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리는 안전과 평화가 나의 공적으로 얻어진 게 아니듯이, 누군가가 누리는 고난과 불운 또한 그의 잘못에 따른 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나 쉽게, 또 자주 잊는다.
한반도에 사는 민중들도 난민인 적이 있었다. 150여 년 시계를 거꾸로 돌려 구한말로 가보면, 몰락한 조선의 민중은 살 만한 터전을 찾아 북으로 압록강을 건너 만주와 연해주로 향한다. 법은 유명무실하고 악덕지주의 탄압이 지독했던 시절, 주인 없이 버려진 땅에서 농사를 지어 입에 풀칠을 하려는 이들의 살아남기 위한 걸음이었다. 조선 초 4군6진 개척으로 북방의 한계가 압록강과 두만강까지로 확장돼 고착화됐던 때다. 강을 넘는단 건 더는 조선의 땅이 아닌 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50만 명 가량으로 추산되는 조선인들은 기근과 착취를 피해 목숨을 걸고 만주와 연해주, 청나라와 러시아 땅으로 넘어갔다. 그로부터 50여 년 뒤 이 두 곳이 각기 역외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된 데는 먼저 이주한 조선 난민들의 존재가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뿐인가. 2018년 예멘 난민 사태에서 보듯이 난민에 대한 거부감이 공공연한 한국이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꾸준히 환대하는 난민집단이 존재하니, 바로 탈북민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연 수천 명씩 꾸준히 입국해 3만 명이 넘어선 탈북민 또한 다른 이름의 난민이다. 가난과 기근, 독재와 억압을 피해 남한으로 밀입국한 탈북민들에게 국가는 정착지원교육과 지원금까지 내주며 남한에의 정착을 돕고 있다. 완전히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1500만원에 이르는 초기 정착지원금과 각종 지원사업의 배려가 이들이 남한사회의 구성원으로 무리 없이 안착할 수 있도록 이끈다.
▲어느 파리 택배기사의 48시간스틸컷
디스테이션
파리의 불법체류 배민라이더
<어느 파리 택배기사의 48시간>은 이 시대 한국인의 필수교양영화라 불릴 만하다. 작품은 프랑스 파리의 배달노동자 술레이만(아부 상가레 분)의 48시간을 그린다. 말 그대로 그가 보내는 48시간의 여정을 밀착해 따르는 영화로, 마치 <나 혼자 산다> 류의 관찰예능을 보는 듯 그 일상을 가까이서 확인한다. 특별히 극적인 에피소드를 이어붙이는 대신, 48시간의 하루를 연속해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관객을 붙잡아둘 수 있다는 자신감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아마도 술레이만의 48시간은 파리에 사는 보통의 시민과는 전혀 다른 밀도를 갖고 있는 때문이겠다.
한국으로 치면 배달의민족 라이더쯤이 될까. 술레이만은 배달앱을 통해 배달할 주문을 잡고 배송한다. 이 음식점, 저 음식점을 바쁘게 오가며 음식을 챙기고 자전거로 힘껏 페달을 밟아 가져다주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수수료 몇 유로라도 더 챙기려 종일 쉴 틈 없이 한 건이라도 더 잡으려는 술레이만의 하루가 숨 가쁘다. 어떤 곳은 도착하자마자 음식이 뚝딱 나오지만 또 어느 곳은 한참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다. 도무지 음식이 준비되고 있는 건지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불친절한 가게에 화도 나지만, 기댈 곳 없는 라이더로선 손 놓고 기다릴 뿐. 어쩌다 흔들려 엉망이 된 음식을 손님이 거절하기도 하고, 나이든 손님이 배달승인 코드를 제대로 불러주지도 않는 등 하루 저녁에도 에피소드랄 것이 끊이지가 않는다.
물론 그저 배달노동자의 바쁜 하루를 그린 영화는 아니다. 술레이만은 아프리카 기니에서 프랑스까지 겨우 도착한 난민이다. 말 그대로 처지가 난민일 뿐, 국가 법체계에서 체류 지위가 인정되는 난민은 아니다. 그러니까 술레이만은 임시 체류허가가 되어 있을 뿐이지 프랑스에서 살아갈 자격을 갖지 못한 상태다. 그가 바라는 것은 그래서 정식 난민이 되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살아갈 자격을 얻기 위해서다.
▲어느 파리 택배기사의 48시간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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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심사까지 이틀, 술레이만의 48시간
술레이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난민심사다. 난민이 되기 위해서는 기니에서 더는 살아갈 수 없어 프랑스까지 왔다는 구체적인 내용이 인정돼야 한다.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탄압을 받았다는 사유가 있어야 한다. 심사에서 그를 인정받는 건 술레이만의 역량만으로는 역부족이다. 불행 중 다행일까. 먼저 이를 통과한 이들이 돈을 받고 늦게 온 이들의 심사를 돕는다. 서류작성부터 면담까지 조언을 받아 통과하려는 절박한 이들이 그들에게 기댄다. 술레이만이 돈을 버는 건 그에 필요한 비용을 부담하려는 이유다.
물론 임시 체류자격만 있는 이는 노동을 할 자격이 없다. 그래서 술레이만은 다른 이들이 그러하듯, 불법의 경계를 넘는다. 수수료를 주기로 하고 앱이 개통된 전화기를 빌려 배달일을 하기로 한 것이다. 때로 때때로 부당한 상황에 직면하고도 제대로 따지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 계정이 아닌 앱으로 배달일을 잡고 다니는 술레이만, 그런 그에게 전화기를 빌려주고 돈을 챙기는 이, 또 심사통과를 돕는다며 돈을 받는 이들, 법과 제도가 돌보지 않는 가장 낮은 이의 처지가 어떠한지를 술레이만의 일상을 얼마쯤 뒤따르는 것만으로도 곧장 이해할 수 있다.
