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파리 택배기사의 48시간>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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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단계. 나는 파리의 자전거 택배기사
'술레이만'은 파리 시내에서 음식물을 자전거로 배달하는 택배기사다. 휴대전화 앱을 켜고 주문 기다리는 모습은 한국의 라이더와 별반 다를 게 없다. 항상 쫓기듯 페달을 밟아야 한다. 하지만 계획대로 일은 굴러가지 않는다. 시간이 돈인데 식당은 바깥에 하염없이 세워두고 골탕을 먹인다. 동료들이 달래서 다툼이 더 불거지진 않았지만, 일진 사나워서인지 교통사고도 나고 포장이 구겨져 배송 거부를 당한다. 통사정해도 고객은 매정하다.
물론 진상 고객만 만나는 건 아니다. 추위와 허기를 달래고자 주문한 커피값을 깎아주는 인심 좋은 가게 주인도 만나고 고향과 출신을 묻는 인정많은 손님과 짧은 대화도 나눈다. 마음이 누그러진 술레이만은 거동 불편한 손님을 돕기도 한다. 혹독한 작업환경에 항상 사고 위험에 노출된 작업환경, 늘 민원에 눈치를 봐야 하는 플랫폼 노동의 악조건은 세계 어딜 가나 공통인 듯하다. 비가 와도 차가 밀려도 모든 건 택배기사 책임인 것도.
2단계. 파리의 추운 밤 잠자리 구하기
이제 막차 시간 쫓길 차례다. 전날 예약해둔 노숙인 쉼터행 버스에 정시 탑승해야 한다. 그는 전력질주로 내달려 간신히 만원 버스에 올라탔다. 금세 누적된 피로가 온몸에 파고든다. 쉼터는 엄격한 행정절차에 의해 운영된다. 단골인 술레이만이라도 예외는 없다. 그래도 겨울 파리는 밖에서 잠을 청할 데가 아니기에 어떻게든 쉼터 자리를 확보해야 한다. 따뜻한 식사와 샤워, 철제 침대가 그를 기다린다. 자주 드나드니 친구도 있어서 그럭저럭 의지가 된다.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을 술래이만은 때론 친근하게, 때론 야박하게 대한다. 자기 한 몸 추스르기 바쁜 터라 동료를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울 형편은 못된다. 그래도 인심 나빠져서 좋을 일도 없으니 적당히 모나지 않게 사람들에 응대해야 한다. 산전수전 겪어가며 터득한 생존전략인 셈이다. 밤거리의 위험에 노출되지 않고 최소한의 인권을 누릴 수 있는 이곳은 파리에서 그에게 허락된 마지막 보루다.
3단계. 망명신청 면접 대비하기
젊은 청년이 왜 이 고단한 일상에 처한 걸까? 그는 48시간 후 망명 신청자 인터뷰를 치러야 한다. 증거자료와 각종 서류도 제출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신의 절박한 사연을 논리적으로 진술하는 것. 망명신청 수용 여부는 인생이 달린 문제다. 술레이만은 아프리카 서해안 기니에서 파리로 왔다. 과거 프랑스 식민지였기에 불어가 유창한 건 다행이지만, 면접관이 현지 사정에 능통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틀 앞으로 다가온 면접인데도 준비 상태가 허술해 보인다. 브로커는 암기 제대로 하라며 들볶지만, 그가 제시한 치밀한 시나리오를 술래이만은 통 숙지하지 못한다. 게다가 요구한 금액을 지불해야 근거가 될 물증을 제공받는 데 돈이 마련되지 않아 통사정한다. 노동할 자격이 없어 지인에게 라이더 인증 계정을 빌려 대리로 일하는 까닭에 일한 만큼 대가를 챙기지 못하는 탓이다.
