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가 이런 실험을? 초점 나간 카메라 고집한 이유

[김성호의 씨네만세 1363] 홍상수 전작전 <물안에서>

감독 홍상수가 2023년 들어 제주도에서 영화를 찍은 건 예고된 일이겠다. 전작 <탑>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감독의 페르소나라 해도 좋을 영화감독 병수(권해효 분)는, 옥상에서 신을 보았는데 그 신이 자신에게 제주도에서 영화를 찍으라 했다고 이야기했다. 영화와 실제 삶을 묘하게 엮어내는 홍상수 특유의 작법을 고려하자면 그다음 작품이 제주에서 만들어질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이듬해 나온 <물안에서>는 홍상수의 29번째 장편영화다. 신석호, 하성국, 김승윤 등 홍상수 영화에 꾸준히 출연해 온 젊은 배우들을 추려 제주도에서 영화를 찍으려는 젊은 영화인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간 예술가이자 자연인인 저 자신을 투영한 장년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낸 홍상수가 저보다 마흔 살쯤은 족히 아래일 청년들을 앞세웠다는 점에서 필모그래피에서 특별한 지점을 점하고 있다.

러닝타임 61분, 한 시간을 조금 넘는 짧은 영화다. 홍상수는 이 작품에서 다분히 실험적 시도를 감행한다. 우선 눈에 띄는 건 초점이다. 영화 내내 카메라의 초점이 나가 있어 관객의 눈에 피사체들이 뿌옇게 비친다. 소리는 명확하게 들리지만 인물과 사물의 경계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초점 나간 화면 탓으로 눈이 금세 무디고 피로해진다. 종합예술이라지만 시각에 가장 크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영화가 스스로를 제약하는 선택을 취한 이유가 무엇일까. <물안에서>를 보는 일은 그 답을 찾아가는 일과 다르지 않다.

물안에서 스틸컷
물안에서스틸컷한국영상자료원

제주서 300만 원으로 영화 찍는 세 청년

앞서 적었듯 젊은 영화인의 영화 찍기 이야기다. 감독, 화가, 시인, 소설가 등 창작하는 이를 전면에 내세우길 즐기는 홍상수가 이번에도 감독과 배우를 카메라 앞에 세운다. 친구로 보이는 두 남자와 같은 학교 후배인 여자, 이들 셋이 한자리에 모였다. 성모(신석호 분)가 감독으로, 제 영화를 찍기 위해 그간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300만 원을 탈탈 털어 썼다고. 그러나 영화 한 편 찍는 데 300만 원은 턱없이 적은 액수다. 상국(하성국 분)과 남희(김승윤 분)에게 제대로 된 보상이 돌아갈 리 없다. 젊은 예술가들이 필히 마주하는 우정출연과 열정페이 사이에서 이들은 한 편의 제대로 된 작품을 찍어보자고 모인 것이다.

문제는 시나리오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상국에겐 사전에 기본적인 이야기 얼개를 말해둔 모양인데, 막상 제주도에 오고 나니 그를 찍을 생각이 사라졌다고. 그래서 셋은 제주도 각지를 오가며 성모에게 영감이 될 것을 찾아 나선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대개 그렇듯, 서사가 중요하지 않다. 기승전결을 말하자면 제주에 온 젊은 영화인들이 영화를 찍으려 노력하다 마침내 영화를 찍는다, 이 정도에 불과하다. 정말 중요한 건 과정이다. 무얼 찍어야겠다고 제 가진 모든 걸 내놓은 감독은 그러나 무얼 찍어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를 돕겠다고 모인 이들은, 그러나 창작의 불안과 고통만큼은 대신 감당해 줄 수 없다. 영감이 저를 찾아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걸까. 억지로 무얼 만들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과, 어떻게든 찍어내야 하는 진짜를 발견하고자 헤매는 수고가 이 영화 안에 담겼다. 말하자면 청년 감독의 모습과 카메라 뒤에 선 홍상수의 자세가 얼마 다르지 않을 테다.

물안에서 스틸컷
물안에서스틸컷한국영상자료원

홍상수 영화가 나아가는 길 끝

영화 내내 찍을 것을 찾아다니는 성모다. 찍을 것과 찍지 않아야 할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을 그는 갖췄다. 다만 찍을 것을 만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세상을 오가며 진짜를 마주해야 한다. 그는 고난의 길이고 또 불안의 길이기도 하다. 이는 그대로 영화 속 성모가 찍는 영화를 통해 확인된다. 영화 속 영화는 크게 두 가지 시퀀스로 알 수 있는데, 남희가 연기하는 여자는 실제로 성모가 바닷가에서 만났던 쓰레기를 줍는 주민이다. 성모가 어째서 쓰레기를 줍느냐 묻자 그녀는 해안이 너무 더럽다며 때때로 시간이 나면 바닷가에 와서 쓰레기를 줍는다고 말한다. 전작 <탑>에서 온종일 그림을 그리던 화가의 삶에 동경을 감추지 않던 감독이다. 의미 있는 것에 삶을 바치고 싶다던 각오는 바닷가에서 쓰레기를 줍는 어느 여인의 모습을 재현해 카메라 안에 담는 선택으로 화한다.

