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한 여고생, 도망간 담임교사"... 이 영화가 던진 질문

[김성호의 씨네만세 1384] 229회 독립영화 쇼케이스 <지우러 가는 길>

청소년 임신과 낙태. 어쩌면 그는 흔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못해도 그를 다룬 영화며 소설을 십 수 편은 보았으니까 말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임신이 충분히 가능한 나이지만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청소년의 임신과 출산, 또 성행위는 좀처럼 용인되지 못했다. 그 엇갈림이 때로는 보호가 아닌 제도 밖 방치로 이어지기도 한다. 임신한 뒤 출산 혹은 임신중절을 하려는 청소년의 상황이 그토록 애매하다. 청소년의 임신과 낙태를 다룬 작품이 많은 이유가 바로 이 점 때문이 아닌가 한다.

6월 16일 서울 홍대입구역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린 229회 독립영화 쇼케이스에서 <지우러 가는 길>이 상영됐다. 유재인 감독의 105분짜리 장편 극영화로, 발 빠른 영화쟁이들이 일찌감치 소문낸 지난해 한국 독립영화계의 화제작이다. 30회 부산국제영화제와 51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각기 신인상격인 뉴커런츠상과 넥스트링크상을 받았단 사실이 이 영화의 가능성을 짐작하게 한다. 유재인을 2025년 한국 독립영화계가 주목한 신인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각별히 아끼는 이 행사를 나는 매번 지인들을 불러 모아 함께 찾곤 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퇴근 후 빠듯한 일정을 쪼개가며 모두 다섯 명의 지인이 함께 영화를 봤다. 대체로 독립영화 쇼케이스 상영작은 평이 좋은 편이지만, 이번에는 더욱 특별했다. 보는 내내 상영관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어떤 이는 극장에서 쉽게 마주할 수 있는 흔한 상업영화보다 훨씬 더 재미있다 했고, 다른 이는 이런 영화라면 마땅히 돈을 내고 보아야 하는 게 아니냐고 했다. 한국독립영화협회가 더 많은 이들에게 좋은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 가려 뽑은 작품인 만큼 무료상영이라해도 못한 영화란 뜻이 아니라 말해주었다.

지우러 가는 길 스틸컷
지우러 가는 길스틸컷독립영화쇼케이스

제자 임신시키고 도망간 담임 교사?

어떤 영화라 해야 좋을까.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화제작이 되었으나 아직 정식 배급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는 이 영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간단한 줄거리소개가 필요하겠다.

주인공은 여고생 윤지(심수빈 분)다. 기숙학교 2인실을 쓰는 윤지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로부터 영화는 출발한다. 세상에, 여고생이 임신이라니. 이럴수가 싶은 얘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글쎄 학생을 임신시킨 게 무려 담임교사란다. 교사 한종성(김의황 분)은 벌써 며칠 째 출근을 않고 있다. 그러니까 임신에 대한 모든 부담을 지고 있는 건 여고생인 윤지다.

영화는 그 시작부터 윤지가 감내해야 할 일의 무게를 알게 한다. 그리고 그녀가 제 앞에 놓인 선택지 가운데 어느 것을 집어 들지를 숨죽여 바라보도록 한다. 내밀한 관계였던 종성에게 아이를 낳겠다고 우겼던 윤지가 결국 낙태를 하겠다 마음먹은 건 어떤 이유였을까.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결정하면 저를 떠난 종성이 돌아오리란 기대가 결정적 이유였을 테다.

누구도 모른다. 영화가 시작되고 꽤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결코 가볍지 않은 윤지의 고민은 오롯이 윤지 혼자만의 것이다. 윤지는 학교 기숙사에 살고, 룸메이트인 경선(이지원 분)과도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다. 종성만이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는 관계였으나, 그는 윤지를 임신시키고는 책임지지도 못한 채 어딘가로 떠나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유부남이기까지 하다.

