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비평가가 누구냐 물으면 나는 주저 없이 루이스 멈퍼드라 말하곤 한다. 영화평론을 하면서 영화평론가가 아닌 건축평론가, 그것도 70년이나 된 이를 좋아한다 말하는 걸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이가 많다. 그때마다 나는 비평이란 그 대상이 무엇이든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영화를 만든다는 건 건물을 올리는 것과 얼마 다르지 않은 일이라고 답해왔다. 루이스 멈퍼드는 그저 영화예술을 재료로 삼는 비평가들이 갖지 못한 탁월함을 갖춘 매력적인 이 일 뿐이다.
그렇다면 건축은 영화와 어떻게 닮았는가. 건축은 건물을 짓는 일이다. 건물이란 사람이 일상적으로 대하는 것으로, 자연히 사람들이 요구하는 바를 담아내야 한다. 옛 사람들은 그 요구를 크게 세 가지로 추렸는데 구조와 기능, 그리고 미다. 안전과 효율과 아름다움은 영화로 치면 '어떻게' '효과적으로' '감동시킬' 것이냐가 된다. 감동은 인간을 움직이는 것으로써, 공포는 두렵게 하고 코미디는 웃기게 하며 또 어느 작품은 지적으로 확장케 하는 것이다. 때로는 눈물 뽑는 슬픔이나 마음 훈훈한 공감이 될 수도 있겠다. 그 어느 것이든 영화의 목적이 된다.
구조를 설계하고 시공에 들어가 그를 구현하는 작업도 영화와 닮았다. 외관에 집중하고 재료에 특별함을 더하거나 공간감을 극대화하는 등의 시도가 모두 영화에서도 찾을 수 있는 일이다. 필름이냐 디지털이냐, 화면비는 어떻게 쓸 것이냐, 카메라와 마이크는 어떤 것을 활용할 건가. 이 모두가 건축과 얼마나 닮아 있는가. 보는 이의 동선과 시야에 따라 건물을 감각하며 가질 감흥을 계산하는 건축처럼, 영화 또한 선형적이든 비선형적이든 관객이 가질 인상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게 마련이다. 결국 둘 모두가 구조와 기능, 아름다움의 예술이다.
▲콜럼버스스틸컷
엣나인필름
칸과 선댄스 찍고 화려한 귀환
최근 재개봉한 <콜럼버스>는 2018년 한국서 첫 개봉한 한국계 미국인 감독 코고나다의 작품이다. 첫 개봉 당시 관객이 1만 명에도 크게 미치지 못했는데, 칸과 선댄스영화제에서 화제를 모은 차기작 <애프터 양> 이후 코고나다의 존재가 알려지며 데뷔작인 이 작품 또한 재개봉에 이르게 됐다. 특히 이 작품만의 특별함이 본 이로 하여금 다른 어느 영화와도 구별되는 감상을 일으킨단 점에서 코고나다의 영화세계를 보다 깊이 이해하도록 한다. 닮은꼴을 찾기 어려운 독특한 건물처럼 이 영화만의 특별한 매력이 자리한단 이야기다.
줄거리는 간명하다. 한국서 미국 인디애나주 작은 도시 콜럼버스를 찾은 건축가 이재용 교수가 쓰러져 사경을 헤맨다. 아들 진(존 조 분)이 한국서 콜럼버스까지 날아온 게 그래서다. 한국계 미국인인 진은 한국에서 출판번역을 하며 지내는 모양인데, 아버지와는 딱히 살가운 사이가 아닌 듯하다. 이재용 교수의 사정을 진에게 알린 건 그 제자인 엘리노어(파커 포시 분)다. 진이 미국에 살 때 그와도 각별한 사이였던 듯, 오랜만의 해후에도 격의가 없다.
한편 이재용 교수의 강연을 듣길 소망하던 한 젊은이가 있다. 도서관 계약직 직원 케이시(헤일리 루 리처드슨)다. 남달리 건축을 좋아하는 그녀가 우연인 듯 필연처럼 진과 마주한다. 이재용 교수가 살던 저택 밀러하우스의 울타리 너머에서 담배를 태우던 케이시에게 진이 다가와 한 대 청한다. 그로부터 이 영화에서 손꼽히게 인상적인 장면이 펼쳐진다. 벽돌로 쌓은 기둥 사이 철제 구조물로 막힌 담장을 따라 두 사람이 나란히 걸으며 담타를 갖는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며 롱테이크로 다가오며 대화하는 두 사람을 잡는다. 동경하던 건축가 이재용의 아들과 건축을 좋아하는 케이시의 운명적 만남이다.
▲콜럼버스스틸컷
엣나인필름
도시가 주인공이라고?
