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이라는 착각, 좋은 사람 되는 법은 따로 있었다

[안지훈의 연극 읽기] 연극 <렁스>

지구 환경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여자와 음악을 하는 남자가 대화를 나눈다. 아이를 가질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된 대화는 '좋은 사람'에 관한 논의로 이어진다. 아이 한 명이 배출하는 탄소는 1만 톤, 또 현재 세계 인구가 포화 상태라는 일각의 주장에 빗대어 이들은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연극 <렁스>는 남자와 여자의 대화로 시작해 대화로 끝난다. 등장인물은 단 2명, 이름도 없이 그냥 남자와 여자다. 둘을 설명하는 정보는 여자가 박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는 것, 남자는 음악을 하고 있다는 것이 전부다. 관객은 약 90분에 걸쳐 이어지는 둘의 치열한 대화를 통해 등장인물들을 알아가게 된다.

대화는 연극 <렁스>의 전부이기도 하다. 원형으로 이루어진 무대 위에는 별다른 세트가 없다. 마트, 집, 욕실, 공원 등으로 연극의 공간적 배경이 수시로 바뀌지만, 무대 세트는 변함없이 텅 비어있다. 오직 남자와 여자의 대화를 통해 공간적 배경을 알 수 있고, 시간의 흐름 역시 둘의 대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남자와 여자를 연기하는 배우들은 때로는 쉴 틈 없이 빠르게 대사를 소화하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 다다르면 깊고 진한 대화를 찬찬히 나누기도 한다. 두 명의 배우는 퇴장 없이 무대를 지키며 템포를 조절하는 고난도 연기를 소화해야 한다.

 연극 <렁스> 공연 사진
연극 <렁스> 공연 사진연극열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경계

지난 5월 30일 관람한 <렁스>에서 남녀는 자신들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프랜차이즈 카페 대신 개인 카페를 이용하고, 공정 무역 제품을 사용하며, 양치할 때 물을 틀지 않는 등 환경을 위한 사소한 실천도 놓치지 않는다. "우리는 좋은 사람일까?"라는 물음은 이들이 은연중에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정작 이들에게서 보이는 건 '좋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좋지 않은 사람'의 모습이다. 환경 보호를 위해 아주 작은 것까지 신경쓰는 여자는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고 확신하지만, 남자와의 대화에서는 공격성과 이기심을 마구 드러낸다. 여자는 지나칠 정도로 자신의 주장만을 되풀이하고, 이에 "대화하자"는 남자의 말에 "대화하고 있잖아" 하고 받아칠 뿐이다. 하지만 정작 이들의 이야기에는 여자의 발화만 있고, 상호 간의 대화는 없다.

얼핏 보면 여자의 일방적인 공격에 남자가 당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남자도 여자와 마찬가지로 미성숙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곧 드러난다. 남자는 직장에서 신입 직원의 다정함에 이끌려 키스를 하고, 훗날 약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나타난 여자와 하룻밤을 함께 보내기도 한다. 또 남자는 우생학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일삼기도 한다.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좋지 않은 면모를 통해 <렁스>가 드러내보이는 것은, 좋은 사람의 기준이 환경과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이다.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겐 나쁜 사람일 수 있고, 어떤 분야에서는 좋다고 여겨지는 선택이 다른 분야에서는 좋지 않은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만약 이를 고려하지 못한 채 '여기서 좋은 사람이니 저기서도 좋은 사람일 것'이라고 확신하면 그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 <렁스>의 두 남녀는 이를 몰랐기에 좋은 사람의 모습을 서로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내보일 수 없었다.

 연극 <렁스> 공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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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렇다고 해서 남자와 여자가 나쁜 사람인 채로 연극이 끝나는 건 아니다. <렁스>는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확신한 두 남녀가 '자신이 좋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조금씩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여지'를 남겨둠으로써 가능하다. 대화의 여지를 남겨두고, 판단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둘의 대화에서 남자가 말할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연극은 남자에게 말할 여지가 생기는 과정, 즉 여자가 성숙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또 언제든 자신이 나쁜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한 채로 판단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 역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질문이고, 학습이다. 확신과 대척점에 있는 것들이다. 이제껏 두 남녀가 잊고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친 끝에 자신의 진솔한 감정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서로를 향해 발화된 "사랑해"라는 말 한 마디가 이들을 조금씩 좋은 사람이 되게 한다.

한편 <렁스>는 8월 2일까지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공연된다. 임주환·박성훈·김경남이 '남자' 역을 맡고, 정운선·전소민·신윤지가 '여자' 역을 맡아 열연한다.

 연극 <렁스> 공연 사진
연극 <렁스> 공연 사진연극열전
공연 연극 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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