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브라질에 대해 말하라 하면 대다수는 남미의 열정이니, 삼바와 축구 같은 이야기를 할 테다. 그러나 이는 브라질이란 나라의 부분이다. 브라질의 어두운 면이 부추겨 부풀려진 밝은 면이다. 말하자면 모든 것엔 이면이 있고, 브라질이란 나라에도 삶을 즐기는 일상의 열정 저편에 그리 좋지 않은 다른 면이 있다는 뜻이다. 이번 다룰 영화가 바로 그를 다루는 작품이다.
<시크릿 에이전트>는 지난해 78회 칸영화제 화제작 가운데 한 편이다. 쟁쟁한 후보작들 사이에서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이란 감독 자파르 파나히의 <그저 사고였을 뿐>과 함께 일약 주인공이 됐다. 전작 <바쿠라우>로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차지한 바 있는 클레베르 멘도사 필류가 이 시대 세계적 거장 중 한 명으로 발돋움했다 보아도 좋겠다. 올 여름 개봉을 앞둔 <시크릿 에이전트>를 2026년 최대 기대작으로 꼽는 이들이 있을 정도니, 이 영화에 쏠린 기대가 어떠한지를 알만도 하다.
제목만 보면 <007>이나 <본> 시리즈 같은 첩보물이 떠오르는 영화다. 정부 요원을 뜻하는 '에이전트', 그것도 무려 '시크릿'이라니 국가정보원 비밀요원이 사선을 넘나들며 제게 주어진 과제를 해내는 그런 영화가 떠오르지 않나. <시크릿 에이전트>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역시 도입부데, 보는 이의 관심을 사로잡는 초반부를 보자면 과연 이런 영화가 아닐까 하는 기대를 감추기 어렵다.
▲시크릿 에이전트스틸컷
찬란
주유소 앞에 누워 있는 시체
때는 1977년, 브라질 동북부 페르남부쿠주 거점도시 헤시피에서 한 남자가 운전 한다. 딱정벌레로 유명한 노란색 비틀을 탄 사내 아르만두(바그네르 모우라 분)다. 괴상한 분장을 하고 차를 가로막는 사람들과 차 안에 물총을 쏴대는 어린 애들까지, 헤시피 일대가 카니발로 들 떠 있단 걸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아르만두의 표정은 어딘지 이질적이다.
한동안 차를 몰던 그가 외딴 주유소에 드디어 차를 세우는데, 저편 공터에서 웬 시체 하나가 누워 있다. 벌써 부패가 시작된 듯 시체 위로 파리떼가 들끓는다. 주유소 직원은 간밤에 기름을 털려던 도둑을 야간담당 직원이 쏘아죽였다며 죽을 만 한 놈이었다고 말한다.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카니발로 바쁘다며 언제 올지 알 수 없다고. 헤시피란 도시에서 죽음과 축제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잠시 뒤 주유가 끝나고 출발하려는 아르만두를 경찰이 붙든다. 주유소 직원의 신고는 모르겠다는 이들은 아르만두의 차량을 뒤지는 데만 관심이 있다. 트렁크를 뒤지고 소화기 유통기한까지 살폈으나 문제를 찾지 못하자 경찰은 마침내 본색을 드러낸다. 카니발을 위해 기부라도 할 생각이 있느냐고 묻는다. 헤시피 공권력의 작동 앞에서 며칠을 운전하고 남은 돈을 털어 주유를 했다는 아르만두는 마지막 남은 담배까지 경찰에게 건넨 뒤에야 갈 길을 갈 수 있ㅇㅊ게 된다. 그저 주유를 하고 남은 담배 몇 까치를 뜯겼을 뿐인데, 보는 이는 헤시피란 도시와 이 도시의 공권력에 대해 지울 수 없는 첫인상을 갖게 된다. 눕혀져 썩어가는 시체 한 구와 외지인의 차를 뒤져가는 경찰의 모습은 영락없는 스릴러며 첩보물의 한 장면 같다.
