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님, 이번에 국립극장에서 올리고 있는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을 꼭 봐주시면 너무 감사할 것 같습니다. 대통령님께서 이 공연을 봐주신다면 늦게라도 배우고 꿈꾸는 모든 분들께 응원이 되고, '당신의 삶도 충분히 귀하고 아름답다'는 따뜻한 메시지가 전해질 것 같습니다."
5월 19일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진행된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 프레스콜에서 '지석구' 역을 맡은 배우 김지철이 이재명 대통령을 향한 편지를 낭독했다. 김지철은 이 대통령이 지난 3월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뮤지컬 <긴긴밤>을 관람한 사실을 언급하며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도 관람해줄 것을 부탁했다.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문해 교육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쓰고 시를 쓰게 된 할머니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창작 뮤지컬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칠곡 가시나들>, 영화를 만든 김재환 감독이 직접 집필한 에세이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을 원작으로 삼아 경남 의령군 칠곡면 할머니들의 실화를 무대 위에서 그려냈다.
지난해 초연 당시 작품성을 인정받아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작품상·극본상·연출상의 3관왕을 달성하며 1년 만에 재연으로 돌아왔다. 초연에 출연한 배우 전원이 다시 합류했고, 차청화·김미려·김나희 등 새로운 얼굴들이 힘을 보탠다. 특히 김미려와 김나희는 코미디언 출신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며 뮤지컬 무대에도 도전해온 바 있다.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 공연 사진
라이브
할머니들의 지연된 꿈이 이뤄지는 순간
지난 2일 관람한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칠곡면 할머니들의 실화를 '팔복리'라는 가상의 시골 마을로 옮겨온다. 할머니들은 각기 다른 인생 경로를 걸어왔지만, 비슷한 이유로 한글을 배우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20세기 남자 형제의 교육을 우선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중등교육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고, 어른이 되어 한글을 배우려 할 때면 '여자가 무슨 공부냐'는 핀잔을 남편으로부터 들어야 했다.
일흔이 넘어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배움에 나이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드라마이기에 앞서, 특정 세대의 여성이 처한 사회 구조적 문제를 직격하는 드라마다. 교육 대신 희생을 강요받았고, 자아실현 대신 자녀 양육의 책임을 짊어졌던 20세기 한국 여성의 현실을 담았다.
문해학교의 반장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이영란 할머니, 한때 가수를 꿈꿨던 양춘심 할머니, 첫사랑의 추억을 시로 풀어내는 김인순 할머니, 문해학교 막내 이분한 할머니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놓고 '가시나'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여자아이'를 뜻하는 방언으로 알려져 있지만, 할머니들은 그 의미를 변주한다.
"우리는 가시나, 가장 시작하기 좋은 나이 / 우리는 가시나, 가장 시를 쓰기 좋은 나이
오늘을 살아갈 설렘을 찾아 시를 쓴다" (넘버 '우리는 가시나')
할머니들의 시는 각자가 살아온 인생을 자신만의 언어로 녹여낸다. 실제로 칠곡면 할머니들이 쓴 시가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의 대사와 가사로 사용되었다. 창작진은 제작 과정에서 할머니들의 시를 온전히 전달하기 위한 고민을 거듭했고, 할머니들의 사투리와 말맛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극장 앞에는 할머니들의 시가 전시되어 있어 공연 전후로 모티브가 된 시를 읽어볼 수 있었다.
각자 흩어져 있던 할머니들의 삶은 세대와 젠더를 관통하는 사회 문제로 조립된 후, 문해 교육이라는 공통 과정을 거친다. 이후에는 '시'라는 소재를 통해 각자의 다른 삶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해체되는 것이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의 서사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김인순 할머니는 오래 전 만난 푸시킨의 시를 첫사랑의 추억과 엮어 자신만의 시를 쓰고, 양춘심 할머니는 노래자랑에서 자신만의 시를 노래하며 지연된 꿈을 이루며, 이영란 할머니는 글을 몰라 생긴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이분한 할머니는 이름에 담긴 부정적 감정을 시를 통해 긍정적으로 승화한다.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 공연 사진
라이브
사회적 고민이 더해질 때 더 의미있는 작품이 된다
극중에서 할머니에게 '제2의 인생'을 선물한 문해 교육은 사실 위기에 처해있다.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에는 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를 담당하는 PD '지석구'가 추가로 등장하는데, 문해 교육이 예산 삭감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문해학교 선생님 '이가을'이 섭외한 것이다. 예산 삭감 시 가장 먼저 고려되는 건 힘없고 목소리 작은 사람들의 예산이다. 지석구 PD의 존재는 바로 이러한 정치적 역학을 생각하게 한다.
한편 뮤지컬이 원작으로 삼은 영화 <칠곡 가시나들>이 개봉된 2019년, 당시 영부인이던 김정숙 여사는 영화를 관람하고 주인공인 할머니들에게 편지와 선물을 보낸 바 있다. 김정숙 여사는 "글자를 아니까 사는 기 재미지다"라는 할머니의 시 구절을 인용해 편지에 "글자를 알고 나니 사방에서 시가 반짝이는 인생의 봄이 왔나 보다. 더 많은 분들이 늦게나마 봄을 만나도록 해야겠다"고 적었다.
2002년 당시 교육인적자원부가 문해 교육에 재정 지원을 시작하고, 이후 각 지방정부들에서 평생학습의 일환으로 성인 문해 교육을 실시해왔다. 하지만 여전히 문해교육 잠재 수요자가 10% 안팎으로 조사될 만큼 구석구석 가닿지는 않는 실정이다.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이 제시하는 이야기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와 정책적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배우 김지철의 이재명 대통령을 향한 '관람 부탁'도 이런 맥락에서 비롯된 것일 터.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을 보고 나오면, 김지철의 부탁에 이유가 있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한편 이 대통령이 지난 3월 관람한 뮤지컬 <긴긴밤>은 연대와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뮤지컬로, 관람 이후 작품이 지닌 사회적 의미가 재조명되며 연장 공연이 확정되기도 했다.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서울 남산에 위치한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6월 28일까지 공연된다. 이후 창원(7/4~5), 안동(8/7~8) 등에서 추가 공연을 펼친다.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 공연 사진라이브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공유하기
일흔 넘어 한글 배운 할머니들의 실화가 준 감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