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흥민 월드컵 경기 보듯... 스필버그 신작 영화 감상하는 법

[김성호의 씨네만세 1374] <디스클로저 데이>

아마도 현존하는 영화감독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가 스티븐 스필버그일 테다. 불세출의 작품 <죠스>로 할리우드발 블록버스터 시대를 열어젖힌 그는 < E.T >,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쥬라기 공원> 시리즈를 연달아 내놓으며 일약 전 세계 최고의 흥행감독으로 자리했다.

스필버그의 위대함은 특정 장르, 일정한 연출기법에 제약되지 않는다는 점일 텐데, 이는 그대로 그 필모그래피로 드러난다. 나치의 전쟁범죄에서 유태인 피해자들을 구한 독일인의 이야기 <쉰들러 리스트>, SF장르 가운데 철학적 담론을 깊이 있게 녹여낸 <마이너리티 리포트>, 정통 SF 장르물 <우주전쟁>, 전쟁영화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재기발랄한 소재와 연출력이 돋보이는 <캐치 미 이프 유 캔>, 실화를 소재로 한 묵직한 드라마 <뮌헨> 등 한 명의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라고는 보기 힘들 만큼 다양한 영역에서 최고 수준의 영화를 찍어온 것이다.

70대 중반을 지나던 2022년, 스필버그는 <파벨만스>를 통해 제 영화세계를 자전적 이야기와 섞어 품격 있게 정리했다. 그를 통해 거장의 위대한 필모그래피가 거의 완성에 이르렀음을 의심하는 이가 없었다. 영화라는 예술이 등장한 이래 스필버그만큼 다방면에 걸쳐 굵직한 족적을 새긴 감독을 나는 단 한 명도 알지 못한다.

<디스클로저 데이>는 스필버그가 4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파벨만스> 이후 한 걸음 물러서 <트위스터스>,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 <햄넷> 등 화제작을 제작해온 그가 또 한 번 연출 일선에 나서 빚어낸 결과물이다. 직역하면 '폭로의 날'이란 뜻이 되는 제목처럼 감춰진 진실을 세상에 알리려는 이들과 이를 막아서는 이들의 대립을 그린 작품이다.

폭로를 다뤘단 점에서 워싱턴포스트 펜타곤 페이퍼 사건을 다룬 2017년 작 <더 포스트>를 떠올리게도 되는데, 그 폭로의 내용이 단순한 비리가 아닌 외계인의 존재란 점에서 SF장르물처럼 읽히기도 한다. 무엇보다 지구에 방문한 외계인이 인간에게 우호적이란 설정은 초기작 <미지와의 조우>, < E.T. >에 호응한다고 봐도 좋겠다.

디스클로저 데이 스틸컷
디스클로저 데이스틸컷유니버설 픽처스

폭로하려는 자, 그를 막으려는 집단

폭로하려는 이와 그를 막으려는 자가 있다. 영화는 거친 경기가 진행되는 레슬링경기장, 객석에서 경기를 즐기지 못하는 한 사람을 비춘다. 그가 바로 폭로하려는 이다. 정부와 긴밀히 협력하는 기업 워덱스의 사이버보안 전문가 다니엘 켈너(조쉬 오코너 분)다. 그는 어째서 레슬링 경기장에 있는가. 이내 영화가 그 까닭을 살핀다. 기업체로부터 빼돌린 자료를 가방에 넣어온 그는 납치된 제 애인과 가방을 교환하기로 한 것이다. 대체 담긴 정보가 무엇이기에 전혀 상관없는 여자를 납치하도록 했을까. 또 그 자료를 다니엘은 왜 순순히 넘기려 하지 않는가.

영화는 다니엘이 워덱스 및 정부 관계자들의 추격을 피해가며 자료를 지키는 과정을 뒤따른다. 자료를 빼돌린 게 다니엘의 단독행동이 아니란 사실이 확인된 가운데, 여차저차 다니엘의 애인 제인(이브 휴슨 분)이 남자친구와 함께 워덱스의 추격을 피해 도주를 이어가게 된다.