먹고 자고 씻는 일 모두가 만만찮다. 비슷한 처지의 이들이 모여드는 임시보호소가 그에게 터전이 되어주지만 도심과는 거리가 멀어 대중교통을 통해 오가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술레이만을 둘러싼 상황이 막막하단 게 느껴지는 에피소드가 거듭된다. 모든 게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는 상황이 다른 누구보다도 기댈 곳 없는 약자에게 버겁게 다가온다. 통상의 영화보다 가깝게 들러붙은 카메라로 찍은 버거운 삶의 모습이 이들이 처한 처지를 실제적으로 내보인다. 술레이만이나 다른 난민신청자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러니까 프랑스 파리의 가장 모범적인 어느 시민이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어느 파리 택배기사의 48시간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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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난민 신청자를 주연으로
<어느 파리 택배기사의 48시간>은 대단한 이야기를 품고 있지 않다. 국가전복 음모라거나 체제를 뒤흔들 일대 사건이라거나, 그도 아니면 법과 제도가 무너진다거나 그를 이룩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통상적인 법집행, 그것도 어느 한 난민신청자의 심사까지를 그리는 이틀간의 이야기일 뿐이다. 술레이만이 아니라 다른 어느 기니 출신 난민신청자의 이틀이라 해도 별반 다르지 않을 테다. 그러니까 그는 술레이만이라서 영화주인공이 된 것도 아닌 것이다. 가장 보통의 난민신청자라서 된 것일 뿐이다. 그 평범하고 흔한 이의 이틀이 어떻게 대단한 이야기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 이틀이 보는 이를 바꿔낼 만큼 힘이 있으리라고 믿는 이들이 있다. 이 영화를 감독하고 제작한 이들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겐 이들의 사정을 단 이틀만이라도 따를 필요가 있다고, 그 정도면 생각을 달리 먹기 충분하리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실제로 과연 그러해서, 술레이만의 평범한 이틀이 다른 누구에겐 보지도 겪지도 상상해본 적도 없는 완전히 새로운 이틀이 된다. 같은 하늘을 지고 살아가는 파리의 시민들에게도 난생처음 듣는 그런 이틀이다. 알지 못하여 생각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하게 된 이틀을 재구성하여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생각을 달리 먹도록 하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자 효과가 된다. 그리고 그는 제법 적중한다.
초보배우 아부 상가레의 연기가 일품이다. 연기에 능숙하지 않아 도리어 실제 술레이만이 된 듯한 인상을 안기는 그의 처절하고 긴박한 연기가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의 자격을 증명한다. 어떤 인물은 세련되고 능숙한 연기만으로 이룰 수 없다. 아부 상가레는 실제 프랑스에서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얻지 못하고 있던 기니 난민이었다. 한국에서 흔히 통용되는 표현으로 말하자면 불법체류자로, 낮에는 정비공으로 일하며 언제 추방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살아가던 이다.
▲어느 파리 택배기사의 48시간포스터디스테이션
'한국은 다른가'를 묻다
감독 보리스 로즈킨이 이 같은 영화를 구상하며 비전문 배우를 찾던 중 아부 상가레를 발탁했고, 그는 누구보다 저 자신과 닮아 있는 인물을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해냈다. 그가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할 때까지도 국가는 거주를 위한 허가증을 발급하지 않았다. 체류를 위해 저 아닌 다른 이를 연기해야 했던 술레이만의 상황이 아부 상가레의 그것과 얼마나 닮고 또 다른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이 영화는 그저 프랑스의 이야기일 수만은 없다. 2018년 500명이 넘는 예멘 난민들이 제주도에 입국했을 당시 불거졌듯, 난민에 대한 거부감과 혐오가 표면 아래 자리하고 있는 한국이 아닌가. 그저 국민들만이 아니다. 법제도 또한 난민신청자에게 박하기 짝이 없다. 국제협약에 따라 난민법이 제정된 1994년 이래로 5만 명을 훌쩍 넘는 난민신청이 있었으나 정식 인정된 건 고작 2%를 조금 넘는 1500여 명 뿐이다. 인도적 체류허가까지 다 합쳐도 50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국가기관을 뺑뺑이 돌게 하고 불친절한 안내와 엄격한 심사 끝에 돌려세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난 20일은 세계 난민의 날이었다. 2013년, 아시아 국가 중 최초로 난민법을 제정하고 난민의 처우와 인권을 보장하겠다 공표한 한국이지만 지난해 1만4000여 건의 신청자 가운데 난민으로 인정된 사례는 고작 135건에 그쳤다. 단순히 적고 많음의 문제가 아니다. 이토록 낮은 인정률 아래 깔려 있는 무지와 무관심이 문제다. 프랑스가 선량한 노동자 술레이만을 살피지 않듯이, 한국 또한 수많은 난민들의 사정과 배경을 알지 못하고 알려 하지도 않는다. 그 무지와 무관심은 언제든 혐오와 배제로 표출될 수 있다. 공화국을 갉아먹는 혐오와 배제가 그로부터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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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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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불법체류 라이더의 48시간, 프랑스판 '나 혼자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