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환상> 스틸
일미디어
대지주와 토착 귀족은 사태 추이를 살피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의 대리인은 마피아 보스다. 그들은 오르시니에게 자신들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으면 협조할 수 없다며 은근히 협박한다. 지역 기득권 세력이 원하는 건 자신들의 지배력, 즉 대농장 소작농 체계와 자원 독점 및 정치적 발언권 유지다. 하지만 오르시니 입장에선 혁명의 대의를 부정하고 군주만 바뀔 뿐이다. 단호히 유혹을 거부하자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듯 비협조로 일관한다.
정규군이 아닌 의용군 집단에게 지역 사회의 지지와 군수 지원은 사활이 걸린 문제다. 이게 난관에 봉착한 것. 오르시니의 부대는 보급도 부상자 치료도 힘들다. 하지만 토호들이 무지렁이 농민이라 비웃으며 노예처럼 대하던 가난한 주민들은 오히려 희생을 무릅쓰고 의용군을 돕는다. 물론 부르본 군대는 보복으로 잔혹한 파괴와 학살을 일삼는다. 게릴라전에 대처하는 정부군의 주된 전술이다. 공포를 불러와 의용군을 돕지 못하게 막는 것. 전세가 불리해진다.
의용군 내에도 동요가 일어난다. 혁명 동참은 핑계에 불과할 뿐, 그저 고향에 돌아갈 여비 아끼려던 사기꾼 도메니코 트리코와 로사리오 스피탈레 콤비 역시 전투에 겁을 먹고 탈영했다가 잡혀온다. 다행히 용서를 받지만, 열정에 불 탄 동료와 주민들의 헌신에 감화된 둘은 알토란 같은 활약을 펼치기 시작한다. 진심으로 아군을 돕고 주민을 구하려는 열망은 복잡한 정치적 계산에 발목 잡힌 의용군에게 뜻하지 않는 활로를 연다. 숱한 위기를 그렇게 넘길 수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주민들의 헌신적 원조로 목표 달성이 목전에 닿은 시점, 하지만 그들이 유인한 적의 대군이 분풀이로 마을을 초토화할 위협에 놓인다. 의용군은 빠져나가면 되지만, '무방비도시' 선언해도 패배에 눈 뒤집힌 정부군이 주민을 학살하는 건 막을 수 없다. 발만 동동 구르던 오르시니는 기이한 장면을 목격한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과감한 상상력이 발휘된다. 겁쟁이 사기꾼이라도 본성이 선량하고 대의에 감화된 이들은 놀라운 과업을 해낼 수 있다.
빛바랜 이상을 소환하는 역사 바로세우기 현장
▲<위대한 환상> 스틸일미디어
영화는 이탈리아 통일의 가장 찬란한 순간에 가린 이면을 흥미롭게 재구성한다. 민중 해방이 진정 구현되어야 국가의 통일도 의미를 얻는다는 오르시니의 신념은 '대의명분' 앞에서 위기에 처한 상태다. 가리발디의 혁명군 내부에서도 '현실론'을 내세우며 기득권층과 타협해야 한다는 의견이 득세한 상태다. 강철 같던 불굴의 혁명가도 점점 대세를 따라야 한다는 강요에 내몰린다. 승리와 위기가 동시에 밀려든다.
실제 역사에서 가리발디는 자신이 정복한 양시칠리아왕국을 통째로 사르데냐왕국에 헌납한다. 국민투표를 통해 통합된 북부와 남부는 현대 이탈리아 통일국가의 기본 형태를 완성한다. 세계사 교과서에 수록된 그대로다. 가리발디는 '해방자'의 상징으로 20세기 체 게바라를 능가하는 명성을 누린다. 오르시니 역시 통일의 원훈으로 존경과 명예를 얻었다. 하지만 그들을 목숨 바쳐 돕던 시칠리아의 가난한 농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제 '배반당한 혁명'의 차례다.
영화 초반 의용군은 해방시킨 마을마다 대지주가 독점한 토지 재분배, 과중한 세금 철폐와 시칠리아의 자치권을 약속한다. 농민들은 박수치며 환호하지만, 맨 앞줄에 자리한 기득권 집단은 안색이 변한다.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속에서 묘사되듯, 외세를 내쫓기 위한 민족해방 투쟁에서 군자금을 원조하는 지주와 사업가의 착취를 눈감아주듯, 그들은 혁명 수뇌부를 회유하려 한다. 오르시니는 그에 맞서는 혁명의 양심이지만, 한계는 예정되어 있다.
토지개혁 약속을 믿고 호응한 농민들은 외려 지역 토호와 결탁한 탄압에 희생된다. 북부 도시 중산층은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얻지만, 남부 소작농 처지는 통일 전이나 후나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산업화에 동원되며 남북간 격차 심화, 대농장과 마피아의 지배구조만 확대 강화된다. 근대적 시민으로 나아가지 못한 시칠리아 빈민은 여전히 전근대적 차별과 실질적 계급사회에 머문다. 현대 이탈리아 남부 문제는 영영 해결될 기회를 상실한다.
이탈리아 '독립군영화'로 배우는 타산지석
제목 '위대한 환상'은 가리발디로 상징되던 통일의 기대, 당시 민중들이 꿈꾸던 실질적 평등과 재분배 열망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던 상황을 통렬하게 비꼰다. 전쟁이 끝나고 은퇴한 오르시니가 20년 후 우연히 발견한 역설이 신랄하게 묘사된다. 피를 흘리며 목숨 바친 투사들의 빈자리에 남은 빛바랜 영광은 양차 세계대전 참상과 제국주의 흑역사, 파시즘의 득세를 불러왔다. 무엇보다 여전히 이탈리아를 괴롭히는 '남북문제'의 기원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오랜만에 만나는 '독립군영화'는 민중사적 관점에서 자국 통일을 빛나는 신화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과거에 대한 논쟁으로 구체화한다. 1860년 시대상을 공들여 재연한 아름다운 시칠리아 풍광에 눈호강하다가도 일제강점기부터 해방전후에 이르는 우리의 현대사와 겹치는 대목에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명배우 토니 세르빌로와 코미디 콤비 살바토레 피카라&발렌티노 피코네의 앙상블은 묘한 유머감각과 역사의 감흥을 동시에 제시한다.
<작품정보>
위대한 환상
THE ILLUSION
2025 이탈리아 드라마, 역사, 전쟁
2026.06.10. 개봉 133분 17초 12세 관람가
감독 로베르토 안도
주연 토니 세르빌로, 살바토레 피카라, 발렌티노 피코네
수입/배급 일미디어(IL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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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