한편으로 영화는 미국 중서부 미주리주에 위치한 캔자스시티로 자리를 옮긴다. 30대 후반의 기상캐스터 마가렛(에밀리 블런트 분)은 캔자스시티 지역 방송국 아침뉴스에서 일기예보를 담당한다. 진지하게 뉴스를 전하는 앵커자리에 앉기를 꿈꿔왔지만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는 탓으로 일기예보 시간에 몸매와 예능감을 뽐내는 역할에만 머무르고 있다. 공개 오디션이 날 때마다 도전하고 있지만 어느새 마흔 가까워진 나이가 꿈이 이뤄지기가 쉽지 않단 걸 일깨운다.

변화는 한 순간에 찾아온다. 여느 때처럼 출근을 앞두고 동거하는 애인 잭슨(와이엇 러셀 분)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녀 앞에 웬 새 한 마리가 날아든 것이다. 메이저리그 야구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상징으로도 유명한 홍관조로, 북미에선 꽤나 흔한 새로 알려져 있다. 갑자기 집 안에 날아든 새가 마가렛을 빤히 바라보자 그녀에겐 분명한 변화가 일어난다.

디스클로저 데이 스틸컷
디스클로저 데이스틸컷유니버설 픽처스

모든 걸 꿰뚫어보는 능력, 비밀은?

그로부터 이야기는 마가렛이 갑자기 특별한 능력을 얻게 됐음을 내보인다. 출근길 저를 잡아 세운 교통경찰의 내밀한 집안 사정을 꿰뚫어보고, 출근해 만난 직장 동료들의 상황까지 속속들이 꿰고 있는 것이다.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언어를 아무렇지 않게 구사하고, 자아의 경계를 넘어 인지 범위가 초월적으로 늘어난다. 말 그대로 초능력, 그것도 거의 제약 없는 이해의 경지에 가까운 능력이다.

뉴저지에 본사를 둔 회사에서 기밀자료를 빼내 폭로하려는 다니엘과 캔자스시티에서 초능력을 얻은 마가렛, 좀처럼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이 실은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게 이 영화의 내막이다. 정부 비밀요원을 수족처럼 부리는 워덱스 고위 관계자 노아 스캔런(콜린 퍼스 분)이 이들을 바짝 뒤쫓는다. 마가렛과 마찬가지로 다니엘 또한 특별한 능력을 가졌단 사실이 확인되고,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들이 가진 능력과 다니엘이 빼돌린 자료, 또 다니엘 뒤에 있는 이들의 비밀스런 작업에 조금씩 다가선다.

외계인은 존재할뿐더러 계속 지구에 방문해왔다. UFO라 불려온 미확인 비행물체가 실재했으며, 심지어 추락해 생포된 외계인들이 존재했다. 미국 정부는 그 사실을 은폐했다. 그뿐 아니라 외계인을 생체실험하는 일까지 저질렀다. 이 모든 사실이 정부와 군 수뇌부에 의해 독단적으로 이뤄져왔다. 국가안보란 명목 아래 자행돼온 이 같은 행위를 더는 좌시해선 안 된단 것, 바로 이것이 다니엘과 그 뒤에 있는 이들의 신념이 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흔한 미국 발 음모론쯤으로 여겨졌을 수 있는 이야기다. 분명 영화엔 허무맹랑한 구석도 없잖다. 외계인이라니, 미국 정부가 외계인을 붙잡아 생체실험을 하고 그 사실을 일반에 알리지 않았다니 말이다. 저 유명한 '로즈웰 추락'이며 크롭서클 등의 이야기는 외계인과 관련한 음모론의 단골 소재가 아닌가.

디스클로저 데이 스틸컷
디스클로저 데이스틸컷유니버설 픽처스

외계인이 살아 있다

그러나 이제와 이것은 이야기는 더는 음모론이라고만 치부될 수는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지난 2017년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특종으로, 미군이 미확인 비행체를 포착한 영상이 실재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해 미 국방부가 독자적인 프로젝트를 꾸려 비밀리에 조사를 진행해왔다는 사실이 전 세계에 공개된 것이다. 국회까지 나서서 외계인의 존재를 열어두고 조사를 진행한 정부의 불투명한 프로젝트를 문제 삼았으니 <디스클로저 데이>가 다루는 이야기가 완전히 허무맹랑한 음모론이기만 한 것은 아니겠다.