이로부터 영화는 며칠 동안 두 사람이 콜럼버스 이곳저곳을 오가며 갖는 시간으로 채워진다. 케이시가 자신이 좋아하는 건물들을 진에게 하나씩 소개하는 게 골자다. 실제 모더니즘 양식의 공공건축물이 많기로 유명한 콜럼버스다. 영화가 그 많은 건물과 그에 얽힌 얼마쯤의 사연을, 또 케이시의 감상과 그 감상이 타인인 진에게 닿아 일으키는 파문을, 둘의 만남으로부터 일어나는 교감과 변화까지로 이어지는 게 막힘없이 자연스럽다. 돌아보면 진과 케이시 사이에 가려진 담장 대신 뚫어볼 수 있는 울타리가 놓여 가능했던 일이다. 건축이란 이처럼 중하고 그 효과는 이토록 오묘하다.
<콜럼버스>의 가장 큰 특색은 여유롭다는 점이다. 모더니즘 건축이 그러하듯이 화려한 장식을 배제하고 공간감을 부여한다. 대사도, 사건도 많지 않고 비워진 공간을 배경음이 메꾼다. 풀벌레 소리며 한 대씩 지나다니는 자동차 소리가 은근하지만 분명하게 인식될 정도다. 누구 말마따나 저곳의 분위기, 조명, 온도, 습도... 모든 게 완벽히 모여 한 장면을 이룬달까. 무튼 꼭 필요한 것만 채운 덕택에 그 밖의 것들이 자연스레 나머지를 이뤄내는 조화가 <콜럼버스>의 매력이 된다. 그래서 이 영화를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안해진다는 평이 있는 것일 테다.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의 유명한 말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모더니즘 건축의 핵심과 통한다. <콜럼버스>가 추구하는 바도 그와 같은 모양이다. 마치 콜럼버스의 여러 건축물을 케이시와 진이라는 가이드를 따라 투어하는 듯이 영화는 이들 건축의 구조와 기능, 그리고 아름다움을 하나씩 자연스레 드러낸다. 통상적인 영화가 좀처럼 잡지 않는 앵글로 파사드(Façade·건물의 인상을 결정짓는 정면모습을 뜻하는 용어)를 보여주는 순간이 잦다. 또 케이시가 여러 건물을 좋아하는 저만의 이유를 말하는 모습을 그녀가 각별히 애정하는 건물의 구석구석과 함께 보인다. 그를 듣고 있자면 이런 건축물로 가득한 매혹적인 도시 콜럼버스가 전과는 달리 보인다. 더는 지루하고 심심한 곳이 아니게 된다.
▲콜럼버스스틸컷
엣나인필름
아는 만큼 달리 보이는
건축을 아는 이라면 반짝 웃음을 터뜨리게 되는 순간도 적지 않다. 이를테면 모더니즘 건축으로부터 파생된 브루탈리즘 양식의 건물 아래를 지나며 잔인함(Brutal)을 이야기하는 순간 같은 장면이다. 이토록 아재적인 지적유희를 코고나다 같이 진지한 감독도 참아내질 못한 것이다. 하하하.
다시 처음의 울타리, 두 사람이 만나던 순간의 밀러하우스로 돌아오자. 울타리 안에 있던 진은 그 집이 떠올리게 하는 아버지, 그리고 성공한 건축가의 아들로 짊어져야 하는 삶이 버겁고 답답하다. 그에게 울타리는 그를 둘러싸 옭아매는 경계다. 바깥에서 담배를 태우던 케이시에게 울타리 너머 밀러하우스는 동경하는 건축이 자리한 곳이다. 저는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막연한 꿈이라 밀어두고 있지만 그래도 틈날 때마다 흘깃 훔쳐보고 엿듣고 싶은 공간이다. 그 둘이 울타리를 따라 걷다 마침내 열린 문 앞에서 대화하는 순간은 그래서 해방이자 가능성이 된다.
다른 많은 작품이 그러하듯, 코고나다의 영화는 아는 만큼 달리 보인다. 이 영화 <콜럼버스>도 마찬가지다. 여백 많고 사건 적은 이 영화가 지루하고 시시해 보일 수도 있겠다. 루이스 멈퍼드가 사랑한 어느 건축물은 지나는 이 백 중 아흔아홉이 알아보지 못한다. 건축가도 영화감독도 제 작품이 보는 이에게 진실로 가서 닿기를 바라지만, 더 큰 울림을 담고 있어 더 적은 이에게 가 닿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때로 어떤 만남은 생각을, 사건을, 운명을 바꾼다. 케이시에게 진이, 진에게 케이시가 그랬듯이. 어쩌면 영화와 건축도 누군가를 그리 이끌 수 있는 일이다. 나는 내가 쓰는 글이 또한 그러하길 바란다.
▲콜럼버스포스터엣나인필름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공유하기
조명, 온도, 습도, 분위기... 모든 게 완벽할 때 탄생하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