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김시아 분)은 여고생이다. 30리터는 족히 될 등산용 배낭을 메고 다니는 비범한 여고생이다. 여름이 특별한 건 가방 때문만은 아니다. 여름은 언제나 목에다 큼지막한 카메라를 걸고 다닌다. 그것도 전문가나 마니아들이 들 법한 수동카메라다. 카메라 안에 든 필름은 딱 네 컷이 남았다. 그 네 컷은 아주 오랫동안 아무것도 찍지 않은 상태였다. 말하자면 어떤 빛도 침습하지 않은 완전한 어둠이었다.
여름에게 카메라는 꽤 특별한 물건이다. 아버지의 유품이다. 사람들은 보통의 여고생이라면 모두 아버지가 있을 거라고 넘겨짚곤 하지만 여름의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여름은 그렇게 흔하지 않은 아버지 없는 아이다. 여름의 아버지에게 카메라는 매우 중요한 물건이었는데, 그래서 아끼는 딸에게도 사진을 가르쳤다. 자기가 처음 시작한 즉석카메라로 입문하게 했고, 중학생 때는 자기가 썼던 자동카메라를 줬다. 고등학생이 되면 수동카메라를 주기로 약속했다. 그 약속이 유품으로 지켜질 줄 둘 다 알지 못했다.
아버지의 카메라엔 네 컷을 덜 찍은 필름이 들어있었고, 여름은 그 컷을 찍을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무엇도 찍지 않으면서 카메라만 목에 메고 다녔던 이유다. <여름의 카메라>는 바로 그 네 컷을 찍는 여름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싱그러운 초여름, 학교 교정에 넘어온 공과 그를 주워 다시 운동장으로 돌아가는 아이의 뒷모습, 계절만큼 싱그러운 그 장면이다. 드르륵 하고 와인딩크랭크를 감는 소리, 이어 찰칵 하는 셔터 소리가 사운드를 채운다. 여름이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순간, 화면이 빙 돌아 360도로 반전한다. 시계처럼 한 바퀴 회전한다. 여름의 세계가 완전히 뒤집힌다. 여고생 여름이 사랑에 빠진다.
▲여름의 카메라스틸컷
싸이더스
아버지 유품으로 수동 필름 카메라를 받은 소녀
<여름의 카메라>는 인상적인 도입을 가졌다. 누구에게나 가볍지 않을 죽음, 그것도 아버지의 죽음과 유품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래 찍지 못한 네 컷의 사진을 찍는 순간을 도입으로 예비한다. 그리고는 여고생 여름의 세계가 완전히 뒤집히는 발랄하고 재치 있는 장면까지 이어지니 보는 이가 눈길을 빼앗길 밖에. 지난해 26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에서 최고상은 아니라도 가능성을 인정받은 창작자에게 주어지는 농심신라면상을 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짐작한다.
이 영화를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누군가는 퀴어영화라 말할 수도 있겠다. 한국 문학과 독립영화에서 근 십 여 년 간 주요한 소재로 활용돼 온 소수자, 그중에서도 동성애를 중심에 품고 있는 때문이다. 그냥 퀴어도 아니다. 무려 2대에 걸친 퀴어다. 앞의 여름이 찍은 네 컷, 그 중요한 촬영에서 뷰파인더 안에 든 활짝 웃는 아이는 여학생이다. 축구장에서 공을 차는 그 아이는 축구부 에이스 연우(유가은 분)로, 여름만이 아니라 동급생들을 어미새 쫓는 병아리처럼 몰고 다니는 아이돌이다. 연우가 화사한 미소와 함께 저를 찍은 사진을 달라고 요청한 때문에 여름은 제 아버지의 유품인 필름을 마침내 현상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사진 가운데서 의문의 이름이 있다. 남학교 고등학교 교복에 달린 명찰엔 '두마루'란 특이한 이름을 본 여름은 그걸 단서로 아버지의 옛 인연을 찾는다. 일찍 제 자리를 비운 아버지가 그리도 애틋했을까. 작은 단서도 흘려보내지 않으려는 여름의 노력이 마침내 성과를 낳는다. 두마루(곽민규 분)는 제 이름을 단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 앞에 다짜고짜 나타난 여름과의 만남이 예상치 못한 진실을 드러낸다.
