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에 빠지고 성매매 판치고... 낙원은 왜 몰락했나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퍼시픽션>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태평양의 아름다운 섬 타히티. 프랑스 정부에서 파견한 고등 판무관 '드 롤레'는 지역 주민들과 관계를 다지며 부지런히 활동하는 중이다. 주둔하는 프랑스 해군, 현지 정치인, 지역 주민들과 골고루 교류하며 갈등을 해결하고 중재하느라 낮이고 밤이고 바쁘다. 언젠가부터 프랑스가 이곳에서 핵실험을 재개한다는 소문이 퍼지며 섬 전체에 불안이 감돌기 시작한다. 드 롤레는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지역을 안정시키려 노력하지만, 해결은 쉽지 않다.

21세기 식민지의 풍경

 <퍼시픽션> 스틸
<퍼시픽션> 스틸필름다빈

21세기에도 과거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인 식민지는 세계 각지에 산재해 있다. 프랑스 역시 과거처럼 거대한 식민제국을 경영하진 않아도 지도를 찾아보면 점점이 흩어진 해외 영토를 확인할 수 있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도 그중 한 곳이다. 일찍이 폴 고갱이 지상낙원이라 예찬한 태평양의 아름다운 섬들로 이뤄진 열도는 19세기에 프랑스가 강점한 이후 여전히 식민지 상태다.

주인공이 고위 공무원으로 봉직하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역시 겉으론 온건하게 통치되며 현지민의 의견을 존중하는 듯하지만, <퍼시픽션>을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곧 이 아름다운 섬의 어두운 이면을 포착할 수 있다. 드 롤레가 드나드는 나이트클럽엔 선정적인 복장을 한 원주민 직원들이 시중을 들고, 부유한 관광객을 열광시키기 위한 오리엔탈리즘 공연 준비가 한창이다. 유흥산업 위주로 돌아가는 전형적인 관광지 경제는 종속적일 수밖에 없다.

더 심각한 건 프랑스가 해외 식민지에서 핵실험을 거듭해 왔다는 점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점령당하며 체면을 구긴 프랑스는 전후 강대국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독자적 핵무장에 사활을 건다. 국가적 예산을 쏟아부은 건 물론, 국제협약으로 금지된 핵실험도 무단으로 일삼았다. 막대한 방사선 누출 피해를 떠안은 건 당시 식민지였던 알제리 사막, 그리고 폴리네시아의 산호초 섬 인근 해역이다. 수십 년째 계속된 후유증은 온전히 현지민에게 전가된다.

프랑스는 자체 핵개발을 완수한 이후에도 국제협약에 의도적으로 가입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며 국제적 위상을 과시하고픈 때마다 핵실험 재개를 카드로 만지작거렸다. 영화 속에서 주민 대표들은 핵실험 소식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반세기 전 핵실험은 주민들에겐 대를 이어 유전병과 암 발병으로 고통을 주는 탓이다. 다시 핵실험을 벌인다면 현지의 반발을 불을 보듯 뻔하다. 평온하던 섬은 화약고로 변해간다. 갈대밭에 불이 번지듯 소문은 일파만파 커진다.

본토와 식민지 사이에 낀 중간관리자

 <퍼시픽션> 스틸
<퍼시픽션> 스틸필름다빈

주인공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고위 관료다. 하지만 드 롤레의 일상은 우리가 아는 공무원과는 무척 다르다. 그의 직책은 '판무관 辦務官'이다. 즉 '보호국이나 식민지 등에 정치, 외교 등의 업무를 처리하도록 파견한 관리'인 것. 일반 행정은 현지 주민이 선출한 시장이 책임진다. 외교관과 공무원의 중간에 속한 그의 역할은 중재와 조율에 힘 쏟는 해결사에 가깝다. 물론 그의 목표는 현지의 안정을 찾는 공무다.

드 롤레는 능수능란하게 지역 현안을 꿰뚫고 현재 체제를 유지하는 임무를 떠맡았다. 프랑스 정부의 대리인으로 본국과 원활히 소통하고, 주민들의 분리주의를 사전에 무마하는 게 그의 주요 역할이다. 그는 지역의 유력자와 밀고 당기기를 거듭하며 현상 유지에 전력을 다한다. 주민들과 긴밀하게 협력하며 본국 정부에서 현지 사정 모르고 들이대는 조치를 적절히 완급조절하는 건 고도의 정치력을 요구한다. 건들대는 것 같아도 그 방면으론 도가 튼 주인공이다.

적당히 현지화한 그는 과거 식민지 전문관료의 이상적인 후예로 보인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명확히 인지하고 자율적으로 목표를 수행하되, 현재 체제를 유지하는 데 집중한다. 지역 유력자와 친밀하게 지내며 주요 결정에 은밀히 개입한다. 이해 당사자 간 조율을 위해 인내심을 갖고 협상하되, 필요할 땐 협박도 불사하는 드 롤레의 표정은 자신감이 넘친다. 하지만 고위직에 속하는 그로서도 전모를 파악할 수 없는 거대한 폭풍 같은 변화가 밀려든다.

초반에는 비록 평소와는 다른 모호한 상황 전개에 애를 먹긴 해도 주인공은 능히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다만 좀 시간과 수고가 들어갈 뿐이다. 하지만 판무관의 오랜 경험으로도 이번에 닥친 사변은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지금껏 그가 처리했던 문제와는 급이 다르다는 판단을 내리자 이제 여유 가득하던 표정은 당혹감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프랑스와는 대서양과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로막힌 머나먼 땅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도무지 예측할 수 없게 된 것.

