형으로 완성돼 있다. 스티븐 달드리의 저 유명한 <빌리 엘리어트>가 바로 그 영화다. 마거릿 대처 총리의 가혹한 산업 구조조정 속에서 탄광 절반 이상이 폐광을, 광부 70% 이상이 해고를 당한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탄광촌의 자식 빌리 엘리어트가 발레를 통해 성공하는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뮤지컬로도 크게 성공한 이 영화 이후로 쇠락한 마을에서 예술로 일어나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만들어지는데, 한국에선 최민식 주연의 2004년 작 <꽃피는 봄이 오면>이, 일본에선 바로 <훌라 걸스>가 대표주자다.
▲훌라 걸스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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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하는 마을과 일어나는 아이들
어째서 몰락하는 마을에서 예술로 흥하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까. 산업 최전선에서 도태를 앞두고 있는 기성세대와, 예술로 막 날개를 펼치는 미래 세대의 모습이 절묘한 대비를 이루기 때문이다. 문명과 산업을 떠받치는 노동, 벗어날 수 없는 기성세대의 책임감이 수시로 마주하는 실패와 시련이 구조조정에 놓인 탄광마을 안에 두드러져 보이는 까닭도 있겠다. 그 가운데 보란 듯 날개를 펼치는 새로운 세대는 희망이란 스러지는 것을 어떻게든 붙들려는 발버둥이 아니라 두려움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진실을 비추는 듯 하다.
<훌라 걸스>는 쇠락하는 마을 속에서 일어나는 '하와이안 댄스'와 그를 중심으로 한 하와이안 센터의 번영을 보여준다. 이는 그대로 위기를 마주한 마을의 극복기이고, 아이들에게는 꿈을 향해 다가서는 성장기이며, 지도하는 어른들과 배우는 아이들, 또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가는 대다수 마을 사람들에게는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이들이 교감하고 이해하는 드라마로 기능한다.
물론 모든 면이 긍정적이기만 한 건 아니다. 극복과 성장, 또 교감과 이해의 드라마를 2시간짜리 영화 한 편에 모두 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던 때문일까. 익히 자리한 전형, 장르적 클리셰를 그대로 가져다 쓴 장면이 수두룩하단 걸 집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훌라 걸스포스터그린나래미디어
아오이 유우, 더없이 매력적인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마을에 와 아이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던 마도카가 조금씩 진심을 담아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은 영화에서 수없이 보아왔던 뻔한 에피소드와 연출로 표현된다. <선생 김봉두> 류의 영화를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테다.
그 과정에서 개성 강한 학생들의 캐릭터며 이들이 겪는 어려움, 또 서로 나누는 우정과 위기 또한 하나하나 앞선 영화들이 빚은 전형을 그대로 답습한다. 기미코와 사나에의 가장 극적인 순간, 또 댄스팀이 겪는 최대 위기까지도 모두가 그렇다. 보다 보면 예상한 꼭 그대로의 상황이 거듭된단 인상을, 심지어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기시감까지 받는다.
<훌라 걸스>는 지난해 <국보>로 영화팬들을 열광하게 한 재일 한국-조선인 3세 이상일 감독의 초기작이다. 그는 이 영화로 일본 아카데미상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까지 3관왕을 거머쥐었고, 일본 최고 권위의 영화잡지 키네마 준보가 선정한 그해 최고의 일본영화란 평가까지 받았다. 지금과 달리 2000년대 중반의 일본영화계는 암담한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지만, <훌라 걸스>가 거둔 성취를 오로지 경쟁할 만한 작품의 부재에서만 찾을 수는 없는 일이다. 저물어가는 것 가운데 일어서는 것을 바라보는 일, 동시에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애정과 애착 또한 거두지 않는 게 결코 흔한 태도는 아니다.
이 영화에 영롱한 생명력을 더하는 것은 바로 아오이 유우의 존재다. 때로 한 명의 배우, 또 더없이 아름다운 인물의 존재가 작품보다 더 아름답기도 하다. 이 영화를 본 누구라도 그에 동의할 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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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