▲여름의 카메라스틸컷
싸이더스
아버지가 남긴 필름 속, 오래 묵은 사진
마루는 여름의 아버지와 연인이었다고. 수동카메라 속 필름이 담고 있는 사진은 무려 마루가 교복을 입고 있는 모습을 찍었는데, 말하자면 20년은 족히 된 옛날 얘기인 것이다. 그 긴 시간을 건너 여름의 아버지는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여름을 낳았는데, 마루를 보자면 아직 옛 연인을 완전히 잊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길고 긴 시간을 건너, 심지어는 이승과 저승을 건너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일까. 물론 아니다. <여름의 카메라>에서 중요한 건 그런 게 전혀 아니다.
겉으로는 여고생의 풋풋한 첫사랑, 동성 여자애를 좋아하는 여자아이 여름의 남다른 사랑이야기처럼 보인다. 온통 예쁘게만 찍는 영상부터가 꼭 청춘영화의 외연을 갖고 있는데, 이 둘의 사랑이 생각만큼 순조롭게 흘러가지 않고 어느 순간 뚝 끊기고 마는 것이 통상의 청춘영화와 다르다면 다르겠다. 연우와의 사귐은 처음 여름이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녀는 너무 인기가 많고, 연인보다도 축구를 훨씬 좋아한다. 여름에 대한 감정도 호기심이 앞섰던 듯, 둘의 관계는 좀처럼 진전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보다도 <여름의 카메라>가 둘의 관계에 깊이 다가서려 하지 않았던 때문일 수도 있겠다. 영화는 퀴어영화의 외연을 갖고 있지만, 실은 여름이 아버지의 죽음을 극복하고 그를 충실히 이해해가는 이야기에 가깝다. 네 컷의 찍지 않은 필름을 그대로 갖고 다니는 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방식이던 여름이 마침내 필름 안에 든 진실을 직접 찾아 나서는 과정, 그로부터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일면을 대하는 것이 영화의 주요한 줄기다.
▲여름의 카메라스틸컷
싸이더스
2대에 걸친 성소수자 설정, 이것도 다양성일까?
반면 퀴어는 이를 위한 재료일 뿐, 유전적으로 이어지진 않는 동성애란 특성을 억지로 부녀에게 연달아 입혀 아버지와 딸의 시공간을 초월한 공통분모를 마련할 뿐이다. 퀴어영화란 퀴어적 소재를 뒤집으면 남는 것이 있는가로 평가돼야 한다. 퀴어영화가 아닌 작품들이 그렇듯이. 퀴어란 설정이며 소재, 그 자체로써 의미를 지어주는 시대는 이미 지나버린 지 오래다. 그것이 퀴어영화가 바라왔던 진정한 존재의 인정이자 다양성의 존중이고 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여름의 카메라>를 좋은 영화라 보기란 쉽지 않다. 사랑에 대한 진솔한 감각과 묘사 대신, 퀴어란 눈길을 끄는 소재가 해내는 역할에만 관심을 보이고 있는 때문이겠다.
다만 영화가 선택한 카메라, 그리고 필름은 아버지를 이해하는 딸의 여정을 내보이기 좋은 소재다. 카메라란 촬영한 바로 그 순간, 그러니까 필름 위에 빛이 노출돼 새겨진 그 순간에 운명이 정해진다. 과거의 어느 순간이 필름 위에 새겨져 변치 않는 무엇이 된다. 특히나 수동필름카메라란 0과 1의 정보로 치환될 수 있는 디지털 소재가 아닌 아날로그적 원본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내밀한 존재, 또 그와 맞닿는 기억과 닮아 있다. 과거의 어느 순간이며 존재를 붙들고 싶은 우리의 욕망이 그대로 필름 위에 담겨 감각적으로 구현되는 순간이 이색적이다.
<여름의 카메라>가 그나마 매력을 발하는 지점이 바로 이점이다. 여름은 아버지의 카메라를 이어받아 그 안에 든 필름을 현상하고, 지난 시대 아버지가 가졌던 시각과 감각, 그 정체성까지를 얼마간 확인한다. 카메라와 사진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건넌 두 사람의 교감이 이뤄진다. 활동사진인 영화란 매체로써 감독과 관객, 그리고 우리가 이렇고 소통하듯이 말이다.
▲여름의 카메라포스터싸이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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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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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유품으로 남긴 카메라에 담긴 낯선 사람의 정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