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노동하는 부잣집 도련님의 방황에서 러-우 전쟁이 보이는 까닭

[김성호의 씨네만세 1358] <엔조>

시인 신동문을 기억한다. 그가 쓴 시 '내 勞動(노동)으로'를 또한 떠올린다. '내 노동으로 / 오늘도 살자고 / 결심을 한 것이 언제인가'하고 문을 여는 시는 '내 노동으로 / 오늘을 살자고 / 결심했던 것이 언제인데.'하고 끝을 맺는다. '야위고 흰 / 손가락'들과 '창백한 얼굴로 명동에 / 모이는 친구'들과 만나면서도, 진짜 삶으로부터 괴리된 스스로의 오늘을 한탄하고 경계하려는 마음이 이 빼어난 시구 가운데 가득 들어찼다.

러시아의 문호 레프 톨스토이를 떠올린다. 위대하단 말이 부족하지 않은 동시대의 작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가 '완벽하다'고까지 격찬한 <안나 카레니나>를 생각한다.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써내는 와중에서 당대 러시아 사교계의 위선을 폭로한 이 소설에서 작가가 저 자신을 투영해 써낸 인물이 바로 콘스탄틴 레빈이다. 시골에서 농장을 경영하는 지주인 이 청년이 시골, 또 농부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남다르다. 풍족한 삶 속에서 농부들과 저 자신을 완전히 괴리된 무엇으로 이해하는 귀족, 지주들의 태도를 그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콘스탄틴 레빈은 세르게이 이비노비치를 사랑하고 존경하면서도 그와 함께 시골에서 지내는 것이 불편했다. 시골에 대한 형의 태도를 보노라면 거북하고 심지어 불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콘스탄틴 레빈에게는 시골이 삶의 장소, 즉 기쁨과 고통과 노동의 장소였다. 하지만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에게는 시골이 노동에서 벗어난 휴식의 공간이자 타락의 독소를 제거하는 데 유용한 해독제였다. (중략) 그에게는 민중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 인간을 안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레프 똘스또이, <안나 카레니나> 중에서

비슷한 작품이 많다. 땀 흘리는 진짜 노동, 무에서 유를 만들고 사람들의 실제 삶을 더 낫게 하는 가치 있는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문학과 영화들이 말이다. 그 반대편엔 삶과 세상을 더 낫게 하지 못하면서도 부와 권력, 명예를 독차지하는 사람들, 그런 이들이 만들어 놓은 부조리한 구조에 대한 인식이 또한 자리한다. 중산층 가정의 소년 홀든 콜필드(<호밀밭의 파수꾼>) 또한 그래서 방황하여 절벽 끝까지 나아갔던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엔조 스틸컷
엔조스틸컷㈜스튜디오 디에이치엘

그저 혼란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신작 <엔조>를 이야기하기 위하여 앞의 작품들을 말하지 않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진짜와 가짜에 대한 구분, 위선과 스노비즘을 적대하며 땀 흘려 노동하고 부조리를 외면하지 않는 마음을, 앞선 예술이 먼저 고심하고 구축했기 때문이겠다.

<엔조>는 어떤 영화인가. 누군가는 이를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함께 언급한다. 아마도 청춘의 방황과 동성애로 연결되는 소재 때문일 테다.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어서, 두 영화 모두 방황하는 부유한 집 자제가 형뻘 사내에게 매력을 느끼고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엔조>를 그저 그렇게만 소비하는 건 무책임한 일이다. 영화가 담고 있는 명징한 상징을 (비록 그 쓰임에 공감할 수는 없을지라도) 읽어내는 것이 더 나은 이해에 가 닿는 길이기 때문이다.

엔조는 부잣집 도련님이다. 건축 엔지니어 어머니와 역시 엘리트 아버지 사이에서 자란 둘째 아들이다. 형은 공부도 운동도 잘하는 잘생긴 우등생이다. 바닷가에 자리한 수영장 딸린 대저택에 사는 이들에겐 남부러울 게 별로 없는 듯하다. 이 완벽한 집에서 딱 하나 빠지는 게 있다면 둘째 엔조일 테다. 수업도 못 따라갈 정도로 이해가 늦고, 대단히 잘하는 것도, 하고픈 것도 없다. 그럭저럭 그리는 그림을 더 파서 예술학교에 진학하거나 제게 잘 맞는 대안학교에 가라는 건 무리한 제안일까. 부모는 그래도 엔조를 믿고 기다려 주려는데, 엔조는 아들로서도 낙제점이다. 도무지 그들의 기대를 따라줄 생각이 없는 것이다. 저 <호밀밭의 파수꾼> 주인공을 비롯해, 수많은 현대 부잣집 도련님들의 성장드라마가 흔히 그러하듯이.

