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포스터
영화특별시SMC
'소피'는 사막 행성의 '마을'에서 사는 소녀다. 척박한 풍경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마을은 화목하고 기본적인 의식주엔 불편함이 없다. 주민들은 서로 우애롭고 화목하게 지낸다. 그런데 이곳에는 특이한 풍습이 있다. 18살이 되면 '시초지'라 불리는 주민들의 기원, 지구로 순례를 떠나 1년간 지내다 돌아오는 규칙이다. 하지만 순례자 중 일부는 1년 후에도 돌아오지 않는다. 슬픔이나 고통을 찾을 수 없는 '마을'로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소피는 궁금해진다.
완벽한 세계에 가리워진 이면, 진실은 무엇일까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속 '마을'은 유토피아에 가깝다. 여기엔 빈부의 격차나 성별, 종교 등에 의한 차별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면 소피가 다니는 학교의 교육 내용이 유별나긴 하다. 이들은 자신들이 유래한 지구의 환경을 재연하는 테라리움을 만들거나, 인간의 오욕칠정을 고전 문학 수업에서 배운다. 완전히 독립된 외계 행성에서 자급자족 생태계를 유지하는데 굳이 '시초지'를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이곳에서 성인식이라 할 관습은 지구로의 1년간 순례다. 딱히 마을의 삶과 별 연관도 없는데 굳이 짧지 않은 기간 머물러야 하는 취지가 뭘까? 성년이 안 된 소피는 궁금하지만, '귀환자'들은 침묵 서약을 했는지 시초지에서 보낸 시간에 대해선 말을 아낀다. 어떤 귀환자는 돌아온 후 칩거하며 슬픔에 잠긴다. 공식적으론 존재하지 않지만, 은연중에 돌아오지 않는 순례자에 대한 소문이 떠돈다. 완벽한 세계로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소피에겐 늘 착용하고 다니는 목걸이가 있다. 몸의 일부 같던 목걸이에서 갑자기 메시지가 들린다. 알고보니 소형 무전기 역할을 하는 장비다. '데이지'라 자신을 소개한 목소리는 소피를 잘 알고 있지만, 소피는 상대를 기억하지 못한다. 데이지는 뜻 모를 말을 거듭하며 자신은 지금 시초지에 와 있음을 밝힌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몰래 귀환선에 타 지구에 도착했고, 자신보다 먼저 도전한 '올리브'를 찾는 중이란 것.
데이지의 말이 영 미심쩍지만, 소피는 그녀가 들려준 충격적 진실을 탐문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공식적으론 존재하지 않는 미귀환자가 실제로 있다는 것, 마을의 건설자로 추앙되는 '릴리 다우드나'의 행적에 관해 알게 된다. 그동안의 안정된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정도로 그 내용은 당혹스럽기만 하다. 한편 기대와는 너무 달랐던 디스토피아 지구를 겪으며 위험에 여러 번 빠졌던 데이지는 마침내 올리브와 만나 세계의 비밀에 관해 깨닫는다.
한국 SF 문학의 콘텐츠 확장 도전기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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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한국 SF문학 붐을 불러온 주역 중 하나인 김초엽 작가의 대표 단편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중 첫 꼭지를 장식한 동명의 단편을 원작으로 삼았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기대를 모으며 이미 여러 편이 영상화 시도중인 작가의 작업 중 공식 첫 번째 영화로 선보인 본 작품의 성패는 국내 영상 콘텐츠 향후 전망과 연결되는 지점이다. 아직 주변부에 머무는 SF 장르 활성화와도 밀접하게 연관된 여러모로 주목할 만한 시도다.
마이너에 머물던 한국 SF 문학이 부흥한 배경에는 서구권 하드 SF와 비교하면 페미니즘이나 생태주의 조류와 연동한 상상력 극대화를 빼놓을 수 없다. 현실에선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다양한 대안 사회 희망이나, 일상에서 겪는 사회적, 실존적 고민을 마음껏 해부할 수 있는 특권은 해당 장르문학이 시초부터 누려온 이점이다. 미래사회 혹은 평행세계(우주)를 무대로 펼치는 상상력의 향연은 현실에 만족할 수 없는 이들에겐 작은 해방구로 기능하는 덕분이다.