또 한 가지, 에드워드 스노든이 다니엘의 캐릭터에 영향을 준 것도 분명해 보인다. 영화 속 다니엘과 마찬가지로 정부 정보기관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민간 업체(Dell) 보안관계자로 취업해 사실상 NSA(미 국가안보국)의 업무를 했던 그다. 스노든은 업무 중 미국이 프리즘 프로젝트로 대표되는 무차별적 정보수집을 불법적으로 자행하고 있단 사실을 파악하고 이를 폭로하기 위해 핵심적인 증거를 탈취해 도주한다.

홍콩을 거쳐 러시아로의 망명과 귀화로 이어지는 스노든의 도피를 미국은 국가배신행위로 간주했으나, 그가 폭로한 사실들은 도리어 미국 정부의 범죄행위를 명명백백하게 확인해주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말한다. 미국 정부는 국익이며 국가안보란 명목 하에 적법한 절차며 주권자의 동의 없이도 불법적인, 심지어는 비인도적 행위를 자행할 수 있다.

<디스클로저 데이>는 이 두 가지 사실 위에서 탄생한 상상이다. 그래서 그저 허황되고 단순한 음모론일 수만은 없다.

디스클로저 데이 포스터
디스클로저 데이포스터유니버설 픽처스

영화보다 더 충격적인 현실을 안다면

스노든 사건은 사실상 미국에서 비슷한 행위가 발생할 경우 정부에 반하는 행위를 한 사람이 탈출할 길을 막는 결과를 초래했다. 미국, 심지어 2차 대전 이후의 세계질서를 대놓고 망가뜨려가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미국에 맞서 국가반역자로 공표된 이를 보호할 세력은 어디에도 없다. 망명에 망명을 이어가며 도피한 스노든조차 제 몸 둘 곳을 찾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수많은 나라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그 망명신청을 거부했다.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던 러시아가 아니었다면, 스노든의 운명은 달라졌을 테다.

그래서 영화는 초능력을 택한다. 팔란티어 기술을 활용한 미국 내 이민자 단속이나 베네수엘라 대통령 납치 및 이란 수뇌들의 암살에서 보듯이, 수년 전과는 비할 바 없이 발달한 기술력이 스노든과 같은 도주를 상상하기 어렵게 한다. 현 체제 안에서 다니엘과 마가렛 같은 이들이 초능력 없이 추적을 피한단 건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가 생성된다. 정부의 추적을 무위로 돌릴 만큼 대단한 초능력이 번번이 위기를 벗어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보는 이가 매순간 허탈함을 맛보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긴박한 추적극이어야 할 것이 때가 되면 예정된 퇴로로 퇴각하는 일의 연속처럼 느껴지기 십상이다. 약속대련을 보는 듯 긴장이 팍 식는다. 현실 속 역량의 불균형을 고려한 안배가 도리어 균형이 깨진 듯한 인상을 안긴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다만 대중의 현실감각이 실제 현실과 상당한 격차를 갖는 까닭으로, 고심 끝에 내렸을 선택이 도리어 쉬운 선택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쉬운 비판인 걸 알면서도 스필버그라면 달리 풀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일말의 아쉬움은 기대와 신뢰의 다른 이름이겠다.

영화는 또한 부족한 극적 긴장을 이어가기 위해 두 도망자 다니엘과 마가렛 곁에 모자란 동행을 붙인다. 소위 공포영화의 발암캐릭터를 연상시키는 이들이 탁월한 역량을 갖춘 이들 옆에서 가랑이를 잡고 늘어진다. 특히 잭슨은 1990년대 할리우드 영화의 주인공 옆 금발미녀가 담당했던 역할을 성별만 바꿔 그대로 보여준다. 그때 그들처럼 미모조차 없는 잭슨의 발암행각을 보고 있자면 와이엇 러셀이 방패를 집에 두고 온 로마 보병처럼 쏟아지는 비난에 무방비로 놓일 것이 걱정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스클로저 데이>는 잘 만든 영화다. 같은 이야기를 다른 감독이 찍었다면 어떤 영화가 됐을지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쉬이 마주하기 어려운 비범함을 곳곳에서 대면하게 된다. 스필버그가 스필버그한 장면들 말이다. <파벨만스>의 마지막 장면이 알린 그 특별한 연출의 흔적들이 이 영화 곳곳에 적잖이 깃들어 있다. 팔순을 앞둔 스필버그의 연출이 저기 라스트댄스를 추는 메시나 손흥민의 월드컵 경기를 보는 듯이 아깝고 귀하다. 작은 흠에 집착해 훌륭함을 보지 못한단 건 대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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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