엔조 스틸컷
엔조스틸컷㈜스튜디오 디에이치엘

부잣집 도련님이 막노동판에서 일하는 이유

영화는 엔조의 일상을 뒤따른다. 엔조는 동네 공사장에서 막노동 일꾼으로 일한다. 학교를 중퇴한 청년이 일용직 노동자로 사는 거야 대단할 것 없는 일이지만, 엔조는 여기서도 엉망진창이다. 뭘 가르쳐줘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고 일머리도 없는 것이다. 엔조가 삐뚤빼뚤 쌓아놓은 벽돌은 현장에서 노동해 본 사내라면 보자마자 분통을 터뜨릴 밖에 없을 정도다. 현장소장도 결국 참지 못하여서 엔조에게 뭐라 질책을 하는데, 그가 갑자기 박차고 뛰어나가는 것이 아닌가. 아직 어린 녀석이라, 마음이 쓰인 소장은 그를 붙들고 집까지 태워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로부터 그가 엔조의 집에 도착해 입을 딱 벌리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영화는 구제불능 금쪽이처럼 보이는 엔조를 차츰 이해하도록 이끈다. 가만히 관찰하여 그에게 어떤 문제가 자리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드러난 문제만으로 모두가 쉽게 판단하고 평가하는 이면에 엔조만의 인식과 관념이 있음을 마침내 포착해 낸다. 엔조의 일터엔 우크라이나에서 온 젊은이들이 있다. 당장 돈을 벌기 위해 프랑스까지 흘러 들어온 그들은 조국에 전쟁이 난 관계로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형편이다. 가진 거라곤 당장 월세도 감당하기 힘든 작은 방과 더러운 침대, 몇 가지 생필품뿐인 이들이다. 고된 노동으로 하루를 살며 기약할 수 없는 미래와 마주하는 사내들에게서 엔조는 진짜 삶을 사는 인간을 본다. 이들이 짓는 집과 까는 타일들은 모두 다른 누구의 삶을 낫게 하는 것이지만 이들의 삶을 돌보는 건 대체 누구란 말인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이들과 충분한 여가를 누리면서도 일꾼 서너 명쯤의 벌이를 하는 제 엄마의 모습을 엔조는 주의 깊게 바라본다. 온종일 웃고 떠들며 먹고 마시다 수영하는 삶 가운데는 없는 것이 저들에겐 있지 않은가. 엔조의 부적응 아래는 현실을 그저 즐길 수 없는 저 너머의, 아직은 체계화되지 못한 인식과 관념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진실과 위선을 목격한 진짜 사내들이 흔히 그러하듯, 엔조는 진짜 삶이 자리한 곳으로 이끌리듯 다가선다. 일터의 우크라이나 형님 블라드가 그 대상이 된다.

엔조 스틸컷
엔조스틸컷㈜스튜디오 디에이치엘

러-우 전쟁을 소년의 드라마로 만든다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그저 학습이 느린 아이의 반항과 방황이야기가 아니듯이, <엔조> 또한 그저 막노동판에서 벌어진 브로맨스라거나 퀴어영화 쯤으로 끝맺을 수 없는 작품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이 양국 간 전면전으로 확대 발발한 게 2022년이다. 4년째 끊이지 않고 있는 전쟁에서 프랑스를 비롯한 서방사회는 적극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지지했다. 그건 서로 팽창하던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러시아 사이의 민감한 관계에서 기원한 것이기도 하고, 수많은 사상자를 낳는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기도 하며, 소련 해체 뒤 독립국이 된 우크라이나의 자주권을 존중하는 선택에서 비롯된 결과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라고 해서 꼭 옳기만 할까.

