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브 원 데이> 스틸
판씨네마㈜
아내와 자식은 이제 건강에 적신호가 왔으니 은퇴를 제안한다. 하지만 평생 일궈온 식당을 포기할 수 없는 남자는 죽어도 요리하다 죽겠다는 태도다. 그걸 그냥 두고 볼 가족이 어디 있으랴. 세실은 정 그렇다면 요리사를 고용해서 운영하라며 비용을 부담하려 하지만, 관계 소원하던 딸의 제안에 심사가 단단히 뒤틀렸는지 부녀지간은 오히려 악화 일로다. 기껏 바쁜 와중에 시간 내어 내려왔건만, 가족 사이 앙금은 더 벌어지기만 한 셈.
이래저래 심란한 세실 앞에 동네 친구들이 불쑥 출현한다. 그중 라파엘은 단지 친구라기엔 뭔가 과거가 있는 듯하다. 오랜만에 재회한 상대도 세실이 무척 반가운 눈치다. 아빠 문제로 심란하던 세실은 라파엘의 설득과 권유로 며칠간 자주 만나 옛 개구쟁이 친구들과 어울린다. 그럭저럭 기분 전환은 되지만, 서로의 격차는 떠난 세월만큼 벌려진 상태다.
라파엘과 관계는 소꿉친구와 재회로 그치지 않는다. 둘 사이엔 과거 이별 당시 추억이 생생한 듯하다. 어쩌면 실패를 되돌릴 운세가 돌아온 걸까? 괜한 상상도 해보지만, 이미 세실은 연인이자 동업자 소피안과 10년째 만남을 이어왔고, 라파엘 역시 둘의 동창인 '나탈리'와 결혼해 아들이 있는 유부남이다. 모래시계를 되돌릴 수 없다는 이성의 신호를 모르지 않지만, (남에겐 공유하기 힘든) 인생의 고비에 놓인 세실과 미련 잔뜩 라파엘의 행보는 종잡을 수 없다.
그렇게 주인공은 이중의 혼란상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한 축으론 고집불통 아빠와의 지리한 냉전이다. 소박한 대중식당 대 파인다이닝 고급식당의 요리철학 대결로 자연스레 치환된다. 다른 축은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본 잃어버린 첫사랑의 추억이다. 어쩌면 두 번째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는 덧없는 감정은 너무나 달콤한 금지된 유혹이다. 제작진은 이 복잡한 감정을 프렌치 팝 명곡을 동원해 활용한다.
프랑스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샹송까진 아니라도 프렌치 팝은 한국의 케이팝과는 달리 가사의 비중이 여전히 높다. 그것도 불어 위주로 가사에 공을 들이기에 인기 프렌치 팝 노래를 배우가 가창하는 것만으로 자연스레 인물 사이의 감정이 오가고 속내가 묻어난다.
물론 <리브 원 데이>가 뮤지컬 영화처럼 노래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건 아니다. 다만 프렌치 팝을 통해 영화의 분위기를 지나치게 무겁게 가라앉히지 않으면서 지금 인물 내면과 서로의 감정 교차를 선보인다. 보편적인 인기곡 가사로 인물의 속내를 제시하기에 좀 더 보편적인 감각으로 눈앞에 뵈는 인물들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처음엔 발리우드 영화 보듯 뜬금 없어 보여도 윤활유 친 듯 매끄럽게 넘어가는 장치다.
케이팝 노래가 영화에 쓰여도 배경음악 범주를 벗어나기 힘든 반면, 모국어 가사 중심의 장르가 문학적인 역할을 일정하게 소화하는 프렌치 팝의 효용이 제법 쏠쏠하게 다가온다.
감정의 고양을 때로는 증폭하고 때로는 중화하는 프렌치 팝의 향연은 아빠와 딸 사이의 칼로 물 베기 같은 케케묵은 대립을 좀 더 감정 소모 없이 응시할 수 있도록 돕는다. 노래 삽입뿐 아니라 적절한 연극적 화면 전환 역시 자칫 심각하게 치달을 위기를 궤도로 돌려놓는다. 아빠의 신랄한 독설과 라파엘의 천연덕스러운 능글맞음, 고향 친구들의 막무가내 억지도 그렇게 힘을 빼준 덕분에 간만에 찾은 본가 친지와 이웃사촌 에피소드로 넘길 수 있게 된다.
