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만옥'은 서울에서 작은 바를 운영하는 중년의 레즈비언이다. 하지만 장사도 신통하지 않고 동생처럼 챙기던 후배들과도 불화가 생긴다. 오랜 연인과도 괜히 거리를 두고 싶다. 가게를 정리한 만옥은 고향인 충청도 이반리로 돌아온다. 노모가 돌아가시며 그녀에게 남긴 시골집이 유일한 보금자리가 될 터이다. 하지만 고향엔 전남편이 이장으로 버티고 가족들도 오랜만에 돌아온 만옥을 환영하는 눈치는 없다.
그래도 고향에서 새로 출발하려 이웃들과 친목도 도모하며 아등바등하지만, 이장의 횡포는 번번이 만옥의 발목을 잡는다. 발끈한 그녀는 다가올 이장선거에 출마를 결심하고 선거운동을 개시한다. 원체 명랑하고 추진력도 좋아서 은근히 바람을 일으키는 전처에게 당황한 전남편은 급기야 감춰온 만옥의 비밀을 폭로하고 만다. 지지하던 이들도 더 상처를 겪기 전에 그만두자 하지만, 배수진을 친 만옥은 포기할 생각이 없다.
도시의 퀴어, 커뮤니티 내부의 세대차이 형상화
▲<이반리 장만옥> 스틸
인디스토리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만옥이 그동안 어렵게 구축해온 삶의 기반은 허물어지는 중이다.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하며 원래 가족과 의절하다시피 떠난 그녀는 충청도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바를 운영한다. 퀴어 커뮤니티에서 만옥이 운영하는 가게는 단순한 술집을 초월하는 공동체의 구심이자 회합 장소로 기능한다. 자신의 과거를 보는 것 같은 어린 후배들과 어울리며 후원자이자 '큰언니' 노릇에 늘 바쁘지만, 그래도 즐겁다. 하지만 시련이 닥친다.
어느새 가게에 드나들던 이들은 좀 더 서비스 좋고 세련된 경쟁 가게로 슬그머니 발걸음을 옮긴다. 커뮤니티 만남 공간으로서 위상이 흔들리게 된 것. 1년에 한 번 열리는 퀴어문화축제 뒤풀이 대관은 만옥의 가게가 갖는 위상 확인과 더불어 근근히 운영하는 바의 수익 측면에서도 버팀목 같은 이벤트다. 당연히 올해도 의리로 행사를 준비하던 만옥에게 행사 기획자들은 미안하지만, 이번엔 다른 가게와 제휴하겠다고 선을 긋는다. 배신감을 느끼는 만옥이다.
급기야 술김에 한바탕 속에 맺힌 설움을 쏟아내다 크게 분란을 일으킨 만옥은 자신의 현재 처지를 깨닫고 만다. 하늘이 무너진 기분, 더는 설 자리가 없다는 좌절감이 그녀를 휩싼다. 게다가 연인과의 관계도 예전보다 식은 것만 같다. 그야말로 '만옥의 세계'가 무너진 격이다. 서울살이에 오만 정 다 떨어진 그녀는 무작정 고향으로 향한다. 냉대와 찬밥 신세는 각오한 상태다. 모든 기반을 포기하고 새로 쌓은 퀴어로서 존재가치가 부정당한 기분은 메울 수 없다.
어찌 보면 만옥이 고향 이반리로 귀향하게 되는 배경이 가장 눈에 들어오는 대목이다. 그동안 외부의 무지와 배격에 힘을 합쳐 '반지원정대'를 결성해야만 생존할 수 있던 조건 탓에 퀴어 당사자 개인 사이 이견과 갈등은 종종 영화 속에서 목격해도 커뮤니티 내부의 구도나 세대 간 소통 문제가 수면 위로 공개된 적은 드물기 때문이다. 좀 숨기고픈 단면까지 영화는 제법 구체적인 상황으로 묘사한다. 저기도 사람 사는 동네라 바람 잘 날 없구나 깨달음과 더불어.