<엔조> 속 엔조는 여러모로 우크라이나라는 국가를 떠올리게 한다. 모든 면에서 모범적인 부모와 형제, 동급생과 이웃들, 그러니까 서방사회의 일원들에 비하여 엔조의 현실은 반항아란 딱지를 피하기가 어렵다. 그런 그를 부모는 나름대로 애정을 갖고 신뢰하려 노력하지만 엔조는 그 스스로의 선택으로 갈수록 난감한 상황을 자초하는 것이다. 부모의 입장에선 신뢰를 거두고 질책과 단절까지 떠올릴 수 있는 상황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볼수록 그저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되는 단서들이 있다. 부모는 이미 제가 구축한 기반과 가치를 바탕으로 엔조의 삶을 규정짓고 따라오라 제안한다. 그를 따르자면 부와 평안은 보장되겠으나 엔조 자신은, 진정 자기만의 것은 사라질지 모를 일이다. 엔조가 여자친구를 데리고 수영장에서 놀 때도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들어와서 엔조의 즐거움을 깨뜨린다. 꼭 그렇게 마음대로 해야 했느냐고 항변해 보지만 엄마가 당당히 말하듯이 이곳은 엄마의 집이며 그녀는 자신의 규칙대로 한 것이다. 서구가 마련한 틀, 그러니까 EU며 NATO와 같은 기구와 조약에 따르지 못한다면 우크라이나는 진정으로 서구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반대편에 선 러시아라고 해서 우크라이나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다. 그리고 역사는 그를 사실로써 보여주었다.

엔조 포스터
엔조포스터㈜스튜디오 디에이치엘

달리 보자면 달라지는 속 깊은 영화

엔조와 노동자들이 벽돌을 쌓아 집을 올리는 모습도 그를 염두에 둔 장치일 테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건물을 쌓아 올리는 작업은 진정으로 존중할 수 없는 부모의 집보다도 마음 편한 내 삶에 가까이 다가서는 일이다. 결코 쉽지 않은 엔조의 작업이 양편 강대 세력에 끼인 우크라이나의 현실과 묘하게 겹친다. 그러나 세상의 기준에 미치지 못해 거듭 무너지는 그 벽돌작업을, 집짓기를 엔조는 반드시 해내야 한다. 그에겐 피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모의 유산 대신 내 손으로, 내 노동으로 토대를 닦으려 분투하는 블라드와 같은 이들의 존재가 여러모로 인상적이다. 기댈 구석 확실한 서구든 동구든 강자의 적자들과 달리, 진짜 제 노동으로 벌어먹는 이들에게서 존경할 만한 무엇을 보는 엔조다. 블라드를 만나 사고가 흔들리고 우크라이나인의 고뇌와 숙명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엔조의 모습은 그래서 보는 이의 감각까지 톡 하고 건드린다. 그에 대한 거의 구애에 가까운 몸짓들도 바로서기를 동경하는, 그러나 도저히 그럴 수는 없어 보이는 우크라이나의 현실과 마주 닿는다.

영화는 엔조가 끝내 답을 찾도록 놓아두지 않는다. 답이란 그렇게 쉽게 놓여 있는 것이 아님을 이미 현실이 내보이고 있는 바다. 블라드와 같이 건강한 이조차도 저보다 훨씬 더 큰 폭력 가운데 놓여 두려움을 감추지 못한다. 부모나 형과 같은 이들은 블라드와 같은 진짜 삶, 그 처절한 현실을 모르거나 알려 하지 않는다. 어찌할 수 없이 부모에게 의지할 밖에 없는, 그러나 결코 마땅해하거나 만족할 수는 없는 엔조의 현실이 우크라이나의 것과 같다. 미완의 결말이 곧 실제하는 현실이다.

영화를 기획했으나 만들지 못하고 눈감은 로랑 캉테와 이 프로젝트를 이어받아 끝을 본 로뱅 캉피요의 작업이다. 이 영화는 그저 어느 소년의 방황과 성장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명확하게, 부조리한 국제관계와 해법 없는 상황을 인물 위에 덧씌운 상징극이다. 이를 이해한다면 영화가 완전히 달리 보일 테다. 그것이야말로 평론이 해내야만 하는 일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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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