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 변한 록스타 남자친구 떠나보낸 후 만든 음악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비긴 어게인>

위키피디아에 개인 항목이 등재될 정도로 성공한 제작자였으나 근래 몇 년간 침체기를 겪던 '댄'은 자신이 설립한 회사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울분에 차 뮤직바에서 홀로 술을 들이켜다 우연히 무명가수 노래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든다. 다른 이들은 대수롭지 않게 한 귀로 흘리지만, 번득이는 천재성을 지닌 그에겐 조금만 다듬으면 대성할 원석으로 보였던 것. 노래가 끝나자 가수에게 명함을 건네며 음반 작업을 청한다.

'그레타'는 남자친구 '데이브'가 대형 음반회사와 계약하며 뉴욕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데이브는 투어로 자리를 비우기 일쑤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둘 사이는 차갑게 식는다. 함께 지내던 근사한 숙소를 빠져나와 기분 전환 겸 딱 한 곡 부른 자리에 댄이 마침 있던 것. 그레타는 하룻밤 생각한 끝에 제안을 수락하고 앨범 제작에 돌입한다.

서로 다른 절망의 끝에서

 <비긴 어게인> 스틸
<비긴 어게인> 스틸판씨네마㈜

두 주인공은 각자 곤경에 처했다. 댄은 찬란한 과거 성공을 뒤로 한 채,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지 오래다. 대중음악계를 바꾸겠다며 대학 동기 '사울'과 의기투합해 재능 있는 음악인을 육성하고 새로운 시대의 조류를 재빠르게 포착해 맨주먹으로 메이저 음반회사를 키웠지만, 어느새 자신들이 혁신하려 한 음악계 관행의 핵심이 되어버렸다. 적응하지 못한 댄은 끝내 '책상'을 빼야 할 처지. 충격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레타는 댄과는 정반대다. 성공이 목전에 있다. 남자친구는 메이저 회사와 큰 계약을 따내고 귀빈 대접을 받는다. 그의 대표곡을 작곡한 그레타 역시 남자친구만큼 스포트라이트를 받진 못해도 저작권만 잘 행사하면 적잖은 실리를 챙길 수 있다. 하지만 그레타는 댄의 신보가 자신과 함께 작업했던 원곡 취지를 대중에 영합하는 방향으로 훼손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성공을 맛본 '록스타' 남자친구의 마음도 변한 듯하다. 그레타는 외로움과 좌절에 빠진다.

그런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났다. 그레타는 다 집어치우고 영국으로 돌아가려던 참, 댄은 그냥 술 잔뜩 먹고 어디 가서 뛰어내릴까 하던 참이다. 둘 다 길을 잃었고 뭘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들 곁에 유일하게 남은 게 있긴 하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니 세상 모든 고통과 불행이 개방되며 망연자실한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와 판도라 앞에 '희망'이 등장했던 것처럼. 그레타의 노래에서 댄은 촉을 되살려 가능성을 포착한다.

물론 진행은 쉽지 않다. 무명가수와 망한 제작자 조합은 스튜디오 빌려 음반사에 제출할 데모 테이프 만들 자금도 마련하지 못한다. 자신이 대표로 있던 회사에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찾아가 자금 원조를 청해도 매몰차게 거절당한다. 하지만 이미 반짝반짝 구동하기 시작한 왕년의 천재 제작자는 위기를 기회로 돌파할 채비가 되어 있다. 그레타 역시 댄의 황당무계한 제안을 재미있겠다며 찬동한다. 뉴욕을 가로지르는 음악 실험이 일어날 순간이다.

음악은 마법의 묘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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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긴 어게인> 스틸판씨네마㈜

그레타는 좋은 노래를 만드는 재주가 있지만, 지금껏 남자친구의 그림자처럼 개인적인 작업만 해왔다. 그녀의 음악성과 결함을 동시에 발견한 댄은 동료를 만들어주기로 한다. 최소 반주로만 이뤄지던 그레타의 자작곡은 밴드 음악과 어우러지자 그야말로 거듭난다. 고정관념만 고수하던 그레타는 타인과 교감하며 음악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댄 역시 즐겁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살 수 있듯 음반 제작자는 음반을 만들어야 생기가 돈다.