보기 드문 농촌-중장년-퀴어 조합의 이색적 면모
▲<이반리 장만옥> 스틸
인디스토리
적어도 한국 독립영화에서 사회 일각의 혐오와 배제와는 달리 '퀴어'가 당당히 일각을 차지하며 확장 일로다. 매년 전국 영화제에서 목격되는 해당 작품들은 나날이 다양한 경향으로 확산하며 경계를 넓히는 중이다. 도시생활자, 부모에게서 독립한 20·30대 위주에서 점차 청소년, 중장년 당사자를 다루거나, 다양한 삶의 단면을 포착하려 한다. 대상은 물론 공간과 배경도 변주를 거듭한다. 한국뿐 아니라 해외도 독립영화 흐름을 주도하는 면모는 별반 다르지 않다.
다양한 작업을 해마다 목격하지만, <이반리 장만옥>은 호불호 평가를 떠나 지금껏 쉽게 접하기 힘들었던 독특한 결의 작품이다. 극영화 형식으로 해당 소재를 다룰 땐 대개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소외되고 차별을 겪는 퀴어 당사자의 수난사를 사실적으로 그리거나, 작은 위로의 메시지를 담아 긍정적 기운을 전하는 부류로 구분되는 편이다. 이 작품은 후자에 가깝지만, 조금 더 해당 경향을 깊숙하게 밀어붙인다. 그 결과는 여지껏 보기 드문 차원으로 향한다.
앞서 소개했듯 만옥은 스스로 갈 데가 없다고 여긴다. 이미 한 차례 모든 걸 내려놓고 쫓겨나듯 고향을 떠난 그다. 피해를 감수하고 가족과 연 끊다시피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려 했건만, 배신당한 기분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이대로 가라앉기엔 아직 살 날도 많이 남았고, 어쨌듯 낡은 시골집이나마 자가도 있다. 그녀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보려 한다. 커뮤니티의 구심으로 활약하던 만옥에게 시골 마을 주민들과 친화력 구축은 늘 하던 일상의 연장일 뿐.
떨떠름한 표정 못 숨긴 일가친척과 대면하고 부모 제사 함께 치르며 이야기는 만옥의 이곳에서 과거를 소환한다. 번듯한 이장 마누라로 행세하며 살다가 갑자기 바람이 난 돈키호테 캐릭터로만 보이던 그녀가 겪었던 가부장제 치하의 막내딸이 겪었던 성장기, 가족 내에서 서열 등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전남편이 새로 꾸린 가족, 이장인 그가 휘두르는 관성적 미시권력, 지방의 소멸 위기와 일손 부족, 애매한 귀농/귀촌 청년들의 상황 등이 다채롭다.
이장선거로 지역을 바꿀 수 있을까? 도전의 단계
▲<이반리 장만옥> 스틸
인디스토리
여전히 남성 위주 전근대적 질서가 팽배한 듯하지만, 작은 동네에도 변화의 바람은 분다. 백사장 모래 속 동전처럼 점점이 산재한 미래의 퀴어들이 발견되고, 논두렁 기득권 지배질서와 균열이 사방에 틈새를 만든다. 그저 조용하게 고향에 재정착하고 싶었던 것뿐이지만, 성질 죽이고 살려 해도 그냥 놔두지 않는 전남편의 횡포, 우연히 목격한 학원폭력과 혐오에 분개한 그녀는 자연스레 내가 여기 살려면 동네를 개조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는다. 실행만 남았다.
마침 현 이장의 서슬에 눌려 있던 이웃들의 불만도 잠복해 있던 참, 졸지에 전남편 vs 전부인 경선 구도다. 한 번 바꿔보자 구호와 혈연과 지연이란 한국 사회 고유 네트워크 활용 덕분에 만옥은 다크호스로 현 이장을 긴장시킨다. 하지만 그녀의 과거를 잘 모르던 이들은 그저 열심히 일 잘할 것 같은 여자 이장이 수용력의 한계다. 경쟁자가 터뜨린 충격적인 사실은 선거 승부를 걱정하긴커녕, 이반리에 계속 살 수 있을지도 고민에 잠기게 만들 만큼 파괴적이다.
퀴어라는 게 들통이 나 버렸다. 대도시라면 조용히 그들만의 은밀한 커뮤니티를 구축해 은신하듯 살면 된다. 그러나 여긴 옆집 숟가락 개수까지 다 훤한 작은 동네다. 이주한 후 친분을 다져온 친지나 옛 친구들도 어떻게 만옥을 대할지 전전긍긍한다. 이쯤 되면 다 접고 떠나는 게 보편적 결론일 텐데, 집념 하나는 세계챔피언급인 만옥은 정체성을 밝히며 정면승부를 건다. 이제 이장선거는 마을의 질서를 전복하려는 '막대 구부리기'의 장으로 탈바꿈한다.