작가의 작품 중에도 가장 잘 알려진 단편을 각색한 만큼 영화 역시 김초엽 월드의 대표적 특징을 고스란히 갈무리한다. '마을'은 현실에서 구현하고픈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의 정석처럼 묘사된다. 자매애로 굳건하게 서로를 배려하고 격려하는 문화가 정착한 이곳에는 가난이나 질병, 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여기서 다들 행복하게 살면 충분하다. 동서고금 사람들이 꿈꾸던 무릉도원, 샹그릴라가 여기 있다.
반면, 그들이 기원한 '시초지', 지구는 거의 대비된다고 봐도 좋을 풍경이다. 유전자 교배가 일상화한 지구는 우성인자로 디자인된 이들이 사는 밝고 환한 구역 VS. 유전자 조작을 거치지 않은 열등한 사람들의 슬럼가로 철저히 나뉜다. 지구를 방랑하던 데이지는 후자 구역에선 위험에 처하고 전자 구역에선 차별과 멸시에 쫓긴다. 우등 인류 구역은 환하고 밝으며 모든 게 풍족하지만, '마을'과 달리 차가운 인심과 인공적 환경으로 채워진다. 영 구미에 맞지 않다.
구시대의 분리장벽이 유전자 조작으로 부활한 미래세게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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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선각자라 할 올리브를 찾아 유랑하는 데이지, 그런 데이지와 교신을 통해 세계의 은밀한 진실을 접하는 소피의 삼각 구도로 전개된다. 원작에선 서로 다른 시대를 살던 이들이 남긴 기록과 서간으로 연결되는 맥락을 축약해 동 시간대로 재구성했다. 분량 역시 장편이라기엔 단출한 딱 1시간이라 단편소설 작법과 연결해 볼 구석이 많다. 하드 SF의 장기인 장대한 세계관과 현실 대입한 치밀한 고증보다는 에코페미니즘 계열 상상력과 반전에 중점을 둔다.
모든 게 갖춰진 이상향을 무엇 때문에 포기할까? 끝내 돌아오길 포기한 이들의 결정은 무엇 때문일까? 영화 속 주인공들은 비밀에 도달했거나, 그들의 뒤를 쫓는다. 건설자가 완벽하게 구현한 세계에 만족하지 못한 이들의 심보는 뭘까? 어디에나 있는 청개구리인 걸까? 아니면 겉으론 나무랄 데 없는 마을의 이면에 감춰진 어둠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야기는 극단적 반전보다는 개인의 주체적 선택, 인간 본성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집요하게 감행한다.
물론 현실 세계에 대한 은유와 풍자로 해석할 구석도 다분하다. 시초지의 양분된 세계는 마치 신도시 대단위 아파트 단지와 구도심 재개발 대상구역, 빈곤계층과 이주자 거주지의 미래판처럼 보기 충분하다. 물론 한국뿐 아니라 21세기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극단적 양극화 풍경이다. 이런 묘사는 그리 특별한 건 아니다. 하지만 현실 모순에 지친 이들이 꿈꾸는 상상 속 이상세계의 구현이라 할 '마을'에 대한 관점과 해석이 보편적 설정과 차별화를 이룬다.
지구의 우등한 인류는 유전자 배열을 설정하는 게 가능해진 근미래 과학의 산물이다. 처음부터 규격화한 우량인종을 탄생시키니 자연스럽게 그 기준에 못 미치는 기존 인류 다수는 방치되고 차별에 시달린다. 로봇과 인공지능이 발달한 세계에서 더는 그들은 필요하지 않은 존재다. 혈통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서로의 영역을 완전히 격리한다. 과거 백인우월주의 정책의 대명사, 아파르트헤이트가 판박이로 부활한 세계의 풍경이다.