다음은 영화의 끝에 자리한 상국이다. 그는 바다로 걸어 들어가서 마침내 물안으로 사라진다. 성모는 어째서 그 모습을 영화 안에 담아냈을까. 발 딛고 선 육지로부터 저 멀리 닿지 않는 땅으로 나아가다 마침내 사라지는 것을 진짜 삶이라 여기는 것일까. 저 너머를 향한 도전, 마침내 스러지고 말 도전일지라도 끝없이 나아가는 것이 범인의 일상보다 낫다는 판단일까. 지난 몇 작품을 통해 의미와 가치, 세상이 구하는 바가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과 판단에 의한 진짜 삶을 향하겠다 선언해 온 홍상수의 영화가 <물안에서>에 이르러선 나아가다 사라지는 사내의 뒷모습으로 끝마쳐진다. 그는 그대로 영화와 삶을 대하는 감독 성모의 자세이자, 홍상수의 의지가 아닐까.

홍상수의 영화가 늘 그러했듯, 대단하진 않아도 더 진실해지려 하는 수고가 읽히는 작품이다. 철학과 사상이 닿은 적 없는 경지까지 진입하진 못하더라도 작가가 스스로 삶 가운데 캐낸 진실만을 담아내겠다는 의지만큼은 존중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달리 보자면 이번 영화도 그렇고 그런 홍상수 영화 가운데 한 편일 뿐이다. 서사는 새로울 것 없는 수준을 넘어 지루하기만 하고, 담긴 철학 또한 익히 존재하는 흔한 지점에서 얼마 나아가지 못한다. 영화로부터 탁월함과 훌륭함을 기대하는 관객은 무얼 얻을 수 있을까. 감히 입을 열기가 어렵다.

물안에서 스틸컷
물안에서스틸컷한국영상자료원

초점 나간 카메라가 정말로 조준하는 것

차별점이라면 역시 '어째서 초점 없는 화면이어야 했느냐'는 물음으로부터 얻을 수 있겠다. 그의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들던 전격적 실험을 그는 <물안에서>의 러닝타임 내내 감행한다. 관객으로 하여금 초점 나간 영상을 보도록 하는 건 불편을 감당하도록 하는 일이다. 극적 사건이 부재하고 서사가 취약한 영화에서 심지어 이와 같은 불편까지 감당케 한다면 남아날 관객은 얼마 되지 않을 테다. 그럼에도 홍상수는 이를 감행한다. 반드시 구하고자 하는 바가 있었다는 뜻이겠다.

초점이 흐려지면 경계가 사라진다. 초점이 명확할수록 나와 너를 구분하는 경계가 드러나고, 초점이 흐려지면 그 경계 또한 무너진다. 나와 너의 구분이 흩어진다는 건 내 안에 네가 담기고, 네 안에 내가 담길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명확하다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으리란 주저 또한 싹튼다.

물 안에서 바라본 세상은 빛의 굴절로 실재하는 세계를 왜곡한다. 그러나 그 왜곡조차 물고기에겐 진실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우리가 물 안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다. 고작 초점 하나 흐리게 하는 것으로써 우리는 카메라 너머 세계를 또한 왜곡해 이해한다. 그러고 보면 카메라란 물과 물 너머의 세계처럼 진실을 왜곡한다. 경계를 잘못 짓도록 한다. 오해를 생성한다.

홍상수 전작전 포스터
홍상수 전작전포스터한국영상자료원

누가 감히 물안에서 물밖을 판단하려는가

세상에 카메라 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이는 또한 얼마나 많은가 떠올린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야기는 관객의 판단을 이끈다. 성모와 상국과 남희는 얼마나 서로를 알고 있을까. 서로에게 얼마만큼 진실할까. 섣부른 판단을 이끄는 여러 순간이 영화 가운데 일어난다. 그 소소하고,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는 문제들을 누군가는 봉합하고 누군가는 벌린다. 그중 무엇이 더 진실할까를 고심하는 작업은 중하지만 좀처럼 이뤄지지 않는다.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도 그러한데 스크린 너머 배우들을 보고 있는 우리의 판단은 또 어떨까. 신문과 TV, 허접하기 짝이 없는 기자와 작가의 창을 통해 접하는 이야기는 더욱 민망한 결론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영화 안에 담을 것과 담지 않을 것을 구분하는 일은 그래서 어렵고 중하다. 무엇이 진실로 진실한지를 찾아가는 과정이란 수많은 의심과 검증, 돌아봄을 통해 겨우 닿을 수 있는 일이다. 그걸 해내는 일이란 가치가 있고, 삶과 돈과 수고를 바칠 만하다고 어떤 이들은 믿고 있다. 영화 속 성모와 영화 바깥 홍상수 같은, 예술가들이다.

<물안에서>는 진짜를 구하는 작가의 수고로움을 스크린 너머 뿌옇게 흐린 화면으로 바라보도록 강제한다. 물 안에 놓인 건 관객인 우리이고, 물 밖 진짜 세상에서 선명하게 살아 숨쉬는 건 저들이다. 그렇다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가 감히 판단의 주체라 쉬이 주장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홍상수전작전 한국영상자료원 물안에서 홍상수 김성호의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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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