'내가 퀴어인 게 어때서?' 선거판이 커진다. 요즘 동네 이장 할 사람 없어 난리라는데 보기 드문 진풍경이 이반리에 펼쳐지는 셈이다. 사방에서 관심과 함께 엉뚱한 이들의 참전이 줄을 잇는다. 여기서부터 <이반리 장만옥>은 판타지와 코미디를 오가며 다양한 장르와 결합한 (국내 창작환경에선) 전대미문의 혼종 우화를 무한마법진으로 전개하기 시작한다. 만옥의 결사적인 선거투쟁 든든한 조력자가 곳곳에서 모인다. 여성은 여성을, 퀴어는 퀴어를 돕는다.
백래시 시대를 우회하고픈 판타지 우화의 풍경
▲<이반리 장만옥> 스틸인디스토리
물론 '혐오세력'도 소문 듣고 몰려들게 마련. 국내 퀴어 관련 행사마다 반복되는 치열한 대결 구도가 조그만 시골 마을 곳곳에서 펼쳐진다.
이제 만옥은 원래 차지했어야 할 왕좌로 귀환하는 영웅 서사의 주인공으로 등극한다. 조화롭게 그녀를 보좌하는 조역과 오해를 풀고 위기에 처한 원정대를 돕기 위한 원군이 도착한다. 극적 승리와 변화의 기대가 화면 가득 퍼져나간다. <이반리 장만옥>은 뉴스 보면 답답하고 불투명한 미래에 낙담할 현실 퀴어 당사자들에게 한 판 신명 나는 춤판을 제공하고자 한다. 영화 초반 보여준 현실의 복잡한 단면은 휘발하고 현실에서 보지 못한 승리적 기운이 넘실댄다.
겉으로 뵈는 현상 이면에 주목하며 기존 질서의 대안 및 전복을 추구하는 독립영화에선 상업영화나 드라마에서 대동소이하게 형상화한 영웅 캐릭터를 비틀거나 평범한 이들의 용기와 결단을 조명하는 방향으로 기울게 마련이다. 공감이 가는 섬세한 연출에 경탄하지만, 종종 그저 보고 싶은 풍경, 기운 나는 부흥의 순간을 화면에서 잔뜩 누리고 싶긴 하다. <이반리 장만옥> 제작진은 자신도 꿈에서 그리던 21세기 대한민국판 '율도국'을 화면에 구현하려 시도한다.
그런 영화의 속성은 종래 한국 독립영화의 사회적 사실주의와는 퍽 다른 결로 드러난다. 마치 미국 소수자 커뮤니티 내수용도로 제작되는 장르영화 보는 기분이다. 이들은 사회적 담론 확장이나 대안 언론 역할을 모색하는 게 1차 목표가 아니다. 영화를 소화할 준비와 공감대가 형성된 집단의 수요에 맞춘 오락성이 중심이다. 흑인 하위문화에 천착한 시트콤이나 블랙스플로테이션 작품을 떠올리면 된다. 히스패닉이나 아시안-아메리칸 대상으로도 형성된 경향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 묘한 기분이 든다. 만옥이 간절히 바라듯 "친구면 걱정도 좋지만, 응원을 좀 해줘" 정서, 즉 지치고 힘겨울 때 논쟁이나 비판 대신 위로와 치유를 기대하는 심리가 <이반리 장만옥>의 본질적 태도다. 그 정서가 기나긴 사회적 변화를 추동하기 위한 도전에서 우선순위가 되는 게 합당할까? 고민이 꼬리를 물고 퍼지는 한편, 지친 당사자들에게 이 영화가 여름철 빙수 같은 짜릿함을 제공함도 부정할 수 없다. 암튼 새로운 유형의 LGBT 작품이다.
<작품정보>
이반리 장만옥
Manok
2025 한국 퀴얼업 명랑 코미디, 코믹 명랑 부스터
2026.06.10. 개봉 108분 12세 관람가
감독/각본 이유진
출연 양말복, 성재윤, 박완규, 김정영, 색자
제작 언커먼픽쳐스
배급 ㈜인디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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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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