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숨기지 않는 여성들, 서로에게 위안이 된 그림

[리뷰] 뮤지컬 <더 펜>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술가의 삶은 무대의 중요한 영감이 되어 왔다. 지난 19일에 관람한 <더 펜>은 그런 대학로 뮤지컬의 문법을 옮긴 초연 작품이다. 여성 배우 2인이 등장해 작가 '엠마'와 화가 '제인'을 연기하며 서로가 상대방의 뮤즈가 되는 과정을 그린다.

엠마는 '윌리엄 스미스'라는 필명 뒤에 숨은 작가다. 엠마는 어느 날 함께 작업하자는 제안을 거절한 화가에게서 그림을 받는다. 다른 화가와는 다르게 인물을 여성으로 구상한 그림에 엠마는 특별한 감정을 느끼고 용기를 내 화가, 제인에게 정체를 밝힌 뒤 협업을 재차 제안한다. 계속된 제안을 수락한 제인은 엠마의 작업실에서 안락함을 느낀다.

가까워진 두 사람은 서로의 불행을 나누고 서로를 위로한다. 제인의 그림은 엠마를 치유하고 가난했던 제인은 엠마의 작업실에서 처음으로 '그리고 싶은' 그림을 생각하게 된다. 홀로일 때 위태로웠던 사람들이 서로를 마주하고 별이 비처럼 내리는 밤을 공유하는 모습은 홀로가 아닌 함께의 미학을 보여준다.

<더 펜>은 배우 제이민이 책임 프로듀서를 맡았다. 엠마 역에는 문진아, 랑연, 임예진이, 제인 역에는 장보람, 최수현, 정단비가 참여했다. 여성들이 모인 이 공연에서 그리는 여성은 기존의 공연 속 여성들과는 다르다. 헌신적이고 인내하는 모습이 아니라 본인의 감정에 충실하게 화도 내고 그만큼 뜨겁게 사랑한다.

뮤지컬 <더 펜> 무대인사 지난 19일 티켓링크 단관행사 '슴고데이' 이벤트로 배우들이 포토타임 포즈를 취하고 있다.
뮤지컬 <더 펜> 무대인사지난 19일 티켓링크 단관행사 '슴고데이' 이벤트로 배우들이 포토타임 포즈를 취하고 있다.한별

서로의 불행을 위로하면서

엠마는 부유한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자유를 갈망하며 펜을 쥔다. 그렇게 써낸 글조차 남편의 이름으로 발표해야 할 때 엄청난 절망을 느낀 후 남편과의 별거를 선택한다. 언뜻 자유를 얻은 것처럼 보이지만 좀처럼 새로운 작품을 써내지 못한다. 엠마에게 힘을 준 건 제인의 그림이다. 엠마는 '별 비'를 집필하게 된다.

제인 역시 엠마의 작업실에 와 처음으로 자신이 원하는 그림에 대해 생각한다. 엠마가 준 기회에 아픈 동생의 병원비 걱정을 미뤄놓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 부모님이 떠났던 아픔을 잊고 사랑하는 사람, 엠마를 위한 그림을 그린다.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사람은 서로의 시선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며 감정을 맞춘다. 마치 초상화를 그리는 동안에는 오롯이 대상에 집중하게 된다는 제인의 말처럼, 서로 바라보며 춤을 추는 것처럼 작업한다. 제인은 엠마가 잠든 순간 펼쳐진 환상적인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선물하고 엠마의 소설 속 왈츠가 무엇인지 몰랐던 제인에게 엠마는 왈츠를 함께 추며 알려준다.

두 사람의 공동 작업은 '별 비'라는 소설 출간으로 완성되는 듯 보이지만,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다. 세상의 찬사가 제인의 그림에 집중되자 엠마는 그토록 사랑했던 제인의 천부적인 재능을 질투하며 제인을 밀어낸다. 동시에 스스로의 죽음을 떠올리며 상실을 꿈꿔온 엠마를 제인이 멈추지 못하고 결국 두 사람은 각자의 쓸쓸함을 맞이하게 된다.

두 사람은 기존 공연에서 찾아보기 힘들던 여성들을 그리면서도 서로를 향한 풋풋한 사랑과 애절한 위로를 함께 전한다. 욕망을 숨기지 않고 서로를 통해 위안을 얻는 여성들이 등장한다는 점이 <더 펜>의 가장 큰 매력이다. 엠마가 제인의 그림을 보고 자신을 투영해서 만든 작품으로 상실을 예고하는 것과, 엠마의 죽음 이후 제인이 엠마를 그리워할 것이라는 결말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뮤지컬 <더 펜> 커튼콜 뮤지컬 <더 펜> 커튼콜에서 인사를 마친 배우들이 왈츠를 추고 있다. 왼쪽이 엠마 역의 임예진, 오른쪽이 제인 역의 박수현이다.
뮤지컬 <더 펜> 커튼콜뮤지컬 <더 펜> 커튼콜에서 인사를 마친 배우들이 왈츠를 추고 있다. 왼쪽이 엠마 역의 임예진, 오른쪽이 제인 역의 박수현이다.한별

빠른 호흡 속에 남는 아쉬움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읽듯, 인물의 감정선은 섬세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독자가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소설과는 다르게 무대의 시간에 배우와 관객이 호흡을 맞춰야 하는 공연 특성상 <더 펜>의 감정선은 다소 빠르게 전개된다.

또 제목이 <더 펜>이지만 이 공연에서 펜이 강조되진 않는 점이 아쉽다. 엠마의 직업이 펜을 사용하는 작가이긴 하지만 그 쓰임새가 중요하게 등장하진 않는다. 극의 후반부, '별 비'의 출판 이후 제인이 펜을 선물하려 하고, 그 펜으로 엠마가 마지막 글을 작성하지만 장면의 임팩트가 제목이 되기엔 부족하다.

공연 시작과 끝의 제인은 같은 옷을 입고 등장해 수미상관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서로를 향한 비난과 갈등도 물론 있었지만, 엠마는 자신의 글의 권리를 포함한 모든 것을 제인에게 남김으로써 자신의 연인을 향한 마지막 고백을 대신했다.

파리를 배경으로 두 사람의 예술과 삶을 그린 <더 펜>은 오는 28일까지 대학로 SH아트홀에서 공연된다. 마지막 공연 다음날인 29일에는 콘서트가 열린다. <더 펜> 콘서트에서는 미공개곡 공개와 더불어 스페셜 크로스 스테이지도 예정하고 있다. <더 펜>이 남긴 이야기와 음악이 한층 더 돋보일 수 있도록 할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https://blog.naver.com/burn_like_a_star에도 실립니다. 필자 블로그와 인스타그램(@a.star_see)에 취재 후기와 함께 공유됩니다.
더펜 SH아트홀 엠마 제인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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