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나는 살며 몇 번쯤 아름다움이란 것을 보았는데, 그 아름다움은 내가 기대하지 않은 곳에 있을 때가 많았다. 오늘 이 글을 쓰기 전에 나는 아름다움이란 말을 딱 한 번 썼다. 그건 내가 가장 최근에 본 아름다움이기도 하였는데, 이순신 장군의 자취를 쫓는 벌써 수년을 이어온 프로젝트를 위해 전라남도 보성의 '열선루'에 오른 것과 관련한 글을 쓰면서였다. 그날 이순신의 가장 유명한 글, 그러니까 '금신전선 상유십이,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전선이 있습니다'란 문장이 든 그 장계를 생각하였다.
사람들은 이 장계에서 위의 여덟 글자를 가장 중하게 여기고 기억한다. 보성군이 이 글자만 따로 뽑아 누각 앞 비탈에도 조형물로 박아두고, 누각 현판으로도 써 걸어두고, 급기야 동상에도 붓글씨 형상으로 새겨둔 것이 그래서일 테다. 그러나 나는 열선루에선 도무지 찾을 길 없는 그 다음 문장들을 떠올린다. 모함으로 고문을 당하고 기만과 항명의 죄를 벗지 못한 채 백의종군한 장군이 처음 받은 장계에서 적은 전에 없던 문장들 말이다. 위 여덟자 다음에 그는 '금약전폐주사 今若全廢舟師', '지금 수군을 없애면'이라 왕명을 그대로 적은 뒤 벌어질 참극을 묘사한다. 그리고 다시 '신불사 臣不死', '신이 죽지 않으면'이란 단서를 단 희망을 적는다. 왕이 장계 가운데 적힌 전에 없던 문장을 어찌 읽었을까. 장군의 운명이 이로부터 정해졌음을 나는 이해한다.
금약전폐주사, 그리고 신불사. 이 적막하고 고독한 문장들로부터 나는 기대한 적 없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들 문장에 깃든 각오, 치러야 할 무게, 그로부터 얻어내고 감당하려는 것이 무언지 아는 까닭이겠다. 세상 많은 아름다움은 이처럼 당혹스러운 곳으로부터 온다.
▲당신 얼굴 앞에서스틸컷
한국영상자료원
기대한 적 없는, 당혹스런 아름다움
홍상수 감독의 26번째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는 이와 같은 아름다움을 말한다. 주인공 상옥(이혜영 분)은 젊어 죽기로 결심한 때가 있었다. 진심이었다. 콱 죽어버리기로 결심하고 서울역 앞을 걸었던 날이 있었다. 그런데 그날 아름다움을 보았다고 했다. 저를 구한 아름다움은 이전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아니, 수도 없이 보았으나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바로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상옥은 저를 캐스팅하려 약속을 청한 감독 재원(권해효 분)에게 그 얼굴에 깃들었던 아름다움을, 아니, 아름다움을 본 순간을 이야기한다. 아름다움이란 말로써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서다. 그리하여 상옥이 말하는 것을 여기 적자면 이러하다. 사람들의 얼굴이 그렇게 아름답더라고. 그러니까 어느 중년의 아저씨가 저쪽에서 이쪽으로 걸어왔는데, 그 남루한, 기름때 묻어 있는 얼굴이 그렇게도 깨끗하고 아름다웠다고 했다. 어찌나 그러했는지 아주 핥아줄 수도 있겠더라는 것이다. 전혀 기대하지도, 있을 법하지도 않은 곳에서 아름다움을 마주한 경험이 그렇게 문득 저를 찾아왔다고. 대체 얼마나 아름다워야 사람은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핥아줄 수 있는 것일까. 그런 경험은 해본 이만이 안다. 그래서 상옥은 재원이 이해할 수 없으리라고 말한다. 재원은 결국 수긍한다. 아름다움을 본 적 있는 이도, 본 적 없는 이도 모두가 수긍하고 말 순간이다.
<당신 얼굴 앞에서>는 홍상수의 여러 영화 가운데서도 특별한 자리를 점한다. 이를테면 오늘의 <나는 솔로> 류의 적나라한 남과 여의 관계 맺음을 다루는 프로그램을 보는 듯했던 작품들, 또 혹자는 자기변명이라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성찰이라 하며 누군가는 삶의 진실한 투영이라 한 후반기의 작품들과도 차이를 보이는 영화다. 애인인 배우 김민희가 등장하지 않고, 또 그녀와의 관계가 영화와 닿아 있다고 넘겨짚도록 할 수 있는 요소 또한 깡그리 빠져 있다. 그래서 영화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홀로 떨어져 있는 듯도 보인다.