4단계.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하여
이제 남은 시간이 너무나 짧다. 자꾸 돌발 변수가 터지며 심신을 갉아먹는다. 면접 통과를 위한 시나리오상 그는 정치적 박해에 희생된 열혈 운동가이지만, 관객이 화면에서 파악하는 술레이만은 그저 소박한 꿈 갈구하는 흙수저 청년일 뿐이다. 망명은 거창한 소신도 투철한 이념과도 무관하게 다만 안정된 나라에 정착해 열심히 돈을 벌어 엄마도 잘 모시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기 위한 방책에 불과한 것. 흔히 '가짜 난민' 취급되는 경제적 난민이 그의 실체다.
우여곡절 거친 후 마침내 술레이만은 면접관과 대면한다. 사전에 달달 외운 대로 그럴듯한 정치적 망명자로 자신을 피력하지만, 가만히 듣고 있던 면접관은 그의 말이 점점 조리가 맞지 않고 흔들리는 걸 어렵지 않게 간파한다. 매일 그와 비슷한 레퍼토리 듣다 보니 이골이 난 표정으로 안쓰러운 듯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녀는 상대의 중구난방을 멈추게 한 다음 조용히 던진다.
"이제, 당신의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민의 홍수 속에서 개인의 윤리적 선택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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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래이만이 진술하듯, 그는 서아프리카 해안에 위치한 기니에서 북쪽 말리를 지나 사하라 사막을 빙 두르는 죽음의 이동을 감행했다. 알제리를 지나 리비아로 향한 그와 일행은 온갖 수난을 겪은 다음 목숨만 부지해 간신히 지중해를 건넜다. 해마다 수천 명이 지중해의 물보라에 삼켜진다는 통계를 보면 살아남은 것 자체가 행운인 셈. 하지만 이탈리아에 상륙했다고 해서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다. 다시 파리에 입성하기까지 과정 자체가 출애굽기, 엑소더스다.
노숙인 쉼터와 거리의 자전거 택배 라이더 사이엔 술레이만과 같은 처지의 망명 신청자가 가득하다. 기니와 코트디부아르 사람들은 오만가지 시빗거리로 툭탁거리지만, 급할 땐 정보도 교환하고 뻔한 처지나마 도움을 주고받기도 한다. 달리 의지할 곳도 없고 그나마 동병상련 처지라 그렇다. 하지만 오히려 제법 자릴 잡은 동포들은 신참자를 이용해 먹거나 등을 치며 착취한다.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른다는 속담이 딱 맞아 떨어지는 대목이다.
주인공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망명 신청을 승인받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지금껏 고생하고 허송세월한 걸 보상받을 길이 없는 것. 두고 온 게 마음에 걸리는 홀어머니, 눈물을 머금고 포기한 여자친구가 눈에 밟힌다. 팔자에 없는 야당의 투사, 정치범 코스프레를 해서라도 이루고픈 꿈이 있다. 그러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고생만 해온 고향의 엄마는 늘 아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하게 살라고 당부했다. 술레이만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뭐가 중할까?
관객을 파리의 택배기사와 대면하도록 이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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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이민자 소재 작품에선 온정적 시각으로 정부의 몰인정한 관료적 태도, 사회 일반의 무관심에 고통을 겪는 피해자로 이민자 주체를 설정하곤 한다. 선악 대비가 분명해야 관객도 몰입하기 쉽고 이야기 전개도 수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이분법 대신에 흠결 많고 거짓말을 일삼는 주인공을 내세운다. 관공서도 야박하긴 해도 일부러 모질게 대하거나 박해하진 않는다. 처음엔 이러다 어떻게 풀려는 것인지 의아한 관객이 여럿 나올 법하다.
영화 초반, 열심히 페달 밟아 도착하니 잠복수사 경찰차에서 야식을 주문했다. 임금노동이 금지된 주인공으로선 머리털 쭈뼛 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경찰들도 그의 처지를 단박에 간파하지만 굳이 시비를 걸진 않는다. 자신들도 배가 고프다며 대충 넘어간다. 별것 아닌 일화이지만, 파리 시내 라이더 태반이 술레이만과 비슷한 이들이란 걸 시사한다. 이미 저임금 플랫폼 노동은 그들이 아니면 안 돌아가는 구조. 공무원도 주인공도 같은 인간이란 메시지다.
