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다섯 먹은 젊은 시인(하성국 분)이 있다. 그의 애마는 1996년식 프라이드다. 프라이드 옆자리에 3년 사귄 애인 준희(강소이 분)를 태우고 교외로 나선 참이다. 경기도 여주에 있는 그녀의 집까지는 길이 쭉 뻗어 드라이브하기도 좋다. 도착해 그녀를 내려주고 보니 집이 생각보다 훨씬 크고 화려하다. 그녀가 그에게 잠깐 올라가 구경하지 않겠냐고 한다. 부모님은 안에 계실 테니 잠깐만 보고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홍상수 감독의 33번째 장편영화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는 이렇게 시작한다. 시인 동화가 준희의 집을 찾아 겪는 이야기가 109분짜리 장편 안에 담겼다. 데뷔 30주년, 독자적인 영화세계를 구축했다고 해도 좋을 홍상수 아닌가. 선형적 전개 중심의 서사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 일어나는 '무언가'에 집중하는 게 홍상수 영화의 주요한 특이점이다. 그래서 그 영화를 이야기하자면 통상의 기승전결이랄까, 이렇다 할 영화적 사건이 부재한 경우가 적잖다. 상당수가 그냥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야기하고 서로 싸우거나 사랑하는 일로 채워진다. 여기서 사랑은 우아하거나 천박하거나 아니면 그 사이의 모든 것까지 포괄하는 폭넓은 개념이겠다.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도 별반 다르지 않다. 비슷하게 시작하는 유명한 작품, 조던 필의 <어스>를 떠올려 보자. 애인을 따라 교외에 있는 그녀의 본가에 간 청년은 그 집에 모인 사람들에게 붙들려 제 육체 안에 구속된다. 알고 보니 이 집에 모여든 사람들은 흑인을 꾀어내 육체를 빼앗는 돈 많은 백인 범죄자 일당이 아닌가.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스틸컷
한국영상자료원
감독의 삶과 영화
홍상수가 영화를 이끄는 건 완전히 다른 방식이다. 그냥 남자와 여자가 포함된 사람들이 얘기를 나눈다. 주구장창 이야기한다. 이 영화 속 서너 차례 긴 테이블신, 그리고 테이블 없이 대화하는 많은 신들이 영화 자체를 이룬다. 그러니까 사건이 없어도 영화는 계속된다. 삶이 그렇듯이.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에서 6월 중순까지 홍상수 전작전이 열리고 있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영화예술 중추 기관이 데뷔 30주년을 맞이한 한국 거장의 지나온 길을 되짚는 의미 깊은 행사다. 때문일까. 매 회차 여느 상영 때보다 훨씬 많은 관객들이 시네마테크로 걸음한다. 1년에 2편씩을 찍어내는 성실한 감독과 그 작품을 보겠다 걸음하는 관객들이 빚는 풍경이 낯설고도 새롭다. 한 예술가가 일생을 걸어온 발자국을 다시 보는 작업이 무엇을 의미할까. 한 편의 영화 너머 그 영화들로 써 내려간 역사가 말하는 바는 무엇일까. 적어도 이번 전작전은 홍상수에 한해 그 작업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는 지난해 발표한 신작이다. 배우 김민희가 임신한 상태에서도 제작실장으로 나서 베를린국제영화제 등 해외 일정을 소화해 주목받았다. 혹자는 홍상수의 영화가 갈수록 투명해진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영화를 통해 변명 또는 항변하고 있다고 한다. 적어도 자신을 둘러싼 변화하는 상황이 그대로 작품과 관계 맺으며 나아간다는 점에서 홍상수의 영화가 삶과 긴밀한 접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긴 어려울 듯하다. 사건보다는 삶을 말하는 것, 그것이 홍상수의 영화가 가진 특별함이다.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스틸컷
한국영상자료원
마음처럼 되는 건 하나도 없네
이 영화 또한 마찬가지다. 영화는 시작부터 마음 같지 않다. 준희의 안내에 따라 올라간 길에서 둘은 바로 그녀의 아버지와 맞닥뜨린다. 잠시 보고만 가라는 준희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선 안 되는 것이었을까. 그녀의 장담과는 달리 아버지(권해효 분)는 집이 아닌 집 앞에 나와 무얼 하고 있던 중이었다. 바로 붙들린 연인은 그대로 이 집에서 밥까지 먹고 가야 하는 상황이 된다. 연애 3년 만에 첫 번째 만남이라고. 그러니까 정식으로 남자가 여자의 집에 인사하는 상황이다. 부담 갖지 말라는 준희의 말이 더 부담스러운 건 그래서다.
이야기는 이내 아버지가 산을 통째로 사서 만든 집과 닦은 길, 그에 얽힌 사연으로 흘러간다. 산 정상부에서 아버지와 동화가 막걸리를 두고 나누는 대화가 있고, 준희 자매와 함께 여주 어느 유명한 비빔밥집서 먹는 점심 자리가 있다. 집에서 아버지가 닭을 잡아 백숙하는 동안 세 사람은 관광지로도 유명한 신륵사를 찾아 시간을 보낸다. 밤에는 집에 온 어머니(조윤희 분)까지 함께 다섯 사람이 식사한다. 그리고 동화가 취해 잠든 밤엔 준희의 부모님이 따로 정상부에 컨테이너 박스를 옮겨 마련해둔 아지트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다. 이 자리들의 연속이 곧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다. 그러니까 영화는 홍상수의 작품이 늘 그러했듯 자연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인간에 대한 영화다.