윤지는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존재다. 영화 내내 가족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 사회적 배려 대상자로 담임의 특별한 관리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그녀와 종성의 특별한 관계에 결정적 이유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 말하기를 친구도 없는 왕따라는 윤지가 혼자서 책임져야 하는 일의 무게가 가녀린 어깨 위에 너무도 무겁게 얹혀 있다.

지우러 가는 길 스틸컷
지우러 가는 길스틸컷독립영화쇼케이스

청소년 임신과 낙태, 외면이 답이 아님을

영화는 윤지에게 경선이란 존재가 생기는 과정을 보여준다. 학교 근처 으슥한 곳에서 동급생들을 줄세워두고 직접 제조한 전자담배 액상을 팔아 쏠쏠한 이득을 챙기는 경선의 모습이 어느 학교에나 있을 법한 수완 좋고 관계 좋은 이란 걸 짐작하게 한다. 담배부터 불법 복제한 CD, 해적판 만화책, 직접 제작한 픽시 자전거 용품에 이르기까지,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는 아이들의 암시장은 대체로 비슷하고 조금씩 다르게 마련 아닌가. 경선은 그곳에서 판매자의 드문 지위를 획득한 아이다. 부모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돈을 만질 수 있다는 것, 그 나이 또래를 벗어난 시야를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란 것 말고는 노는 물 자체가 달라 엮일 일도 없었던 두 아이다. 취향도 성격도 다른 두 사람이 한 묶음이 되는 건 그래서 더 영화적이며 운명적이다. 낙태를 위해 돈이 필요하게 된 윤지가 경선의 돈을 터는 게 그 시작이 된다. 악착같이 모은 돈을 한 번에 털린 경선과 그 돈이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윤지, 두 아이의 관계는 이처럼 적대적으로 출발해 이해와 공감, 지지와 응원에 닿게 된다. 드라마다.

<지우러 가는 길>이 인물과 관계, 사건을 보이는 방식이 남다르다. 장선이 연기한 교사의 아내 민영이 등장하는 장면마다 영화는 일순 윤지의 시선으로 전환한다. 결혼반지가 끼여 있는 민영의 손, 상주를 뜻하는 민영의 머리 위 리본 같은 것들에 머무는 윤지의 시선이 그녀가 아내의 자리를 의식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한다. 다분히 각 상황의 통상적 반응과 거리가 있는 윤지의 시선이 단순히 민영을 넘어 윤지의 복잡한 심리상태와 그녀가 종성과 그렇고 그런 관계를 맺은 이유, 심지어는 아마도 그녀가 그렸을 미래의 존재까지를 암시한다.

지우러 가는 길 스틸컷
지우러 가는 길스틸컷독립영화쇼케이스

사람과 사건을 비추는 이 감독의 자세

구구절절 말로 풀어내지 않고 그저 카메라로 비추는 방식으로써 영화는 인물의 과거 선택이며 현재의 심경까지를 무리 없이 표현해낸다. 장편데뷔작에서 발견하는 이 같은 노련함은 영화연출이 아닌 삶을 대하는 관찰자로서의 수련 때문일 테다. 그렇다. 유재인 감독은 삶과 사람, 사건을 관찰하는 작가다. 작가로써 마땅히 가져야 할 이 같은 자질이 너무나 귀해진 오늘에 이르러 그 가치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지우러 가는 길>의 미덕 중 하나는 청소년 임신과 낙태, 그러니까 생명의 소실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다루면서도 영화 자체가 보기 어려울 만큼 침잠해 들어가지 않는다는 데 있다. 도리어 많은 순간 적절히 긴장을 빼주는 유쾌한 설정과 연출이 힘을 발한다. 그 상당부분을 경선, 그러니까 이지원 배우가 책임진다. 독립영화를 제법 본 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이 탁월한 캐릭터의 활약에 전적으로 기대지 않는단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영화는 코미디의 기본, 즉 보는 이의 기대를 약간의 차이로 깨고 부수며 웃음을 준다. 화장실에서의 몸싸움이 갑자기 들어온 제3자의 출현으로 일시정지 될 때 한 걸음 떨어져 비춘 카메라에선 여고생들의 격렬한 밀애 현장과 구분되지 않는다거나 하는 식이다. 관객의 예상을 조금씩 깨뜨려가며 일으키는 웃음들이 힘주어 코미디를 표방한 작품보다도 더 순도 높은 확률로 보는 이를 빵빵 터뜨린다. 그저 웃기 위해 이 영화를 찾는 이라도 실망하진 않을 정도. 이 또한 웃음의 본질, 어떻게 하면 타인의 감정을 유쾌하게 움직여낼 수 있는가를 오래 응시한 작가의 역량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우러 가는 길>은 사회성 짙은 영화다. 낙태죄는 2019년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라 사실상 사문화됐다. 국회는 헌재가 요구한 법개정, 즉 공백을 대체할 법안을 만들지 못했고 낙태죄의 효력이 상실된 지금에 이르러 이 영역은 법적 근거 없이 다들 알아서 하는 묘한 영역이 됐다. 정치와 종교, 도덕과 의료계까지, 저마다의 입장이며 이해관계가 다른 가운데서 새로운 법안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는 상태다. 태아가 몇 주가 되면 낙태를 해서는 안 되는가, 국가의 건강보험은 어디까지 보장해야 하는가, 또 영화 속 윤지와 같이 보호자 없는 청소년은 병원의 처치를 받을 수 있는가 등이 정리되지 않고 있는 상태다.