하지만 누군가를 악마화하지도, 가련한 피해자로 억지 설정하지도 않는 영화의 골격은 서서히 그들과 우리 사이의 이분법을 무너뜨리기에 이른다. 다만 운명의 장난으로 관객은 프랑스나 한국에 태어났고 주인공과 그의 친구들은 서아프리카 실패국가에 태어난 것뿐이다. 그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고 술레이만의 간절한 꿈은 결코 억지나 무임승차 심보도 아니다. 역으로 그런 다면성을 통해 관객은 세계를 뒤흔드는 난민 문제에 관해 보편적 척도를 세울 수 있게 된다.
주인공의 선택은 과연 무엇이고 어떤 결과로 확인될까? 감독은 절반은 매듭짓고 나머지 절반은 관객에게 맡긴다. 잔뜩 긴장한 채 가련한 청년의 미래를 궁금해 하던 관객은 영화를 만든 이들이 무엇을 전하고 보여주려는 것인지 곱씹게 된다. 비합법 이민자의 애환을 바탕에 깔지만, 영화는 단지 온정적으로 그들의 서글픈 상황을 전시하려는 태도와는 다른 보법으로 관객을 응대하려 한다. 같은 재료라도 색다른 레시피는 전혀 다른 맛을 내게 마련이다.
현실감을 극대화하는 파리의 풍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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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일체 배경음악이 삽입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소리는 넘쳐난다. 굳이 감성 자극하는 사운드트랙 대신 실제 거리의 라이더들이 내고 듣는 현장음이 생생하게 담겼다. 자동차 경적과 인파가 내는 소음, 내내 신경 자극하는 앱 알람과 바쁠 때만 골라 오는 전화 너머 음성, 퉁명스런 배달 플랫폼 상담원 응대와 반드시 타야만 하는 전철과 버스의 엔진음이 관객의 귀를 채운다. 실제 이민자 출신 주인공의 미세한 표정 변화와 떨림이 그에 절묘하게 결합한다.
생동감 있는 소리를 위해 제작진은 자전거를 타고 파리를 누비는 주인공 옆에서 함께 자전거에 탄 채 붐 마이크와 녹음기를 들었다. 다큐멘터리를 방불케 하는, 아니 일종의 재연으로 극화한 영화 속 상황은 관객을 주인공 혹은 동료가 되는 체험 기회로 이끈다. 배달 앱 주문하는 과정에서 내게 오는 라이더가 어떤 노동 과정을 거치는지, 그들은 어디서 와서 어떻게 이 일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았더라도 이 영화를 본 다음엔 한동안 외면하기 힘들 테다.
한국은 엄살로 보일 정도로 유럽대륙은 중동과 아프리카를 비롯해 과거 제국주의 시절 식민지 국가에서 밀려드는 이주민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누군가에겐 역사의 원죄이자 업보로, 누군가에겐 어렵게 구축한 복지국가를 붕괴로 이끄는 일등공신으로 원망의 대상이 되지만, 분명히 해결해야 하는 중요 사안임엔 분명하다. 이 영화가 전하는 보편적 인간의 풍경은 이념과 편견을 초월해 그들을 타자화하지 않는 시선으로 관객을 이끌기에 충분하다.
<작품정보>
어느 파리 택배기사의 48시간
Souleymane's Story
2024 프랑스 드라마
2026.06.17. 개봉 93분 46초 12세 관람가
감독 보리스 로즈킨
출연 아부 상가레, 니나 뫼리스, 알파 우마르 소 배리 등
수입 주식회사 스튜디오일공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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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77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심사위원상, 남우주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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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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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택배 기사의 하루... 진상 손님은 되지 말자 다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