식민통치의 망령

 <퍼시픽션> 스틸
<퍼시픽션> 스틸필름다빈

치밀한 현대판 식민지 풍자로 채워질 것 같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 있으면 불친절하다고 여길 만큼 <퍼시픽션>의 전개는 모호함으로 가득하다. 제목부터 'Pacific'+'Fiction'의 합성어로 구성한 것처럼, 칼 같은 현실 고증보다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계승되는 식민주의 역사에 대한 '우화'다. 1995년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의 핵실험 재개 선언을 인용하며 20년 전 사건이라 등장인물들이 언급하니 대충 2010년대 중반으로 추정되긴 하다.

하지만 현재와 별반 차이 없는 시대 설정이지만 기묘한 이질감이 섬 전체를 짙은 안개처럼 휘감는다. 아무리 태평양 섬나라라 해도 위성통신으로 세계가 연결된 시점, 게다가 고위 관료인 드 롤레가 본국에 시급한 상황을 문의할 수 없는 조건이라 상상하긴 어렵다. 그러나 판무관쯤 되는 이에게까지 감추며 진행할 정도의 비밀 프로젝트라니 상식적으론 맞지 않는 일이 벌어지는 걸 기본 설정으로 삼은 영화는 의도적으로 시간대를 뒤섞은 것처럼 보인다.

드 롤레가 처한 상황은 대항해시대 무차별적으로 가는 곳마다 깃발을 꽂고 정복자를 쏟아내던 풍경과 다를 게 없다. 기술의 한계로 식민지 통치자들은 본국과 소통하려면 연 단위로 훈령과 물자를 기다려야 하는 고립에 직면했다. 21세기 정보화 시대에도 어째 주인공은 그냥 본국 정부에 전화 한 통 걸면 될 일을 머리 부여잡고 끙끙 고심한다. 이건 허술한 설정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를 초월한 식민지 당국의 딜레마 표현에 가깝다.

압도적 다수인 토착 원주민, 급한 일은 당장 도움받기 힘든 물리적 거리, 본국의 무리한 요구와 현지의 봉기 위험을 저울로 재듯 조율해야 하는 식민지 관료의 융통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덕목인 상황에서 주인공은 더할 나위 없는 적임자로 묘사된다. 나름대로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는 방패와 같은 판무관은 직업적 자부심을 충분히 가질 만하다. 하지만 식민 지배의 본질 탓에 아무리 그가 예술적 업무능력을 발휘한다 해도 근본적인 한계는 어쩔 수 없다.

21세기 식민지의 모호한 풍경

 <퍼시픽션> 스틸
<퍼시픽션> 스틸필름다빈

감독은 마치 현대미술 미디어아트 작업을 소개하듯 이색적인 방법론으로 관객에게 거대한 추상 풍경화를 펼친다. 시대 배경도 불투명하고 한참을 봐도 대체 섬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짐작하기도 어렵다. 주인공 역시 속 시원하게 속내를 주변에 해명하지 않는다. 다만 시대를 초월한 제국주의 본질, 식민지의 초상이 은유될 뿐.

기다리다 지친 관객은 그래도 결정적 국면에서 섬과 주인공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밝혀주리라 기대할 테지만, 감독은 부조리한 상황의 연속을 통해 지금은 역사책 기록된 내용일 뿐이라 단정해 버린 관객의 고정관념을 의심하게 만드는 데에 철저하게 초점을 맞춘다. 먹구름처럼 태평양의 아름다운 섬나라를 향해 다가오는 위협에 무력한 식민지 관료의 초상은 당사자의 능력이나 의지와는 무관하다. 개인 재량으로 어찌할 수 없는 체제 자체의 한계와 파산으로 통한다.

고갱이 서구 문명사회에 환멸을 느껴 정착하려던 태평양의 유토피아는 프랑스 지배로 잃어버린 낙원이 된 지 오래다. 원주민들은 불어를 유창하게 사용한다. 토착어 사용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겉보기에 섬은 번창하지만, 관광업에만 매몰된 구조임이 곧 드러난다. 지역 사회에 뿌리내린 가톨릭교회는 카지노에 현지민 출입을 막지만, 도박으로 불만 배설을 기대하는 주인공은 동등한 참여를 보장하듯 카지노 정책을 펼친다. 군인들을 대상으로 성매매가 판친다.

여기에 과거 제국주의 열강이 '그레이트 게임'을 펼치며 지정학적 우위를 위해 전쟁과 모략을 일삼던 기억이 은밀하게 복원된다. 섬의 운명은 섬 주민도, 유능한 현지 관료도 어찌할 수 없는 강대국 간 이전투구에 달렸다. 마치 잔인한 신들이 인간의 운명을 내기로 걸던 것처럼, 타히티에 닥친 묵시록적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운 태평양 환초의 풍광과 겹치며 기이한 감각으로 변환된다.

[작품정보]

퍼시픽션
Pacifiction
2022|프랑스, 스페인|드라마, 스릴러
2026.07.01. 개봉|165분|15세 관람가
감독 알베르 세라
출연 브느와 마지멜
수입/배급 필름다빈

2022 75회 칸영화제 경쟁
2022 카이에 뒤 시네마 올해의 영화 1위
2023 48회 세자르영화제 남우주연상, 촬영상

 <퍼시픽션> 포스터
<퍼시픽션> 포스터필름다빈




퍼시픽션 알베르세라감독 브느와 마지멜 파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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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