독립영화 쇼케이스 포스터
독립영화 쇼케이스포스터한국독립영화협회

비겁한 어른, 무심한 세상, 그곳에서 아이들은

기준 없는 상태는 약자에게 더욱 가혹하다. 기준치 없이 높은 시술비를 요구하는 의료기관이며 이를 틈 타 횡행하는 불법약물 등 음지의 유혹들, 영아살해와 같이 끊이지 않는 극단적 사례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에 실재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이로부터 비롯됐다. <지우러 가는 길>에서 윤지가 걸어야 했던 지난한 걸음들이 하나 같이 한국사회에 있을 수 있고, 실제로 있었던 문제란 건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영화는 사회와 그렇게 긴밀히 관계 맺고 있다. 이 같은 상황 앞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듯 외면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감독은 비겁하다 여기는 듯하다. 영화 속 어른들이 하나 같이, 아주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무책임하게 등장하는 것을 보자면 말이다. 적어도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의 흐름을 보자면 이와 같은 현실인식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라고 나 또한 생각한다.

영화 속 윤지는 처음도, 끝에서도 결국 아이를 포기한다. 그러나 그 결정 아래 깔린 이유는 다르다. 그저 애인인 종성이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이 첫 결정의 이유였다면, 나중엔 진정으로 아이를 위할 수 없고 자신의 삶 또한 생각하는 마음에서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그 모든 결정 아래 결국 희생되는 것이 있다. 그 또한 생명, 쉬이 대체할 수도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닌가. 여성의 건강과 자기결정권, 또 태아의 생명권이며 그밖에 사회적 윤리와 도덕 등이 낙태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한다. <지우러 가는 길>이 걷는 걸음이 바로 그와 같은 가치가 대립하는 현장 가운데를 가로지른다.

영화는 피하지도, 외면하지도 않고서 진짜 이 사회에 존재하는 문제를 바라보도록 한다. 결국 선택은 내려야만 하고, 누군가는 손해를 보며, 어떤 가치는 훼손될 것이다. 그럼에도 고개를 돌리고 아무런 문제도 없는 양 구는 것보다는 낫다는 게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영화 속 민영의 태도와 윤지의 결정이 대립하는 순간을 바로 이 지점에 둔 것도 그래서일 테다. 나는 어찌할 수 없는 마음으로 윤지의 선택을 지지하고 만다. 영화에 동의하는 것이다. 그 괴로운 선택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이 사회에서 이 같은 법적공백을 방치한 어른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존중이라고 여긴다.

수많은 윤지들의 걸음이 더는 외롭지 않기를 바라며.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독립영화쇼케이스 한국독립영화협회 지우러가는길 유재인 김성호의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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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