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 전 돌연 취소... 4회째 맞은 비슈케크국제영화제의 현실

자국의 뼈아픈 현실 고발했다는 이유로... 영화 <쿠락>, 첫 키르기스스탄 상영 앞두고 일방적 취소

아시아의 스위스로 불리며 새로운 여행지로 각광받는 키르기스스탄. 그 웅장한 자연만큼이나 뜨거운 문화적 에너지가 흐르는 이 나라의 수도 비슈케크에서 지난 6월 7일부터 12일까지 제4회 비슈케크 국제영화제(BIFF)가 열렸다.

전 세계 33개국이 참여한 가운데, 〈아멜리에〉(2001)로 세계적 사랑을 받은 프랑스 배우 오드리 토투가 명예 게스트로 초청되어 현지 영화인들에게 영감을 전했다. 비슈케크 시내 올드 스퀘어에서 개막식과 스카이 카펫 행사를 시작으로 국제 경쟁, 중앙아시아 경쟁, 키르기스스탄 경쟁, 주빈국 몽골 영화 주간, 특별 상영 및 회고전 등 다채로운 섹션을 통해 70여 편의 작품이 선보였다.

신생 영화제의 저력, 체계적인 산업 생태계에 도움

 비슈케크국제영화제 개막식 현장.
비슈케크국제영화제 개막식 현장. 비슈케크국제영화제

이제 막 4회째를 맞은 신생 국제영화제이지만, 각 부문별로 촘촘하게 짜인 프로그램은 영화의 기획 단계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산업 전반을 아울렀다. 특히 캐나다와의 공동 제작 워크숍, 중동의 레드씨 영화 펀드 워크숍, 시나리오 작법 워크숍은 중앙아시아 영화인들에게 실질적인 교육의 장을 제공했다. 피칭 프로그램과 후반작업 지원 같은 산업 프로그램은 유망한 프로젝트들이 글로벌 시장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됐다.

작년 최종룡 감독의 〈수연의 선율〉이 국제경쟁부문에 초청되어 호평을 받았지만, 올해는 영화제 스크린에 걸린 한국 영화는 없었다. 그러나 그 빈자리는 중앙아시아 영화계 깊숙이 뿌리내린 한국 영화의 영향력과 연대로 채워졌다. 한국 심사위원 세 명이 영화가 탄생하는 모든 주기에 걸쳐 현지 영화인들을 지지했다.

최근 〈세계의 주인〉을 제작한 구정아 프로듀서는 'CAF Pitch' 프로그램을 통해 기획개발 예산을 지원했고,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장을 맡은 나 역시 'Bars in Progress' 심사를 맡아 완성을 앞둔 창작자들의 치열한 고민에 힘을 보탰다. 오랫동안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의 영화를 발굴해 온 홍상우 경상국립대 교수는 중앙아시아 경쟁 부문 심사를 맡았다.

기획부터 완성까지, 아시아의 새로운 이야기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국제적 육성이 이루어진 현장이었다. 개막식에는 김광재 주키르기스공화국 한국대사도 처음으로 참석해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축하와 외교적 지지를 건넸다. 이는 한국과 키르기스스탄 양국의 문화 교류가 민간 차원을 넘어 외교적 차원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상영 직전 일방 취소된 영화

 에르케 주마크마토바, 고(故) 에밀 아타겔디에프 공동 감독의 〈Kurak(쿠락)〉이 첫 키르기스스탄 상영을 앞두고 일방적으로 취소됐다
에르케 주마크마토바, 고(故) 에밀 아타겔디에프 공동 감독의 〈Kurak(쿠락)〉이 첫 키르기스스탄 상영을 앞두고 일방적으로 취소됐다비슈케크국제영화제

그러나 국제사회가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싹을 틔우려는 창작자들을 이토록 정성껏 끌어올리는 동안, 주최국인 키르기스스탄 당국은 올곧게 자란 나무마저 단칼에 베어버리는 참담한 모순을 자행했다.

정부는 4년 전 8천만 솜(약 12억 원) 수준이었던 영화 산업 지원 총예산을 올해 9억 2800만 솜(약 143억 원)으로 10배 이상 대폭 증액했다고 과시했다. 하지만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지석상 포함 2관왕에 오른 에르케 주마크마토바, 고(故) 에밀 아타겔디에프 공동 감독의 〈Kurak(쿠락)〉이 첫 키르기스스탄 상영을 앞두고 일방적으로 취소됐다. 심각한 여성인권 문제와 페미사이드, 권력 카르텔 등 자국의 뼈아픈 현실을 고발했다는 이유로 국가기관이 상영 직전 상영허가증 발급을 거부한 것이다.

이미 14개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고 부산국제영화제 지석상을 비롯해 다카, 브줄 등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작품이 정작 조국에서는 관객과 만나지 못한 것이다. 주마크마토바 감독은 "우리 영화는 진실을 억압하는 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상영 허가증을 거부당했다는 사실 자체가 역설적으로 영화의 내용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이 서늘한 검열의 칼날은 한국 영화인들에게 2014년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벌어진 〈다이빙벨〉 사태를 상기시킨다. '막대한 예산'과 '통제된 현실'이 공존하는 비슈케크의 6월은, 억압 속에서도 계속되어야 할 영화와 국제 연대의 이유를 묵직한 질문으로 남기고 있다.

국제경쟁부문 대상에 레자 라하디안의 <판쿠의 시간>

한편, 국제경쟁부문 대상은 인도네시아 배우 출신 감독 레자 라하디안의 〈On Your Lap(판쿠의 시간)〉이 수상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4관왕에 빛나는 작품이다. 이란 영화 〈The Divine Ideal of Killing〉은 감독상과 여우주연상(샤브남 다드카)을 동시에 거머쥐었고, 키르기스스탄 영화 〈Black Red Yellow〉가 심사위원특별상(시나리오 부문)을 받았다.

중앙아시아 경쟁 부문에서는 카자흐스탄의 두만 에르킨벡 감독이 첫 장편 〈Restart〉로 대상을 수상했다. 타지키스탄 이자벨 칼란다르 감독의 〈Another Birth(또 다른 탄생)〉은 여우주연상, 국제영화비평가(FIPRESCI)상, 키르기스스탄 촬영감독연맹상 등 3관왕을 차지하며 아시아 영화의 산실로서 부산국제영화제의 저력을 재확인했다. 키르기스스탄 경쟁 부문(KyrgyzBox)은 알마즈 잔가지예프 감독의 〈Moment〉가 대상을 받았다.

산업 부문에서는 Bars in Progress 최우수상(500,000 KGS, 약 750만 원)이 칼란다르 감독의 차기작 〈Life Says: Still We Must Live〉에, CAF Pitch 그랑프리(500,000 KGS)는 〈The Taste of Shawarma After a Tipsy Night〉(감독 아미르 아메노프)가 각각 수상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백재호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장입니다.
비슈케크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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