사귀고 3년 만에 찾아온 남자는 미리 준비하고 온 것이 아니다. 집 앞에서 돌아가려 하다가 어찌어찌하던 중에 맞닥뜨렸다. 여자는 계획했을지 몰라도 남자는 그렇지 못했다. 30년식 프라이드를 끌고 온 그에게 프라이드랄 게 있었을까. 그랬을지도 모르겠으나 아닐 공산이 크겠다. '왜 이런 차를 끄냐'는 물음이 따르는 건 자연스럽다. 대부분은 그런 차를 끌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때를 달리하여 동화에게 이 차를 끄는 이유를 묻는 아빠와 딸, 엄마에게 동화가 여러 이유를 대며 늘 "돈도 없구요"하는 말을 붙이는 건 많은 생각을 하도록 한다. 누군가는 그저 흥미로 대하고, 누구는 못나고 창피한 차로 여기며, 또 누구는 안전을 이유로 차를 바꾸라 당부하는 가운데 동화의 답은 늘 제 자리를 맴돈다. 정말이지 동화는 왜 그 차를 타는 걸까. 프라이드가 이름처럼 당당할 수 있으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스틸컷
한국영상자료원
시인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시인은 어떻게 사는가. 나는 시인을 제법 알고 지내지만, 그중에 시로 돈 벌어 사는 이는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들 중엔 제 직업이 시인이라 말하지 못하는 이도 꽤 된다. 가만 보고 있자면 직업이 무엇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에겐 돈을 버는 것이 직업인데, 다른 누구는 제 삶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 직업이 되고, 또 다른 이에겐 반드시 이루려는 것이 직업이 된다. 그중 무엇이 맞느냐는 가려낼 수 있을까. 이 글을 쓰는 나와 읽는 독자 사이에서도 합의하기 어려울 것을 안다. 영화 속 처음 만난 사위 후보감과 준희네 가족들 사이에서도 그렇다.
시인은 저를 시인이라 하는데, 그는 작은 문예지에 글을 실었을 뿐 낸 시집 하나 없는 형편이다. 준희의 어머니가 마침 시인이라는데, 홍상수의 영화가 대체로 그러하듯 그녀가 쓴 시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고 그저 훌륭하다는 극찬만이 따를 뿐이다. 그녀의 눈에 동화의 시는 어떠할까. 홍상수가 그 시 앞머리를 마침내 가족들 앞에서 외도록 한 것을 말하자면 그 시가 딱히 탁월하지 않을 것을 짐작하는 이가 있을 테다.
'꽃이 피네 / 밤에 꽃이 피네 / 꽃이 피면 / 환해지고 / 무섭지 않아요'
뭐 이런 구절이 반복되는 시다. 후에 준희의 엄마로부터 평가되는 것이지만 기교도 없고 그렇다고 대단한 무엇도 깃들지 않은 시. 꽃은 정말 환해지고, 그러니까 주변을 밝힐 만큼 화사하고 보는 이를 무섭지 않게 할까. 취하도록 마신 뒤 일어나 산에 올라 꽃을 비추는 휴대폰 손전등이 있다. 그 휴대폰 덕분에 환해진 풍경은 정말로 세상을 무섭지 않게 할까. 하하하.
▲홍상수 전작전포스터한국영상자료원
홍상수식 유머로 즐기는 우리네 삶
홍상수식 유머로 가득한 이 영화로부터 관객은 인물 각각이 좀처럼 벗어내지 못하는 관점을 발견한다. 준희는 제 집에 들어가기 전 아버지와 언니에 대해 말한다. 우리 아버지는 진짜 책에 나오는 그런 효자라고, 언니는 우울하고 그런 이상한 게 있다고 말이다. 신신당부처럼 느껴지는 그와 같은 말들은 얼마나 진짜이고 얼마만큼 오해일까. 언니는 동화에게 시종 '그래도 하 변호사님 아들'이라고 말한다. 얘는 별 볼 일 없어도 뒷배경만큼은 빵빵하다는 얘기랄까. 거듭되는 말과 행동이 꼭 '하 변호사 무새' 정도로 봐도 무방할 정도인데, 그와 같은 시선에 사로잡혀 동화의 무엇도 곧이곧대로 보려는 마음이 없다. 가만 보자면 모두가 같다. 다를 바 없다. 동화라고 다를까.
때때로 흐릿해지는 초점은 이제는 홍상수의 주요한 영화적 기법이라 해도 좋겠다. 전작 <물안에서>에선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초점 나간 카메라로 영화를 찍었던 그가 이번에도 일순 그와 같은 선택을 할 때가 있다. 그리고 사이사이 인물들이 서로 주고받는 '깨끗한'이란 표현이 그와 묘한 대비를 이룬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저마다 뿌옇게 낀 렌즈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렌즈의 왜곡으로부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는 그래서 인간에 대한 탐구가 된다. 자연이 무슨 말을 하는지 관객은 영영 알 수가 없다. 다만 우리는 타인의 렌즈와 거듭 마주한다. 홍상수의 렌즈를 거친 세상을, 그 안에 든 수많은 이들의 렌즈를 거쳐 나온 말과 행동을 본다. 물론 우리의 렌즈를 통해서다. 자연이 아니다. 렌즈다. 우리의 렌즈가 내게 뭐라고 하는지 먼저 보아야 한다. 뿌연 세상도 뿌연 렌즈로 통한 맑은 세상일 수 있다. 물론 맑은 렌즈를 통해 본 뿌연 세상일 수도 있다. 그 차이를 가르는 것, 그게 무언지를 이 영화는 진실로 말하려 하는지 모를 일이다. 깨끗함을 아는 듯 구는 뿌연 사람들의 우화를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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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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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못 버는 30대 시인이 애인 부모 집에서 겪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