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억으로 만들어 40배 수익 신화 쓴 일본 영화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사무라이 타임슬리퍼>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에도 시대 말, 하급 사무라이인 주인공은 목숨을 건 결투를 벌이던 중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을 맞고 기절한다. 한참 후 눈을 떠보니 싸우던 상대도, 동료도 보이지 않는다. 마을에 들어서자 익숙한 분위기에 마음이 놓이지만,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은 묘하게 그를 피하고 미심쩍은 상황이 이어진다. 알고 보니 이곳은 영화란 걸 촬영하는 세트장이란다. 혼란한 가운데 말도 없이 굴러다니는 쇠로 된 마차와 사람들이 사용하는 낯선 물건들은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혼란한 가운데 딱히 갈 데도 없어 방황하던 중 그는 세상이 한참 까마득하게 변한 걸 깨닫는다. 대체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러던 중 눈앞에 사무라이가 등장해 무뢰배와 결투를 벌인다. 반색하던 남자는 그들이 가짜 사무라이라는 것, 결투 또한 연기란 걸 알게 된다. 처음엔 질색했지만, 검을 휘두르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게 없던 사무라이는 자신의 유일한 재주를 살릴 수 있는 시대극 엑스트라 배우로 미래에서의 삶을 출발한다.

전직 사무라이, 시대극 전문 엑스트라로 변신

 <사무라이 타임슬리퍼> 스틸
<사무라이 타임슬리퍼> 스틸(주)트리플픽쳐스

주인공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다. 그가 살던 시대는 바야흐로 무사들의 시대가 저물고 메이지 유신으로 치닫는 막부 말의 혼란기. 자신이 소속된 아이즈번은 막부를 옹호하며 유신을 도모하는 조슈와 사쓰마번에 맞서던 참이다. 번의 지시로 조슈번의 유력인사를 암살하기 위해 친우 '사노스케'와 함께 임무를 수행하던 '코사카 신자에몬'은 졸지에 140년이 훌쩍 지난 현대 일본에 홀로 떨어진다. 그가 목숨을 바쳐 지키려던 도쿠가와 막부는 망한 지 오래다.

처음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과거로 돌아가려 했지만,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깨닫자 어깨가 축 처진다. 이미 미래를 알고 있으니 과거로 돌아가도 허무할 뿐이다. 이미 신자에몬의 세상은 무너져버린 것. 가난한 하급 무사라 처자식도 없던지라 후손이 있을 리도 없다. 그래도 친절한 미래인의 집에서 얹혀살던 중 우연한 기회에 시대극 조연배우로 활동한다. 그의 역할은 '키라레야쿠(斬られ役)', 결투 중 주인공의 칼에 그럴듯하게 쓰러지는 운명이다.

남들이 보기엔 지나가는 엑스트라에 불과하지만, 과거처럼 묵묵히 수행에 정진하며 성실한 태도가 몸에 밴 주인공에겐 안성맞춤이다. 시대극 세트장은 그나마 친숙한 배경이고, 그를 받아준 절의 주지도 시대극 애호가다. 게다가 처음 들어선 세트장에서 얽히게 된 조감독 '유코'는 다정한 데다 시대극 전문이라 계속 만날 수 있다. 키라레야쿠 전문 배우들의 단체 '검심회' 역시 역할의 크고 작음에 얽매이지 않고 주인공이 알던 무사도처럼 수행을 강조한다.

그렇게 어느 정도 미래에 적응한 신자에몬이지만, 그가 몸담은 시대극은 점점 시대의 뒤안길로 밀려나는 중이다. 주인공을 웃고 울게 만들던 과거 시대의 흔적이 사라지는 것. 신자에몬은 물론 주변 사람들 모두가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시대극의 부활은 꿈처럼만 보였다. 하지만 시대극 엑스트라 출신으로 내놓으라 하는 톱스타가 된 '카자미 쿄이치로'가 돌연 시대극 복귀를 선언하며 신작 영화 제작을 발표한다. 그런 카자미가 주인공을 급히 찾는다.

