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소수자 영화에 대해 원고를 청탁한 계간지 <독립영화>와 한독협은, 아직 그리고 앞으로도 그 존립 이유 자체가 다양한 차이의 영화들을 잡스런 오락거리에 치중된 상업영화와 대면하게 하는 데에 있다는 점에서, 소수자 영화 운운하거나 '이나저나 받아들여야 한다'는 권력적 시선을 꼭꼭 짚어 버렸으면 싶어. 예컨대, '차이'를 두고 민주적인 동등함으로 바라보아야지 어설피 주변화하고 소그룹화하지 말자는 거야. 진정으로 소수자 영화를 위하는 길은 그 개념 속에 도사리고 있는 은닉된 다수 권력을 해체하면서 소수자 영화를 사멸시키는 길야. -73p
지난 18일 한국독립영화협회 사무실서 <독립영화> 5호 다시읽기 모임이 열렸다. 함께 자리한 비평가 및 감독, 영화제 프로그래머들이 잡지를 함께 읽은 감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번호 발제는 서울동물영화제 집행위원이기도 한 신은실 평론가가 맡았다. 언제나처럼 잡지에 대한 총평과 함께 오늘날 이 잡지를 다시 읽는 일의 유효함을 발견할 수 있는 질문들을 나누었다.
<독립영화> 5호는 2000년 9월 발간된 잡지다. 당대 독립영화 비평을 비롯해, 영화계 인물 인터뷰 등 17꼭지의 글이 실렸다. 지난 몇 호에서도 그러했듯 당대 독립영화계 화제작이라 할 만한 류승완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 대한 글이 다시금 여럿 실렸고, 저예산 공포영화가 주목하는 한국사회 문제의 지점들을 짚어낸 글도 담겼다. 최근 신작 <와일드 씽>을 발표한 손재곤 감독이 스태프 밥 사줄 돈도 모자란 상황에서 어렵게 찍은 데뷔작 <너무 많이 본 사나이> 제작일지를 흥미진진하게 적어냈는데, 독립영화에서 출발해 영화계에 안착한 중견 감독이 그리 흔치 않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글이다.
▲독립영화 다시읽기모임 사진
김성호
한국영화서 본격 등장한 성소수자
실린 많은 글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건 '소수자' 담론이다. 초기 <독립영화>에서 기자 역할도 했던 이송희일 감독의 인터뷰와 직접 적은 글, 이에 더해 스스로를 '아줌마 게이'라고 말하는 퀴어 영화인 마야의 '아줌마 게이의 한탄'까지가 마주하기 쉽지 않은 문제의식을 전한다.
게이영화, 레즈영화, 퀴어영화라고 불리는 일련의 성소수자 영화가 한국서 본격 수면 위로 부상하던 시기가 이때쯤이다. 1999년 작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2000년 <번지점프를 하다>, 2001년 <공동경비구역 JSA> 등 은근하면서도 우아하게 기존의 성과 사랑을 묘사하는 문법을 넘어서 미묘한 감정을 포착해 낸 작품이 흥행하는 사례가 잇따른 게 대표적이다.
이는 갑자기 돌출한 기성 상업영화의 흐름이 아니다. 문학과 만화, PC통신을 비롯해 대중문화 일반에서 조금씩 솟구치던 욕망이 마침내 때를 만나 분출한 결과다. 한국 독립영화 가운데서도 서서히 그와 같은 작품이 등장했는데, 잡지서 따로 언급하는 <슈가 힐> <아이 디 아이> <핑크> 등이 대표적이다. 스스로 성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그 사실을 커밍아웃한 창작자들이 나타나기도 하고, 작품 가운데 그와 같은 캐릭터를 등장시키는 사례도 생겼다. 그것이 더 이상 작품을 해치지 않는단 확신, 심지어는 긍정적 효과를 발할 것이란 기대도 일어났다. 상업영화가 성소수자를 품은 건 그래서 자연스러운 귀결이지 혁신이나 도전은 아니다.
▲독립영화책 표지
김성호
무조건적 지지 보다 존중과 비평
<독립영화> 5호가 성소수자와 관련한 담론에 집중한 건 여러모로 의미 깊다. 성소수자의 존재가 영화 가운데 비치기 시작했을 뿐, 여전히 그를 다루는 시각에 대한 논의는 얼마 없었기 때문이다. 소수자 영화는 무조건 지지해야 하는 것인가, 혹은 바람직한 정서 함양에 해가 되는 것으로 가로막아야 하는가. 혹자는 구태의연하고 의미 없다 폄하할 이 같은 논의조차 당대엔 충분치가 못했다. 그리하여 막 태동한 각종 퀴어 관련 행사, 또 퀴어영화제 등에서도 적나라한 혐오와 마주하기 십상이었다.
