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장면
아르코 제공
길고양이 '옥이'는 작품의 중심 은유다. 길고양이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눈 색깔을 보고 이름을 붙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리거든."
처음에는 고양이를 향한 말이지만 결국 사람을 향한다. 재선은 모두가 잊어버린 이름이다. 어머니를 기억해 달라고 외쳤고, 추모제 준비를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그의 부재조차 감지되지 않았다. 지하 세계로 내려간 재선은 기억을 지우는 열매를 먹으며 자신의 이름마저 잊는다.
그는 지상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한다. 다시 기대하고, 다시 좌절하고, 다시 잊히는 일을 겪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작품은 재선을 억지로 설득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들이 그를 잊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한다. 그리고 잠시 잊었지만 다시 기억해낸 사람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 한 번만 더 믿어보자."
이 솔직함이 재선을 지상으로 데려올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 된다.
마지막의 '나무 뽑기'는 그래서 단순한 구원의 장면이 아니다. 누군가 한 사람이 영웅처럼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모두가 함께 힘을 쓰고, 지치면 쉬었다가 다시 손을 댄다.
"누구 한 사람이 지치면 다른 사람이 우리가 처음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상기시켜주자."
공연 초반 하천 다리 위에서 나눈 약속은 이때 비로소 행동이 된다. "우리는 함께 나무를 뽑는다"는 문장은 작품의 주제를 가장 직접적인 무대 언어로 바꾼다. 기억의 무게를 한 사람에게 맡기지 않을 때 비로소 막혔던 통로가 열린다.
〈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는 기억의 가치를 말하지만 기억을 개인의 의무로 떠넘기지 않는다. 기억하는 사람도 지칠 수 있고, 잊고 싶은 사람도 존중받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에게 끝까지 기억하라고 요구하는 일이 아니라 그 무게를 함께 나누어 드는 일이다.
공연 후반 아이들은 죽은 옥이를 위해 작은 추모 자리를 만든다. 많은 사람은 오지 않는다. 그러나 몇 명이 모여 이름을 부른다. 그 장면은 이 작품이 생각하는 추모의 형태를 정확히 보여준다. 거대한 기념비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한 존재가 분명히 이곳에 있었다고 말하는 일이다. 왝왝이는 그곳에 있었다. 옥이도 그곳에 있었다. 김재선도 그곳에 있었다.
이 작품의 성취는 그 사실을 관객에게 가르치는 데 있지 않다. 이름을 부르는 사람 역시 지칠 수 있음을 보여주고, 그때 누가 옆에서 그 이름을 이어 부를 것인지 묻는 데 있다.
〈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는 참사를 소재로 삼은 청소년극을 넘어, 기억의 윤리와 연대의 방법을 무대 언어로 고민한 작품이다. 극장을 나선 뒤 남는 것은 "잊지 말자"는 익숙한 구호가 아니다. 누군가 기억하기 위해 애쓰고 있을 때, 우리는 그 곁에서 무엇을 함께할 것인가라는 더 불편하고 오래가는 질문이다.
▲연극 공연 장면아르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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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문화예술계에서 글을 써왔다. 월간지<문화+서울> 편집장(2013~2022)으로, 한겨레신문 필진(2016~2023)으로 취재와 예술가를 인터뷰했다. 현재는 서울 대학로 일대에서 공연&전시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을 만나 이아기를 전하며, '서울문화투데이'와 '더프리뷰' 등 매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