▲당신 얼굴 앞에서스틸컷
한국영상자료원
죽음이 있어 더욱 선명해지는 삶
영화는 오래 외국에 나가 살았던 상옥이 귀국한 직후의 이야기다. 배우였던 그녀가 왜 이리도 오래 해외에서 살았는지, 또 한국에는 어째서 돌아왔는지 영화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상옥의 하루, 그녀가 잠에서 깬 동생과 대화하고, 아침 일찍 함께 경관 좋은 브런치 카페를 찾아 시간을 보내고, 어려서 살던 집으로 향하고, 감독과의 약속자리에 가서 술자리를 갖고, 그렇고 그런 일들을 뒤따른다. 홍상수의 카메라가 종종 그러하듯 인물을 도망치지 못하도록 클로즈업하는 순간이 있고, 홍상수의 카메라가 또한 그러하듯 줌아웃으로 물러서 놓아주는 순간 또한 있다. 그로부터 관객은 또 한 번 홍상수의 세상에 다가서고 물러나는 경험을 얻는다.
상옥은 아프다. 많이 아프다. 어느 순간 움찔, 배를 부여잡는 순간이 있고, 때로 때때로 기도하듯 숙연하고 경건한 문장을 내뱉는 순간이 있으며, 그와 같은 순간들이 몇 차례쯤 겹쳐지며 그녀가 몹시 좋지 않은 상황에 있다는 사실을 관객이 짐작하도록 한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감독과의 오랜 술자리에서 그녀는 제게 주어진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접적으로 말하게끔 한다.
맑았던 하늘에서 비가 오고 천둥이 친다. 술자리는 무르익고 사람의 마음을 또한 알 수 없는 순간들도 있다. 이 영화의 무척이나 인상적인 연출, 그러니까 초면인 감독에게 아무렇지 않게 "나와 자고 싶죠?"하는 물음을 던지고, "예"하는 답을 끌어내는 장면은 대단하다. 이를 보며 약간의 천박함이나 지질함, 추잡함 따위를 일절 느끼지 못하는 건 아마도 죽음이란 외면할 수 없는 진실과, 죽음과의 가까운 거리가 가져다주는 생을 절박하면서도 초연하게 대하도록 하는 감각 때문일 테다. 감독은 더는 낭비할 수 없는 얼마 남지 않은 생과 그런 이의 물음에 또한 그런 자세로 대해야만 하는 상대의 마음가짐을 보여주지만, 역시나 홍상수다운 자세로 그를 비틀고 꼬집어내기도 한다. 삶이란, 또 인간이란 얼마나 가벼운가를 보인다.
▲당신 얼굴 앞에서스틸컷
한국영상자료원
홍상수 영화가 죽음을 끌어안는 자세
아들까지 있는 유부남이 마침내 제 입으로 맺은 약속을 파기하는 순간이 있다. 그러면서도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격식을 차려 그가 뱉어내는 말들은 진지할수록 우스꽝스럽고 무거울수록 유쾌해진다. 이를 듣고 깔깔깔 웃으며 거의 눈물까지 흘리는 상옥의 모습은 이 영화의 백미라 할만하다. <당신 얼굴 앞에서>는 이처럼 무겁고 중한 일도 가볍고 유쾌하게 그린다. 삶 가운데 좋은 걸 잡아채 곱씹으려 하고, 또 삶 중에서 나쁜 것은 잊고 이해하려 한다. 홍상수의 팬이라 여겨본 적 없는 내가 홍상수가 진실로 아름다움을 많이 마주해본 사람이란 걸 이렇게 이해하고 만다.
<당신 얼굴 앞에서>는 제 얼굴 앞에 있는 것들에게 최선을 다하려는 죽어가는 이의 마음가짐을 보인다. 그건 멀리서 오랜만에 온 이모에게 좋은 선물을 주려 고심하는 조카의 마음이기도 하고, 잠에 빠져 일어나지 못하는 동생의 얼굴이기도 하며, 예기치 않은 손님을 맞아 매실차 한 잔을 건네는 친절한 이의 태도이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도 팔 벌린 낯선 어른에게 안기는 티 없이 맑은 아이의 포옹이기도 하다. 그리고 저와 관계하고 싶은 유부남 감독의 솔직함이기도 한 것이다. 홍상수는 그 모두를 아름답게 그리고, 나는 그 아름다움에 공감하지 못하면서도 거기 내가 느끼지 못하는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겠다고 납득한다. 그건 문득 찾아오는 것이지만 붙잡아 전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홍상수의 카메라가 꼭 그러한 순간에 이르러서 줌 아웃, 뒤로 빠져 피사체를 풀어주는 이유이겠다.
내 얼굴 앞에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자는 영화 속 상옥의 태도로부터 '당신 얼굴 앞에서'를 말하는 영화는, 어쩌면 그간 끊임없이 별 관심 없는 듯 치부해 온 제 밖의 세상과 사람들에게 보이는 애정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당신들 모두 얼굴 앞에 아름다움이 있었구나, 그걸 발견하고만 감독의 애정 말이다.
▲홍상수 전작전포스터한국영상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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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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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하며 죽어가는 여자 향한 유부남 감독의 솔직한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