전통과 현대, 변하지 않고 계승해야할 정신에 대해

 <사무라이 타임슬리퍼> 스틸
<사무라이 타임슬리퍼> 스틸(주)트리플픽쳐스

처음에는 140년이란 시간 차이로 천지개벽한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무라이 주인공의 요절복통 코미디를 상상했다. 어느새 미디어를 통해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게 된 '타임슬립', 시간을 초월해 건너뛰는 초현실적 설정이다. 하지만 그저 개그 장치로 써먹기만 할 줄 알았던 이 소재를 <사무라이 타임 슬리퍼>는 시대 변화를 막론하고 소중하게 대하며 지켜야만 하는 것들을 소환하고 그 가치를 강조하는 진솔함으로 변환된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던 주인공이 견지하던 삶의 미덕은 시간을 뛰어넘어 21세기 일본에서도 충분히 통할 만하다. 비록 출세도 제대로 하지 못한 낮은 신분에 불과했지만, 신자에몬은 의리 깊고 무사 수련에 열심히 임하며 매사에 진심으로 임하는 그야말로 사무라이의 표본이라 해도 좋을 존재다. 그의 진심은 시대극에 담긴 권선징악 교훈과 과거 무사들의 솔직 담백한 태도를 온전히 구현하는 듯하다. 차근차근 연기를 연마하며 신자에몬은 세상에 적응해 간다.

그렇게 어느 정도 안정을 찾던 주인공에게 대스타의 시대극 복귀는 처음엔 그저 반가운 소식이다. 하지만 주연을 맡은 카자미가 그에게 중요 배역을 제안하며 만나러 오자 곧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닫는다. 과거를 잊고 미래에 맞춰 소소하게 살려던 그에게 다시금 타임슬립의 영향이 드리운다. 과연 신자에몬은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까? 그가 시대극에서 찾았던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라도 과감한 도전에 나서는 게 맞을까? 하지만 과거의 원한은 어찌해야 하는가.

영화는 타임슬립한 주인공을 통해 중세 사무라이와 이를 소재로 한 시대극 장르를 연결하고, 하급 무사라도 직분에 충실했던 신자에몬이 비록 주목받기 힘든 엑스트라라도 열과 성을 다해 연기에 임하는 태도를 통해 세상의 변화무쌍한 세태에 굴하지 않는 인간 정신에 관해 설파하려 한다. 모두가 당장 눈앞의 이익에 혈안이 될 때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와 도리에 목숨까지 걸 수 있는 소박한 영웅이자 생활인의 풍모를 불운한 주인공을 통해 일깨우려는 작업이다.

초저예산 시대극이 돌파한 유리천장에서 얻는 교훈

 <사무라이 타임슬리퍼> 스틸
<사무라이 타임슬리퍼> 스틸(주)트리플픽쳐스

시대극이라면 대개 수많은 엑스트라와 많은 예산과 자원이 들어가는 세트, 시대 배경 고증의 적실성 등을 우선 떠올리게 마련이다. 일단 비용 생각하면 머리가 아득해진다. 대개 블록버스터, 혹은 상업적 성과를 우선 염두에 둔 장르영화 전유물로 여길 법하다. 독립영화에선 감히 도전하기 쉽지 않은 영역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통념을 사뿐하게 무너뜨리는 저력을 선보인다. 도전 자체가 쉽지 않은데 거창한 대규모 전쟁 장면은 없어도 그림이 그럴싸하다.

한국에선 '독립영화'라 대개 부르지만, 바로 옆 나라들끼리도 명칭은 제각각이다. 중국은 반체제 성격을 감안해 '지하영화', 일본은 제작과정의 독립성을 중시해 '자주영화'라 부른다. <사무라이 타임 슬리퍼>는 일본 자주영화의 모범적인 예시로 들기에 손색이 없는 작업이다. 어떤 이유에서일까? 일단 영화를 제작한 야스다 준이치 감독은 자신을 대표로 하는 제작사를 통해 영화를 만들었다. 대기업 메이저 제작사를 끼지 않고 독자적인 자율성을 확보한 작품인 것.

감독은 투잡으로 쌀농사를 지어 마련한 종잣돈을 기반으로 영화를 제작했다고 한다. 만석군 아닌 다음에야 농사로 얼마나 돈을 벌까? 우리 독립영화 제작비도 천정부지 오른 마당에 본작의 경비는 고작 2600만엔, 한화로 2억 원대 초반에 불과하다. 학생영화도 아닌데 일단 제작비 항목부터 경악할 만하다. 경비를 아끼기 위해 감독은 직접 각본과 촬영, 편집까지 도맡아 그야말로 몸으로 때운다.