앨범을 위한 밴드 모집과 녹음 과정은 영웅 서사에서 모험을 위한 동료 구하기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우선 그레타의 오랜 친구가 자발적으로 동참한다. 뉴욕에서 거리 공연을 일상으로 행하던 그는 최소 규모의 거리녹음이라는 앨범 콘셉트를 정확하게 꿰뚫으며 필요한 요소를 조달하는데 천부적 소질을 뽐낸다. 뉴요커 삶의 현장음이 농축된 그레타의 음악은 그렇게 틀을 갖춘다.

뒤를 이어 클래식 음악학교 영재과정이지만, 제발 '비발디' 곡만은 참아달라며 틀에 박힌 커리큘럼에 질린 연주자 남매를 포섭한다. 키보드 주자도 직장을 박차고 동참한다. 심지어 댄의 딸 바이올렛도 기타리스트로 밴드 세션에 한 발 걸친다. 이들은 뉴욕 구석구석을 순회하며 현장 녹음에 도전한다. 지하철 구내에서 한 곡 마치자마자 순회 경찰에 쫓기고, 경비원에게 슬쩍 용돈을 찔러준 다음 빌딩 옥상에서 인근 아파트 이웃을 달래가며 후다닥 작업을 마친다.

녹음이라기보단 즉석 버스킹 공연에 근접한 이들의 게릴라 작업에선 즉흥적 면모가 현장에서 자연스레 가미된다. 뒷골목에서 공놀이한 동네 아이들과 즉석 흥정하는 과정에서 그들을 코러스로 영입하기도 한다. 음악으로 뭉친 동료는 녹음 작업 마친다고 땡 하고 헤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인생 우정으로 발전해 나간다. 음악은 그렇게 삶을 바꿀 수 있다.

음반사 시각에선 이 음반 제작과정은 그저 비용 절감 편법이자 아마추어들의 시행착오로 비칠 게 뻔하다. 녹음 완성도와 음질에 집착하는 고루한 매니아 집단은 거리 소음이 뒤죽박죽 섞인 습작 혹은 실패로 간주할 테다. 하지만 그레타와 댄은 확신을 품고 판에 박힌 음악업계 고정관념과 정면으로 맞서는 실천을 이어간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편안하고 즐겁게 음악을 누릴 수 있을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음악은 과연 무엇인지 질문하면서.

음악은 삶을 채우는 매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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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긴 어게인> 스틸판씨네마㈜

음악 활동의 즐거움은 주인공과 주변인들의 삶도 서서히 바꿔나간다. 그레타는 환승이별의 충격을 딛고 자신이 가진 재능을 꽃피울 기회를 얻는다. 무기력하게 혼자 고향으로 돌아갔다면 그녀의 이후 삶은 어땠을까? 상상만 해도 우울한 풍경이 눈에 선하다. 위축되고 혼란하던 마음을 추스르고 음악 동료로서 전 연인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평정을 되찾는다. 자신의 음악적 지향도 명확하게 찾을 수 있었다. 이제 여유를 갖고 주변도 돌아볼 수 있게 된다.

그런 그레타의 눈에 자신을 헌신적으로 돕는 댄의 상황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가족과 결별한 채 최악의 상황으로 전락한 그의 마음속에 도사린 상처가 궁금해진다. 조금씩 그의 과거를 파악하자 자연스럽게 도움의 손길을 전하고 싶다. 댄의 딸 '바이올렛'에겐 마치 친언니처럼 부모의 별거로 불안정한 심리를 다독이며 인생 상담도 해준다. 댄이 차마 밖으로 꺼내지 못하던 아내와의 파경을 고백하도록 이끈다. 둘은 수렁으로 추락한 파트너를 각자 방법으로 돕는다.

따로 떨어져 있을 때 그레타와 댄은 각각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다. 하지만 다시 훌훌 털고 재기를 위해 분투하자 그들 주변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석 같은 인연이 불쑥 튀어나온다. 세상이 성공을 바라보며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너머에서 자신만의 소신으로 경작한 관계의 결실인 셈이다. 일단 능동적으로 마음을 다잡고 일어서면 작은 도움의 불씨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는 예시다. 그렇게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음반이 성공적으로 제작된다.