▲시크릿 에이전트스틸컷
찬란
교수가 마주한 위협
<시크릿 에이전트>는 구조에서부터 통상의 영화작법을 의도적으로 벗어난다. 도입에서 보듯이 스릴러의 장르적 기법을 영리하게 활용하면서도 정작 하고픈 말은 그와는 가장 먼 곳에서 퍼 올린다. 쫓고 쫓기며 죽고 죽이는 이야기, 나름의 임무를 띠고 낯선 도시를 찾은 주인공이 위기를 극복하는 줄거리를 갖췄으나 실상은 그와는 상관없는 곳에서 진짜 하고픈 말을 퍼 올리는 구조다. 아마도 이와 같은 낯선 형식이 평자들로 하여금 이 영화에 높은 평가를 한 이유가 아닐까 싶어진다.
아르만두가 헤시피를 찾은 건 처가에 맡겨둔 아들을 찾기 위해서다. 그의 아내는 실종된 상태인데, 아르만두는 그 실종의 배후에 어떤 음모가 있다는 확신을 하고 있다. 그에 다가설 수 있는 기록을 헤시피 기록물실에서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정체를 숨기고 남몰래 진실에 다가서려 한다.
영화는 아르만두를 돕는 이들의 모습을 흥미롭게 드러낸다. 처음 그가 찾은 곳은 어느 평범한 주택처럼 보이는데, 실상은 위험에 처한 이들을 돕는 일종의 안전가옥이다. 이곳을 총괄하는 이는 산전수전 다 겪은 할머니 도나 세바스티아나(타냐 마리아 분)다. 그녀에게 위장신분과 쓸 돈까지 건네는 도나의 존재는 영화를 본 모든 이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길 게 분명하다. 멀리 앙골라에서 온 난민 부부, 어린 딸을 데리고 있는 치과의사 등 다양한 이들이 머물고 있는 주택에선 모두가 가명을 쓴다. 아르만두 또한 마르셀루란 가명으로 지내며 사람들을 만나고 목적한 일에 다가선다.
영화는 그저 아르만두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는다. 통상의 스릴러라면 주인공과 그를 가로막는 악당들일 다양한 인물들을 하나씩 내보인다. 그 가운데 마피아 보스가 더 어울릴 헤시피 경찰서장이 있고, 그를 따르는 부하 형사들이 인상적으로 등장한다. 또 남쪽 어느 도시, 아마도 수도였던 리우 데 자네이루의 사업가와 그가 보낸 살인청부업자들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살인청부업자는 아르만두를 쫓는데, 이는 사업가가 아르만두의 아내가 실종된 배후임을 넌지시 가리킨다.
▲시크릿 에이전트스틸컷
찬란
많은 일이 난잡하게
그러나 영화는 통상의 장르물처럼 한 방향을 향해 내달리지 않는다. 이를테면 경찰서장 앞에 연구용 표본으로 박제될 상어가 나타나고, 그 상어 뱃속에서 잘려진 사람 다리가 나오는 이야기가 인상 깊게 나오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 다리가 어떤 사건의 주요한 증거인 듯 보이는데, 언론이 다리를 대서특필하는 모습과 경찰들이 도리어 그 사람 다리를 빼돌려 강에 몰래 내다버리는 광경이 의미심장하게 이어진다.
또 멀리서 보내진 살인청부업자는 군대에서 경찰서장과 막역하게 지냈던 전우인 모양인데, 이들이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푸는 장면도 여느 스릴러의 인상적인 신처럼 등장한다. 헤시피 일대를 들뜨게 한 카니발에서 사람이 여럿 죽어나간다는 이야기, 아마도 축제의 열기와 그에 수반한 범죄행위의 결과로써 발생한 죽음이 마치 일기예보처럼 수시로 전해진다.
그런데 이 모두가 영화의 본 줄기와는 따로 논다. 상어 뱃속의 다리는 무엇인가. 살인청부업자가 경찰서장과 아는 사이인 게 어떤 역할을 하는가. 그 모두가 설명되지도 이해되지도 않는다. 살인청부업자가 아르만두를 추적해 죽이려 하는 중심 줄기와 별 상관이 없는 것이다. 긴밀히 작동하는 스릴러처럼 장르적 효과를 꾸려가지만 실제로는 따로 논다. 미묘한 연출로써 의미 없는 것을 무언가 있는 것처럼 묶어둔다. 대체 무엇을 위하여?