인생의 변화무쌍함
▲<리브 원 데이> 스틸
판씨네마㈜
영화의 원문 제목 <Patir un Jour>의 의미는 '언젠가 떠난다'다. 주인공은 이미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 편안하고 안정되긴 해도 변화와 발전 가능성은 기대하기 힘든 고향에서 제 발로 떠난 바 있다. 그렇게 10년 넘는 세월을 셰프의 길로 정진해 이제 성공을 눈앞에 둔 상태다. 하지만 긴 시간의 분투는 피로와 회한을 누적시킨다. 자신이 개척한 길을 뚜벅뚜벅 걷다가 문득 이 길이 맞는지, 진정으로 바라고 원하던 것인지 헷갈릴 순간이 온다. 세실이 처한 지금.
이야기 내내 세실은 어찌 보면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이다. 나쁘게 말하면 이기적이라 자기 진로와 목표에 몰입하는 스타일이다. 성공하기 위해 많은 걸 인내하고 희생한 사람이 종종 드러내는 면모다. 그녀는 바로 지금, 자신의 시종일관 지향을 고수하려다 관계의 위기에 빠지려 한다. 아빠의 자존심 긁어가며 성공에 다가선 현재로선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며 본인의 욕망에 충실하려는데 관객의 성향에 따라 세실에 대한 호오는 나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영화 속 주요 인물들은 각자 소신대로 살아왔지만, 다들 한구석에 미련과 회한을 숨겼다. 갈등의 축인 아빠와 딸은 분위기 안 가리고 모진 말을 화살처럼 날려대지만,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으면 아차 싶어 슬며시 사과를 건넨다. 피를 나눈 가족이기에 가능한 태세전환이다. 물론 어릴 적부터 봐온 동네 친구들도 그렇다. 짓궂은 장난을 칠 때는 저래도 되나 싶지만, 친구가 위기에 처하면 앞뒤 안 재고 불에 뛰어들 이들이다. 고향은 그렇게 탕아를 맞는다.
꽤 구석진 동네라 세실은 고향으로 돌아올 때나 떠나려 시도할 때나 히치하이킹에 의지한다. 부모님의 휴게소 식당에 정차한 트럭 운전사들에게 파리행 차편을 수소문하고 호의에 의지해야 드나들 수 있는 마을이다. 이는 마치 파리의 전쟁 같은 미식계에서 생존 투쟁을 벌이느라 지친 세실의 마음속 피난처이자 트라우마 보관소처럼 다가온다. 어쩌면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평행 세계의 느낌도 살짝 풍긴다.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하지만 맘 굳게 먹어야 돌아올 그런 곳.
그렇게 전개되던 작품의 결말은 고정된 결론을 확정하지 않는다. 그 대신, 고향에서 약간이나마 과거와 화해한 주인공의 장래를 열어 놓고 상상하도록 관객을 이끈다. 지난 반생이 천지개벽하듯 고향에서의 며칠로 바뀌는 건 오히려 힘든 일이다. 세실이 어떤 선택을 내릴지 누구도 맞출 수 없지만, 오히려 그 점 때문에 인물의 선택이 어디로 기울지에 대한 흥미로운 가정이 가능해진다. 깔끔한 결말과는 간격이 제법 있지만, 오히려 그 탓에 여운이 남는 작업이다.
<작품정보>
리브 원 데이
LEAVE ONE DAY / Patir un Jour
2025 프랑스 코미디/드라마/뮤지컬
2026.06.24. 개봉 96분 15세 관람가
감독 아멜리 보낭
출연 쥘리에트 아르마네, 바스티앙 부이용, 튜피크 잘랍
수입/배급 판씨네마㈜
2025 78회 칸영화제 비경쟁부문 개막작
▲<리브 원 데이> 포스터판씨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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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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