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해도 계속되는 삶 속에서 중심을 잡는 법

[리뷰] 뮤지컬 <서편제>

나를 줄에 매어두고 일을 하던 엄마가 죽었다. 얼결에 새아빠라는 남자와 '이젠 내가 네 누이'라는 여자와 유랑에 나섰다. 라디오 노래가 좋지만, 나는 북을 치며 소리를 배워야 한다. 앞날이 막막하고 이 길에서 벗어나고 싶다. 뮤지컬 <서편제>는 동호의 회한으로 시작한다. 소리꾼 유봉과 그의 딸 송화, 의붓아들 동호의 요동치는 이야기는 관객을 울린다.

한국 창작뮤지컬의 정수로 불리는 뮤지컬 <서편제>가 다음 달 19일까지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공연된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법한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를 원작으로 한다. 연극 등 다른 장르에서도 다뤄진 이야기지만 뮤지컬은 판소리라는 예술의 형식을 살릴 수 있는 장르라는 점에서 특별하게 여겨진다.

<서편제>의 무대를 보면 여백의 미를 느낄 수 있다. 넓은 무대에 무대 장치는 흰 장막뿐이다. 장막은 교차하며 배우들이 등퇴장하거나 퀵체인지를 할 수 있는 동선을 만든다. 배경에는 굽이진 산맥이 표현돼 있는데 한 폭의 수묵화 같다. 공연이 끝나고 배우들이 인사를 한 뒤에야 무대에는 빛이 색색의 꽃 모양으로 비친다. 마치 공연 내내 무대를 에너지로 가득 채운 배우들을 향한 박수를 대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뮤지컬에 관심이 없더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살다보면'을 중심으로 실제 판소리와 록, 발라드가 모두 등장한다. 그렇기에 소리꾼을 연기해야 하는 송화 역은 실제 소리꾼이 맡거나, 판소리를 연습한 뮤지컬 배우가 무대에 선다. 이번 시즌에는 대표적인 송화로 자리매김한 이자람과 차지연, 새롭게 도전한 이봄소리와 시은이 송화를 연기한다. 시은의 경우 노년 송화 역할로 캐스팅된 정은혜와 페어를 이뤄 무대를 꾸민다.

이자람과 차지연이 그동안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노련함을 뽐낸다면 이봄소리와 시은은 각자만의 송화를 해석해 전달한다. 아버지 유봉에 의해 시력을 잃고 소리를 얻는 과정에서 얻는 절망감과 체념,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과정을 연기한다. 특히 필자가 관람한 차지연의 송화는 외유내강형으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다가도 닥친 운명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용기를 보여줬다.

뮤지컬 <서편제> 차지연 지난 24일 뮤지컬 <서편제>에서 '송화'를 연기한 배우 차지연이 커튼콜에서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뮤지컬 <서편제> 차지연지난 24일 뮤지컬 <서편제>에서 '송화'를 연기한 배우 차지연이 커튼콜에서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한별
'한(恨)'을 품은 소리

살다 보면, 누구나 막막해지는 때 한 번쯤은 있기 마련이지만 송화의 사연은 언제 접해도 경악하게 된다. 타의로 시력을 잃고 소리에만 매달리는데도 세상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늘 어디론가 떠나는 삶을 살면서 소리를 찾아낸 후에도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 송화는 바람 같은 사람이다. 이런 송화의 모습은 다가온 불행을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의연한 태도를 생각하게 한다.

송화는 상실을 겪으며 성장한다. 시력에 이어 유봉의 죽음으로 유일한 가족까지 잃는 송화는 상실의 고통을 겪는다. 그 고통이 표현된 '부양가' 장면은 <서편제>의 명장면 중 하나다. 억장이 무너지는 마음으로도 끝까지 소리를 하며 유봉을 배웅하는 '부양가'를 통해 송화는 그토록 얻으려 했던 '한(恨)'을 가슴에 품는다.

계속된 상실에도 멈추지 않아서일까. 송화는 명창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그런 명예도 송화의 유랑을 멈추진 못한다. 이는 동호의 삶과 대비된다. 동호는 자신만의 소리를 찾기 위해 팝 노래를 하는 '스프링 보이즈'의 멤버가 되고 노래를 직접 쓰면서 승승장구하지만 송화의 소리를 잊지 못하고 마약에까지 손을 댄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기준은 다양하다. <서편제>는 그 기준을 스스로에게서 찾으라고 말한다. 가슴에 한(恨)을 품었지만 앞으로 나아간 송화와 잠시 길을 잃었지만 결국에는 성공한 프로듀서가 되어 다시 송화를 찾은 동호의 삶을 누가 타박할 수 있을까. 유봉 역시 소리에 대한 집착으로 송화에게 해서는 안 될 잘못을 했지만, 그의 중심이 된 송화를 지키기 위해 죽을 때까지 노력한다.

뮤지컬 <서편제> 커튼콜 지난 24일 뮤지컬 <서편제> 전출연진이 공연 종료 후 커튼콜을 진행하는 모습이다.
뮤지컬 <서편제> 커튼콜지난 24일 뮤지컬 <서편제> 전출연진이 공연 종료 후 커튼콜을 진행하는 모습이다.한별
희비를 가릴 수 없어 여운이 남는 결말

<서편제>가 사랑받을 수 있는 건 세련된 무대와 연출 속에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한(恨)의 정서'를 담았기 때문이다. 시력을 잃은 송화가 절규할 때, 죽은 유봉을 보내며 소리 내 울 때, '심청가'를 부르며 잠시 호흡을 멈췄을 때 관객들은 모두 마음으로 송화를 이해했다. 글로 미처 설명할 수 없어도 모두가 이해하는 감정이 있다.

송화와 동호가 마주보고 호흡을 맞추는 마지막 장면은 '심청가'의 심봉사 눈 뜨는 대목이다. 시각을 잃은 송화가 연기하는 심봉사는 기구한 여정 끝에 눈을 뜨지만, 송화의 처지는 바뀌지 않는다. 비극적으로 보이지만 그를 바라보는 동호의 표정은 송화의 삶이 완전한 비극이 아님을 시사한다.

대신 송화는 불행이 닥친 상황에서 원망과 슬픔을 크게 쏟아내면서도 바꿀 수 없는 것에 미련을 두고 한탄하기보다 어떻게든 한 발을 더 내딛는 삶을 이야기한다. 그렇기에 '한(恨)'을 마냥 슬픔이라고 해석할 수 없듯이, <서편제>의 결말 역시 희비를 가리기 어려울 만큼 모호하다. 판단은 관객 각자의 몫이라는 것이 이렇듯 무거운 일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서편제>는 송화와 동호의 삶을 대비해 보여주지만, 옳고 그름을 정하지 않는다. 각자의 길을 걸어 자신만의 중심을 찾는 것을 권유할 뿐이다. 살다 보면,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을 하고 후회하기도 한다. 놓쳐버린 것을 그리워할 수도 있다. 사람은 살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고 때로는 원치 않는 결과를 얻기도 한다. 그런 순간, 우리는 어떤 태도로 삶을 이어가야 할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https://blog.naver.com/burn_like_a_star에도 실립니다. 필자 블로그와 인스타그램(@a.star_see)에 취재 후기와 함께 공유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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