영화는 그 끝에 이르러 생각할 지점을 던진다. 경찰서장이 부하 형사들을 제 아들이라 부를 때 그는 마피아 보스와 구분되지 않는다. 살인청부업자와 막역한 경찰서장이 부하들을 이용해 중요한 증거품을 몰래 빼돌려 강에 버리는 건 어째서일까. 상어가 사람의 다리를 삼켰다면, 그건 아마도 인간이 죽이고 토막 내 바다에 유기한 시신이 아닐까.
경찰이 이를 폐기한다면 그건 국가가 은폐하려는 어떤 사건의 증거가 아닌가. 그것도 몹시 중요한 증거 말이다. 그 다리가 내는 지독한 악취가 꼭 경찰의 부패를 말하는 듯하다. 영화의 도입에서 잘못 없는 외지인을 붙들고 돈을 뜯어내려던 제복 입은 자들, 카니발에서 수십수백 명이 죽어나가도 개의치 않는 권력, 심지어는 그를 기화로 권력에 해가 되는 이를 제거해온 비리와 부정까지가 영화 아래 은근히 깔려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시크릿 에이전트포스터찬란
평단의 찬사
<시크릿 에이전트>가 영화 내내 풀어가는 1977년 헤시피의 아르만두와 그를 죽이려는 이들의 이야기는 실제로는 과거사에 불과하다. 영화가 어느 순간 예고 없이 전환하는 바, 현 시점의 상파울루에서 어떤 여성들이 과거의 녹음자료를 정리해 디지털화 하고 있다. 그 녹취는 과거 아르만두의 목소리가 든 것으로, 권력과 학교의 비리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그를 녹취해 푸는 여자가 다시 아르만두의 아들을 찾아 헤시피로 와 그를 만나니, <시크릿 에이전트>가 진실로 풀어내려는 이야기가 아르만두가 매달린 사건이나 그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인지, 그 너머의 다른 무엇인지 비로소 확인한다.
브라질은 1964년 미국의 지원으로 카스텔루 브랑쿠 장군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정을 전복시킨다. 그는 20여 년에 걸친 독재기간 동안 반대파를 숙청하고 민주화의 열망을 억압하며 수많은 민주인사를 구금해 고문하고 살해했다.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신이 바다 위에서 떠오르고, 제복 입은 이들이 무고한 시민들과 민주공화국을 부르짖던 이들을 구속하던 나날을 우리 또한 건너왔다. 학교가 자본에 종속되고, 부패와 비리로 얼룩진 권력이 국민을 축제와 스포츠로 눈가리는 때가 우리에게도 없지 않았다.
아르만두의 아들이 제 아버지의 이야기를 얼마 기억하지 못하듯이, 무언가 중한 것이 있을 수 있단 걸 알면서도 도저히 알려하지 않듯이, 정의와 진실이 숨죽이고 부조리가 득세하는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부당한 계엄령 선포와 광장에 나온 시민들의 대치가 우리의 역사 가운데서도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민주주의란 그와 같은 싸움 위에 간신히 지탱되고 있는 것, 용기 있는 '시크릿 에이전트'들의 활약 끝에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좀 더 친절했다면 좋았겠으나 이대로도 새롭고 매력적인 영화다. 칸영화제가 이 영화에 감독상을 안긴 건, 또 세계 여러 비평가들이 높은 평가를 한 건 <시크릿 에이전트>가 다분히 장르적인 영화처럼 진지하고 중한 이야기를 전하는 참신함에 있을 테다. 익숙한 영화가 익숙한 방식으로 만들어졌음에도 관객이 새롭게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마치 아무 말이나 하는 것 같지만 반드시 전해야 할 중한 이야기가 모두 전해진다. 영화의 끝에서 홀연히 떠나는 비밀요원의 뒷모습을 본 것만 같은 게 그저 우연만은 아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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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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