'아줌마 게이의 한탄'은 '한국에서의 사회적 합의 중 하나인 이성애적 가족을 이루어야 어른(?)이 된다. 정말로!!!'하는 문장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한국영화 속에서 동성애자를 발견하기가 가뭄에 콩 나듯 하고, 성적지향 때문에 가장 가까운 가족까지 저버리는 사례가 공공연하던 당대의 풍토를 꼬집는 글이 적나라하다.
영화는 현실의 반영인데, 어째서 독립영화마저도 성소수자에 대해서만큼은 부진하기 짝이 없는지 묻게 된다. 당대의 상황과 성소수자 설정이 전혀 적다고 보기 힘든 오늘의 현실을 비교하면, 사회 분위기가 예술과 창작에 미치는 영향이 어떠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독립영화책 내지
한국독립영화협회
주류와 현실에 구멍을 뚫어내는
뒤에 실린 '이송희일의 소수자 영화를 위하여'는 대중문화와 예술에서 소수자 영화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특히 한국영화와 예술에서 소수자성이라 불리는 부문이 어떤 가치로 진작돼야 할지 따져보게 한다.
소수자 영화는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다수 속에 포함되기 위해, 다수가 관용을 베풀어 나누어주는 '인정'을 획득하기 위해 움직이는 소수집단의 노력이 아니라, 주류 담론과 현실에 '차이'를 긋고, 구멍을 내고, 흠집을 내어 허물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재구성의 노력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퀴어영화는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 같구나. 왜냐하면 퀴어영화 내에서도 다양한 차이들이 존재하고, 바로 그 '차이의 연쇄' 때문에 끊임없이 새로운 질문들이 만들어지기 때문이지.
무슨 말이냐면, 남성 동성애자 일변도의(혹은 권력 주도의) 퀴어영화에 페미니즘이 가세된 레즈비언 영화들이 일격을 가하고, 또 이성애자/동성애자 대당 관계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트랜스 젠더(성 전환자)와 양성애자의 노력이 뒤따르고, 뒤이어 서구 중심의 섹슈얼리티 정치를 의문시하는 제3세계의 온갖 퀴어영화들이 등장함으로 인해 퀴어영화 전체 속에 어떠한 단일한 중심점(권력)을 용인하지 않는 신선하고도 자극적인 영구 혁명이 가능하다는 거야.
-69, 70p
<독립영화> 5호를 두고서 우리는 오늘의 소수자 영화와 창작자, 또 영화계의 태도를 논했다. 그중 영화진흥위원회가 수년간 시나리오 공모 등 지원사업에서 여성서사 또는 여성 작가에게 가산점을 부여한 일을 논의했다.
여성이 소수자란 관점에서 여성창작자와 주인공에 가산점을 주었는데, 이는 과연 소수자 영화를 지원한다는 가치에 부합하는 일인가. 그렇다면 여성 외 장애인, 이주민, 성소수자 등 다른 소수자에 대하여선 어째서 가산점이 없는가. 또 남성 영화인이나 남성 캐릭터는 실질적으로 지원사업에서 감점받는 역차별이 발생하지는 않는가. 이와 같은 논의로부터 정작 이로부터 태어난 작품군이 소수자 영화가 이룰 수 있는 미덕인 새로움을 영화, 나아가 문화예술계에 얼마나 던졌는지 따져볼 수 있었다.
▲독립영화책 내지한국독립영화협회
26년 전 결기 앞에
씨네만세에서 꾸준히 다루었듯, 한국영화가 여전히 장애인 스태프 및 배우들을, 심지어 장애가 있는 캐릭터조차 영화 가운데 거의 품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한국 사회는 거의 고려하지 않고 있다. 장애인이 실제 비율보다 훨씬 더 영화 가운데서 배제되는 문제를 심각하게 따져봐야 한다.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이주민 또한 한국영화는 얼마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공공연히 캐릭터의 성별이나 정체성을 바꾸어 지원금을 노리는 일은 소수자 지원 정책이 잘못 작동하는 대표적 징후가 아닌가.
이에 대한 비판을 우리는 이제라도 떳떳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소수자에 대한 혐오나 무시가 아니다. 소수자란 사실 자체의 강조, 또 그에 대한 지원과 노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수자에 대한 진정한 존중과 그것이 일으켜 마땅한 효과를 북돋는 일이다. 이야말로 소수자 및 소수자 영화를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임을 지난 시대 영화인들은 이토록 선명하게 제시한다. 잡지를 읽으며 우리의 오늘은 과연 그에 대해 떳떳한가 되묻는다.
26년 전 잡지를 다시 읽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보다 많은 이들이 이 논의에 닿기를 바란다. <독립영화> 전 호는 국회도서관, 한국영상자료원 등에 실물이 배치돼 있고, 지역 도서관을 통해서 온라인 접속이 가능한 디비피아에도 무료 공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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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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