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장면 이후 우리 사회는] 영화, 방송, 책등 작품 속 한 장면을 통해, 오늘의 사회적 장면과 감정의 흐름을 살펴봅니다.[기자말] |
관리비, 카드값, 보험료. 매달 청구서가 날아온다. 순서는 달라도 결론은 비슷하다. 이번 달도 어딘가가 모자란다. 초능력이 생기면 달라질까.
손경훈(최대훈)이 "당신은 내가 무슨 일을 당해도 무섭지 않아?"라고 묻자, 아내 문미희(정연)가 답한다. "난 있죠. 우리 청이 학원비 밀리는 게 더 무서워. 가게 보증금 올려 달라는 말이 훨씬 더 무섭다고."
남편 경훈은 초능력자다. 세상을 위협하는 빌런과 맞서 싸우고 있다. 그런데 아내가 더 두려워하는 것은 악당도, 종말도 아니다. 아이 학원비와 가게 보증금이다. 세상을 구하는 일보다 다음 달 월세를 걱정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사람들. 우리는 이미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
넷플릭스 시리즈 <원더풀스>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1999년 세기말. Y2K 공포와 종말론이 떠돌던 해성시. 시한부 인생을 살던 은채니(박은빈), 동네 민원꾼 손경훈(최대훈), 동네북 강로빈(임성재)은 우연한 사건을 통해 초능력을 얻게 된다. 언뜻 보면 평범한 초능력 히어로물처럼 보이지만, 이 드라마가 관심을 두는 것은 초능력 자체가 아니다. 초능력이 생겨도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청구서는 어김없이 날아온다.
초능력보다 무서운 것들
▲원더풀스공식예고편
넷플릭스
보통의 히어로물이라면 여기서 인생이 바뀐다. 특별한 능력은 새로운 운명을 의미한다. 하지만 <원더풀스>는 다르다. 채니는 초능력을 얻고도 여전히 불안하다. 경훈의 가게는 여전히 팍팍하고, 로빈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무시당한다. 초능력은 생겼지만 삶의 청구서는 그대로 날아온다. 빌런보다 먼저, 그리고 훨씬 정확하게.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사회는 전세사기와 고물가, 주거 불안을 겪었다. 청년들은 취업보다 월세를 걱정하고, 중장년층은 은퇴보다 생계를 걱정한다. 열심히 살아도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 노력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는 무력감은 우리 시대의 공기가 됐다.
<원더풀스>는 그 공기를 판타지 속으로 끌고 들어온다. 초능력이 생겼는데도 보증금은 오른다. 이 단순한 사실이야말로 이 드라마가 가진 가장 현실적인 설정이다.
기적은 왔지만...
▲원더풀스공식예고편
넷플릭스
<원더풀스>가 더 흥미로운 이유는 따로 있다. 인물들은 초능력을 얻고도 환호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은 난 좀 초능력한테 미안할 정도지"라고 강로빈은 말한다. 보통 사람들은 기적을 바라지, 기적에게 미안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로빈은 초능력을 의심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을 의심한다.
"좀 더 근사한 사람한테 생겼으면 멋있게 사용하고 사람들도 구하고 막 그랬을 텐데"라며 그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능력을 가질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채니 역시 마찬가지다. 빌런 하원도(손현주)는 수술대에 누운 그녀에게 말한다.
"넌 그 심장을 가질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채니는 그 말에 눈물을 흘린다. 그 말이 충격적이어서가 아니다. 어쩌면 이미 오래전부터 자기 안에서 반복되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이야기지만, 이상하게도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들린다. 좋은 기회가 와도 먼저 자신을 의심한다. "내가 이 자리에 있어도 되나." "나 같은 사람이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종종 기회를 얻지 못해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기회가 왔을 때조차 그것을 자기 몫으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괴롭다. 로빈이 초능력 앞에서 느낀 미안함은 그래서 우스운 대사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독백처럼 들린다.
드라마에는 짧지만 오래 남는 장면이 하나 있다. 이운정(차은우)은 우연히 채니의 버킷리스트를 발견한다. 킬리만자로 등반하기, 오로라 보러 가기, 좋아하는 밴드 내한 공연 보기 등. 평범한 청춘이라면 한 번쯤 적어볼 법한 소망들이다. 그런데 마지막 항목이 눈에 걸린다. "서른 살 넘기기."
채니에게 기적은 부자가 되는 것도, 세상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서른 살까지 살아보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날 많은 청년들이 처한 현실과도 닮아 있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꿈보다 지금의 삶을 무사히 버텨내는 일이 먼저 과제가 된 시대. 그래서 사람들은 기적을 기다리면서도 그것을 거창하게 상상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찾아온 기회 앞에서도 우리는 먼저 자신을 의심한다. 그것이 정말 내 몫인지, 내가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인지. 자격을 의심하는 목소리는 바깥보다 먼저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없다
▲원더풀스공식예고편넷플릭스
"내가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채니는 마침내 반문한다. 그리고 스스로 답한다.
"난 우리 할머니 세상의 전부고, 로빈이 단 하나밖에 없는 친구고, 경훈 아저씨 아드레날린인데."
이 장면이 중요한 이유는 채니가 초능력을 완벽하게 다루게 돼서가 아니다.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되었기 때문도 아니다. 그녀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생각해 보면 이 드라마의 인물들이 가장 힘들어했던 것은 초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로빈은 초능력에게 미안해했고, 채니는 자신이 심장을 가질 자격이 있는지 의심했다. 그들이 싸워야 했던 상대는 빌런만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무가치감이었다.
"다른 사람이 있다. 조금 늦은 사람도 있다. 애초에 한가한 언저리 쪽이 좋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결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없다."
끊임없이 자격을 증명해야 하는 시대에, 채니는 다른 답을 내놓는다. 사람의 가치는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냈는가가 아니라 누구의 곁에 남아 있는가에서 비롯된다고. 할머니의 세상이고, 로빈의 친구이고, 경훈의 아드레날린이라는 사실. 수치로 환산되지 않는 것들이지만, 어쩌면 삶을 가장 오래 지탱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문제는 기적이 부족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기적이 와도 그것이 자신의 몫인지부터 의심하게 되는 것. <원더풀스>가 끝내 응시하는 것은 바로 그 마음이다.
초능력이 생겼는데도 보증금은 오른다. 그래도 누군가는 누군가의 세상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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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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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날아오는 청구서... 초능력 생기면 바꾸고 싶은 한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