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 속에 갇히거나 참수형까지도... 궁녀들의 목숨 건 사랑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SBS <멋진 신세계>

SBS 사극 <멋진 신세계>는 대한민국 무명배우 신서리로 타임슬립한 조선시대 후궁 강단심(임지연 분)의 이야기다. 이 드라마에는 그를 둘러싼 두 개의 사랑이 나온다. 대한민국 신서리는 재벌 자제인 차세계(허남준 분)와 사귀고, 조선시대 강단심은 임금 안종(장승조 분)의 동생인 청헌대군 이현(허남준 분)과 감정적 교감을 나눈다.

지난달 30일의 제8회는 궁녀 시절의 강단심이 자신과 이현의 관계를 세자 시절의 안종 앞에서 폭로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현의 성추문을 조작하고 그를 궁지로 몰기 위한 추국 현장에 불려 나온 강단심은 세자가 원하는 대로 진술을 해준다.

강단심은 "소인, 진실을 고하옵니다"라며 "대군자가께선 소인이 전각에 배속되고 얼마지 않아 소인 또한 희롱하려 하였사옵니다"라고 진술한다. 강단심은 이현의 선물을 증거로 내민다.

강단심은 자신이 거절하는데도 이현이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고 허위 진술을 한다. 강단심에게서 뜻밖의 모습을 발견한 이현은 자포자기 심정으로 "내, 궁녀들과 사통을 하였습니다"라며 "마땅한 처결을 내려주시옵소서"라고 허위 실토를 한다.

엄격한 규제 대상이었던 궁녀의 연애

 본문에 인용된 <멋진 신세계>의 장면.
본문에 인용된 <멋진 신세계>의 장면.SBS

이 장면처럼 실제로도 궁녀의 연애는 엄격한 규제 대상이었다. 궁녀가 되는 것은 평생 독신의 길을 걷겠다는 선언이었다. 궁녀의 연애는 신변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시도되기 힘든 일이었다.

궁녀가 궁 안에서 사랑을 하고 왕후 자리에 오른 사례도 있다. 숙종의 부인인 장희빈(희빈 장씨)은 궁녀에서 후궁을 거쳐 중전이 됐다가 도로 후궁이 됐다. 그런데 장희빈은 일반적인 궁녀는 아니었다. 일반 궁녀와 다를 바 없었다면, 그가 후궁이 되고 중전이 되기는 힘들었다.

장희빈의 어머니는 공노비였다. 그래서 장희빈도 그 신분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그는 제2정파인 남인당의 정치적 지원과 역관 가문인 인동 장씨의 경제력을 배후에 두고 있었다. 역관이 무역을 하던 시절이라 이 시기에는 역관들이 부자였다. 이 같은 배경이 없었다면, 궁녀 출신인 그가 서인당의 지원을 받는 인현왕후와 경쟁하고 한동안만이라도 우세를 점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 같은 예외도 있지만, 보통 경우에는 궁녀가 왕후가 되는 것은 고사하고 연애를 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숙종의 아버지인 현종 때 궁녀 생활을 했던 귀열의 사례다.

음력으로 현종 8년 5월 20일자(양력 1667.7.10.) <현종실록>에 따르면, 귀열은 궁궐 밖 남성인 서리(아전) 이흥윤과 교제했다. 이흥윤은 그의 형부였다. 그는 형부의 아이를 임신했다.

배가 볼록해진 궁녀의 존재를 파악한 현종은 궐내 관청인 내수사에 귀열을 가두었다. 현종이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뱃속의 아이는 현종의 아이로 오인될 수도 있었다. 귀열은 내수사 감옥에서 출산한 뒤 형부와의 관계를 실토했다.

현종은 출산한 귀열을 석방한 뒤 사법처리에 착수했다. 형조와 승정원은 교수형을 건의했다. 하지만 재판장은 '검찰 구형'보다 높은 형벌을 고집했다. 현종은 참수형을 주장했다. 현종은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이것을 관철시켰다. 한편, 이흥윤은 도주해 처벌을 면했다.

궁녀의 사랑은 그 대상이 이흥윤 같은 서리인 경우는 물론이고 지존인 임금인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위험했다. 이 점은 숙종의 후궁인 최숙빈(숙빈 최씨)의 사례에서도 나타난다.

이문정(1656~1726)의 정치평론서인 <수문록>에 따르면, 궁녀 시절에 숙종의 아이를 임신한 최숙빈은 아이를 밴 상태에서 체벌을 받았다. 중궁전에 데려다 놓고 그를 때린 쪽은 중전 장희빈이다.

바로 그때 숙종이 나타나자, 당황한 장희빈은 최숙빈에게 얼른 장독을 씌웠다. 장독 입구가 하늘이 아닌 땅바닥을 향해 있는 것을 이상히 여긴 숙종은 장독을 똑바로 세워보라고 지시했다. 이 덕분에 궁녀 최씨는 장희빈의 수중에서 벗어났다. 그 뒤 최씨는 후궁이 되고 영조를 낳았다.

임금을 가까이하기 어려웠던 궁녀들

궁녀들이 임금을 가까이 하기 힘들었다는 점은 고종시대 사례들에서도 확인된다. 앞의 세 임금인 순조·헌종·철종이 허수아비였던 것과 달리, 고종은 군주권을 회복한 일반적인 임금이었다. 이런 임금을 사귀는 일도 궁녀들에게는 위험했다.

1987년에 발행된 김용숙 숙명여대 교수의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는 명성황후 민씨와 엄귀비(귀비 엄씨, 엄귀인)의 견제가 하도 심해서 궁녀들이 고종과 가까워지고 공식적인 후궁 지위를 얻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기술한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에 생존했던 궁녀들과의 인터뷰를 토대로 "민비나 엄비가 성격이 강하여 어느 궁녀가 왕의 사랑을 받는 눈치만 알면 바로 그 이튿날 소문도 없이 그 여인은 대궐에서 사라졌다"고 기술한다.

대한제국은 황제국이기 때문에 후궁에게 비(妃)의 칭호를 허용했다. 종래에는 중전에게만 부여되던 이 칭호는 이로 인해 후궁의 칭호가 됐다. 엄귀비는 대한제국 선포 뒤에 '비'가 됐다가 대한제국 멸망 이듬해인 1911년 7월에 세상을 떠났다. 위 책은 명성황후에 이어 엄귀비까지 죽은 뒤에야 고종이 궁녀들을 가까이 하기기 쉬워졌다고 말한다.

궁녀는 은퇴한 뒤에도 국가의 감시를 받았다. 그들은 퇴직한 뒤에도 결혼을 할 수 없었다. <경국대전> 형전 편은 "조정 관리로서 대궐에서 내보낸 시녀나 무수리에게 장가든 자"는 장형 100대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궁녀가 관리 이외의 남성과 결혼하는 것도 당연히 규제 대상이었다. 귀열이 사건 5년 전의 기록인 현종 3년 4월 2일자(1662.5.19) <현종실록>에는 '전직 궁녀에게도 혼인을 허용하자'는 승지 김시진의 상소가 소개돼 있다. 현종은 이 상소를 무시했다. 답변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궁녀의 연애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퇴직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전현직 궁녀의 연애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발각되면 사형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왕족이거나 고위직인 남성이 처벌을 면하거나 감형을 받는 경우에도 궁녀들은 중형을 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궁녀들의 사랑은 목숨 혹은 인생을 건 사랑이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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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