이제 마지막 유혹의 시간이 깃든다. 댄의 친구 사울은 그레타의 음악성을 확인하자 태도가 돌변한다. 장사꾼이 된 그에게 매력 넘치는 히트상품 예감은 앞뒤 제쳐 놓고 남들이 채가기 전에 확보해야 하는 자산인 것. 좋은 조건에 성공적인 출발을 할 수 있다. 그레타는 자신을 버리고 스타의 길을 걷는 데이브에게 한 방 먹이는 홀로서기, 댄은 화려하게 제작자로 복귀할 기회를 확보한 셈이다. 하지만 세속적 성공신화가 정녕 그들이 원하던 것일까?

어떻게 초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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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긴 어게인> 스틸판씨네마㈜

21세기 영화관객이 '음악영화'를 떠올릴 때 첫손에 꼽을 <원스>의 감독 존 카니는 이번엔 세계 모든 음악인이 선망하는 꿈의 도시 뉴욕을 무대로 달콤쌉쌀한 뮤직 드라마를 펼친다. 거리에서 연주하다 만난 무명가수들이 음악을 통해 서로를 치유하고 인생을 새롭게 출발하던 이야기는, 이제 그렇게 각자의 길을 걷던 이들이 성공의 갈림길에서 어떤 판단을 내릴 것인가 단계로 이행한다. 세계적 팝스타가 누리는 엄청난 대우라는 달콤한 유혹이 그들을 기다린다.

현대 음악산업은 영화산업과 마찬가지로 이윤을 뽑기 위한 거대한 복마전이 된 지 오래다. 댄은 대중의 갈망을 먼저 포착하고 시대에 필요한 음악을 발굴해 왔지만, 그의 선구적 재능은 어느새 상업적 계산에 휩쓸려 필요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이익이 되면 떠받들고 모시지만, 돈을 벌어주지 않으면 철 지난 상품으로 전락하는 음악인을 숱하게 봐온 그는 무엇보다 진정한 애호가로서 음악이 어떻게 가수와 대중을 함께 행복하게 해줄지를 최선으로 두려 한다.

그레타와 댄 앞에는 운명을 바꿀 선택만 남았다. 21세기 음악 비즈니스 세계에서 거대 기획사의 후견은 성공을 위한 결정적 조건이다. 그 세계의 정점에 서본 댄은 이를 뼛속 깊이 이해한다. 하지만 이 일에 도전하던 초심을 여전히 간직한 그로선 세속적 성공 대신에 그저 중세 음유시인처럼 즐겁게 동료들과 음악에 몰두하는 그레타를 더 보고 싶다.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겪어본 이만이 내릴 수 있는 통찰이다. 그리고 그녀와의 협업으로 댄은 이미 많은 걸 얻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영화를 끝까지 보면 깨닫는다. 물론 누구나 택할 수 있는 길은 아니다. 이미 대중음악계 몇몇 이단아들이 감행한 게릴라식 도전의 답습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레타가 데이브와 다시 만난 자리에서 목격한 음악적 견해 차이의 확인, 영화를 상징하는 명곡 "Lost Stars" 공연 무대에서 목격할 수 있는 변주 장면은 관객을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 대중의 기호에 영합하는 게 틀린 것인가? 음악인이 자기만족으로 그치는 게 온당한 일인가?

하지만 영화는 체제를 전복하자는 선동을 내세우지 않는다. 다만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자본주의 산업의 틈새에서 숨 쉴 자유의 가치를 환기하며, 음악이 그 역할을 일정하게 해낼 수 있다는 증명을 펼치고자 한다. 더블캡으로 같은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 둘 사이에 놓인 장벽을 뛰어넘어 진심을 교감할 수 있는 마법의 음악은 사실 우리 주변에 항상 존재한다.

<작품정보>

비긴 어게인
Begin Again
2014 미국 음악, 멜로/로맨스, 코미디
2026.06.17. (재)개봉 104분 15세 관람가
감독/각본 존 카니
출연 키이라 나이틀리, 마크 러팔로, 헤일리 스테인펠드, 애덤 리바인
수입/배급 판씨네마㈜

 <비긴 어게인> 포스터
<비긴 어게인> 포스터판씨네마㈜


비긴어게인 존카니감독 키이라 나이틀리 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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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