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일이었던 지난 6일, 한국전쟁을 다룬 연극 한 편을 관람했다. 제목은 <잔류시민>, 한국전쟁 당시 서울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연극에는 군인이 등장하지 않고, 인물들의 대사와 전투기 효과음을 통해서만 전쟁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연극의 제목이기도 한 '잔류시민'은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정부가 서울 다리를 폭파하고 피난한 탓에 서울에 어쩔 수 없이 남겨진 사람들을 의미한다. 잔류시민들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북한군에게 협조해야 했다. 총칼의 위협 앞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서울을 수복한 뒤 북한군에 협조한 잔류시민들을 법정에 세웠다. 정부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잔류시민들을 '부역자'로 규정하며 이른바 '부역자 재판'을 벌였다. 당시 부역자 재판은 실제로 재판을 맡은 판사 유병이 남긴 책 <재판관의 고민>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으며, 극작가 이양구는 책을 참고해 연극 <잔류시민>을 집필했다(그래서 <잔류시민>의 초기 가제는 <재판관의 고민>이었다).
부역자 재판은 단심제였다. 중대한 사건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경미한 사건은 서울지방법원 판사들이 담당했다. 형량은 대체로 중형, 많은 사람이 사형을 당했다. 소극적인 협조 행위에도 중형이 선고되었는데, 당시 판사들에게 전달된 특별조치령이 그렇게 명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극 <잔류시민> 공연 사진
(주)연우무대
두 법정의 공존, 기억해야 하는 건 약자의 법정
연극은 크게 두 갈래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부역자 재판 이야기, 다른 하나는 부역자라고 명명된 잔류시민들의 이야기다. 부역자 재판이 이야기되는 무대는 법정이다. 이 연극에서는 잔류시민들이 살아가는 무대 역시 법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법정은 역사의 법정이다. 법관들의 법정에서는 법을 다루는 사람들이 주인공이지만, 역사의 법정에서는 그 자체로 역사를 살아가고 있는 보통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이 연극이 인상적인 건 두 법정의 경계를 결코 선명하게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역자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 '김병호'(이종무 분)는 정부의 피난길에 함께 올랐다 돌아온 인물이지만, 그의 가족들은 서울에 남겨졌다. 아내 '오수인'(황은후 분)과 아들 '김정욱'(황규찬 분)은 잔류시민으로, 부역자 재판에 기소된다.
판사 '홍승호'(정원조 분)는 김병호의 동료였으나 피난을 가지 못했다. 북한군 치하에서 법원자치위원장을 역임한 그는 남한 정부가 서울을 수복한 뒤 부역자 재판을 받게 된다. 그는 판사였지만, 부역자 재판이 벌어지는 법정의 주인공보다는 잔류시민의 삶이 펼쳐지는 역사의 법정 속 주인공에 가깝다.
굳이 따지자면 이 연극에서 실제 법정은 강자의 법정이고, 역사의 법정은 약자의 법정이다. 강자의 법정이 득세하면 약자들은 무참히 사라진다. 부역자 재판은 단심제였고, 특별조치령에 따라 양형 이유를 작성하지 않아도 무방했다. 그렇게 법관들은 '편하게' 사형을 선고했고, 사형을 선고받은 잔류시민은 다시 다퉈볼 여지도 없이 사형을 당했다.
▲연극 <잔류시민> 공연 사진
(주)연우무대
부역자 재판은 실제 사건으로, 역사에서의 여타 학살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지난 역사에서 약자의 법정이 쉽게 득세하지 못했으므로 부역자 재판은 역사책에서 쉽게 잊혔다. 사형을 당하는 잔류시민들을 보고 "처리된다"고 묘사하던 김병호의 대사는 부역자 재판의 학살적 특징을 드러낸다.
극중에서 김병호가 이렇게 판단하고, 훗날 기소된 잔류시민들에게 무죄를 연달아 선고할 수 있었던 건 두 법정 간 경계가 흐릿해진 덕분이다. 경계의 흐릿함은 강자로 하여금 약자의 존재를 생각하게 만들었고, 그 경계에 서있는 김병호는 다른 법조인들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선택을 한 김병호를 보여줌으로써 이 연극이 잊혀진 약자의 법정을 뒤늦게나마 조명할 수 있었다.
한편 잔류시민에게 사형을 구형하는 검사(백성철 분)의 논리는 법에 기초한다. 김병호는 검사의 법적 논리에 맞서 자신만의 법리를 구성한다. 형법으로 특별조치령의 모순을 반박하고, 판례를 통해 검사 측의 법률 적용을 반박하며, 법 이론으로 검사의 법리를 무너뜨린다. 극중에서 법조인들이 벌이는 치열한 대사의 향연은 그 자체로 이 연극의 묘미다.
실제 법정과 역사의 법정을 항상 지키며 기록하는 서기(이수진 분)의 시선과 해설은 하나의 관점을 제시해준다. 상공에 매달린 철근과 바닥에 흩뿌려진 종이들로 구성된 무대 세트의 의미 역시 관객 각자가 충분히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연극 <잔류시민> 공연 사진(주)연우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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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당시 서울 다리 폭파로 서울에 남겨진 시민들은 왜 사형당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