2시간 넘는 시대극 제작과정에 스태프가 10명 넘지 않았다. 모두가 복수의 역할을 소화했기에 가능한 경우다. 개봉 역시 자주적인 방식으로 오직 입소문에 의지했다. 그런 열악한 조건 탓에 첫 주 상영관은 고작 1개, 단관에 불과했다. 그러던 게 차츰 인기몰이하며 140관으로, 막바지에는 380관으로 근 400배 증가한 셈이다. 오로지 '영화의 힘'으로 불가능할 것 같던 유리천장을 뚫고 솟구친 것. 꿈은 이루어졌다.

주인공의 태도를 통해 영화를 향한 초심을 되새기다

영화는 최종 10억 엔을 넘기는 반짝 대박의 주인공이 된다. 제작비와 대조하면 거의 40배 가까운지라 웬만한 블록버스터 못지않다. 자주 제작 및 배급이니 제작사 수익은 몇 곱절 더 될 테다. 하지만 그저 상업적 성공만 예찬할 필요는 없다. 본 작품은 쟁쟁한 경쟁자들을 뚫고 일본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해외 영화제들에서도 화제가 되는 등 상업과 비평 모두를 만족하는 결실을 얻는다. 진심을 건 도전이 관객에게 전달된 보기드문 성과다.

영화시장 물정 훤한 중견 감독은 왜 이런 위험천만한 도전을 벌였을까? 자신이 세상에 하고픈 이야기를 간절히 전하고 싶었던 때문이다. 요렇게 하면 요즘 관객이 솔깃하겠지? 유행이 뭐더라 슬쩍 올라타자 같은 세속적 계산 대신에 작가가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사람들과 나누고픈 주제를 공들여 만들고 관객은 그 진심에 응답했다. 코미디 시대극의 외피 안에 감춰진 <사무라이 타임 슬리퍼>의 정수가 여기에 있다. 작중 인물에 공명해 나를 돌아보게 해주는 영화다.

주인공은 격동의 시대, 자신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몰락하는 세력에 속했다. 하지만 돌아가는 사정 속속들이 꿰며 보신할 방도만 찾던 고위 무사와 달리 자신이 옳다고 믿던 대의에 투철한 삶을 살고 있었다. 비록 그 노력이 보상받진 못했지만. 그러다 또다시 아무 선택권 없이 동떨어진 시대로 타임슬립되고 만다. 운명의 짓궂은 장난이라기엔 도가 지나치다. 하지만 그의 삶의 태도는 변하지 않는다. 옳은 일을 하고 진심으로 타인을 대한다. 투박하지만 진심이다.

21세기 일본에서 그는 자신의 시대를 재연한 시대극 조연배우가 된다. 역시 찬밥 신세다. 혼신의 연기로 제대로 잘 죽는 게 역할의 전부다. 원래 시대에도 주인공의 역할은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 초라한 직분에 충실했고 시대가 변해도 자세는 변하지 않았다. 화려한 조명과 찬사에 휩싸인 주역이 아니라 그와 동료들, 카메라 뒤편의 숱한 스태프가 하나로 뜻을 모아 공동의 과제를 구현해 나간다. 그게 세상의 진정한 이치라는 점을 소리없이 웅변하려 한다.

갑자기 주인공의 현실을 뒤흔드는 존재가 등장한다. 역사에선 승자와 패자로 나뉘는 고약한 운명. 하지만 승리자가 편집한 역사책이 아니라 기록되지 않은 평범한 이들의 고뇌와 수고는 별반 다르지 않은 법. 대결을 끝내기 위해 필요한 건 무엇인가 치열한 고민이 계속된다. 주인공은 시대를 초월해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존엄을 지키며 소박한 삶의 보람을 찾을지 도전한다. 그의 분투에 관객의 공감이 어우러질 때, 화면 안과 밖은 영화라는 마법으로 하나가 된다.

<작품정보>

사무라이 타임슬리퍼
侍タイムスリッパー
A Samurai in Time
2024 일본 코미디, 시대극, 판타지
2026.06.24. 개봉 131분 12세 관람가
감독/각본/촬영/편집 야스다 준이치
출연 야마구치 마키야, 후케 노리마사, 사쿠라 유노
수입 ㈜영화사조아
공동수입/배급 ㈜트리플픽쳐스
사무라이타임슬리퍼 야스다 준이치 야마구치 마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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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