완벽한 낙원을 버리고 왜 불완전한 세계에 잔류할까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스틸영화특별시SMC
마을은 시초지의 인공낙원과는 여러모로 대비되는 피난처다. 하지만 이곳에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올리브-데이지-소피는 순차적으로 마을의 탄생 배경과 지구의 디스토피아 수립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뿐이라면 그냥 마을에 정착해 지구로는 관심을 끄면 될 일이다. 하지만 차례대로 그들은 시초지로 향하고 그곳에 정착하려 한다. 무엇 하나 보장되지 않고 생존마저 위험할 수 있는 지구인데 말이다. 모든 위험을 감수할 이유라면?
마을의 주민들은 수업을 통해 평범한 감정에 대해 학습한다. 기술 발전으로 그들이 험한 육체노동을 하지 않아도 기본 생활이 가능한 배경 조건 덕분이다. 추앙받는 건설자의 세심한 설계가 빛을 발한 셈. 하지만 인류가 문명을 발전시키며 치러온 온갖 굴곡이 이곳엔 없다. 그저 처음 계획된 그대로 계속 평탄하게 연속되는 정체된 시공간만 남는다. 게다가 기이하게 이곳에선 자연 생식이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인간의 본성이 과학기술로 대체될 수 있을까?
원작/영화는 공히 디스토피아 세계관에 대한 치밀한 고증보다는 우화적 풍자로 향한다. 21세기 인류가 겪는 (경제 및 사회적) 양극화 & (차별과 혐오에 바탕한) 분리주의에 대한 경고와 더불어 마을의 치명적 오류, '순혈주의'와 폐쇄적 공동체 한계 역시 비중있게 제기한다. 양분된 세계 대비라면 이미 상업영화나 만화, 드라마까지 숱하게 접하는 흔해빠진 소재일 테지만, 여기에 대안으로 보통 제시되던 공동체주의 역시 위험에 노출됨을 지적하는 시선이 예리하다.
결국엔 다시 <매트릭스>가 던진 화두로 돌아오는 셈이다. 네오와 동료들은 '빨간약'을 택하고 인간을 억압하는 기계제국과 맞서지만, 정작 평화협상 이후에도 다수 인류는 매트릭스 시스템 안에서 안주하는 '파란약' 선택에 기운다. 주체성과 의심할 자유를 포기한 대신 주어진 조건에 만족하는 인공적인 유토피아의 달콤한 유혹 VS. 능동적으로 운명을 결정하고 책임질 실존적 삶 사이에서 미래 인류 역시 고뇌할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과 로봇 시대에 당연한 화두다.
영화는 원작의 충실한 각색에 초점을 맞췄다. 어디서 본 듯한 익숙한 미래세계 묘사, 단편 원작에 걸맞게 주요 인물 위주로 구축된 이야기, 반전을 통해 모든 게 재구성되는 전복적 세계관이란 장르 정석에 크게 모자람이 없다. 하지만 독창성 면에선 시각적 이미지나 장면이 확 강하게 남진 않는다. 첫술에 배부르랴 하긴 해도 SF의 상상력 측면에서 능히 상상 가능한 풍경에 머무는 건 아쉬운 지점이다.
애니메이션 팬이라면 주의 깊게 따지는 부분, 전문 성우 아닌 배우들 출연 부분은 딱 해당 캐릭터=배우 맞춤형이라 큰 위화감은 없지만, 연기보다 캐릭터 이미지에 치중한 선택에 가깝다. 즉 연기로 상상할 지점보단 실제 배우 이미지 떠오르는 캐스팅이다. 황소윤이 맡은 음악 작업은 자매애가 넘실대는 작품 배경과 적절하게 조화롭다. 여러모로 크게 결함 없는 충실한 원작의 영상화다. 기왕이면 옴니버스 형태로 다른 단편과 동시에 나왔어도 좋았을 법하다.
<작품정보>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Pilgrims
2026 한국 감성 SF 애니메이션
2026.06.03. 개봉 60분 전체관람가
감독 허평강
출연 김향기(소피), 박지후(데이지), 이주영(올리브)
제작 21스튜디오
배급 영화특별시S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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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탈자 신고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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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를 떠난 사람들... 애니로 만난 '김초엽의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