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타임 90초 짜리에 담긴 홍상수 영화 세계의 본질

[김성호의 씨네만세 1356] 홍상수 전작전 <50:50>

때로 형식이 내용을 만든다. 전에 하지 않던 작업이 도리어 작가의 자유로운 사고를 자극해 인상적 작품을 빚어내기도 한다. 익숙한 형식의 반복이 불러오기 쉬운 매너리즘으로부터 벗어나 창의적으로, 때로는 본질에 가까운 작품을 발표하는 경우들이 왕왕 있는 것이다. 혹자는 영화 <50:50> 또한 그러하다고 말한다. 아주 틀린 말이라곤 하지 못하겠다.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에서 홍상수 전작전이 개최된다(5월 2일~6월 13일). 데뷔작 발표 이후 30주년이 된 홍상수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다시 한 번 차근히 둘러볼 수 있는 귀한 자리다. 극장이란 상영환경에서 만나기 쉽지 않은 영화들이 여럿인 만큼, 한국영상자료원을 찾아 작품을 보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시네필들 사이에선 홍상수 전작전을 즐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혹자는 홍상수 감독과 친분이 있거나, 그 영화에 빠삭한 비평가들이 참여하는 GV가 함께 마련된 자리를 챙긴다. 그리고 또 누구는 오늘 다룰 이 영화 <50:50>이 삽입될 만한 작품 섹션을 예매한다고 말한다. <50:50>은 다시 극장에서 만날 수 없는 영화라며 말이다. 한국영상자료원 또한 그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이 영화만큼은 상영시간표에 따로 올려두고 있지 않다. 어느 영화를 골라 들어간 자리에서 엔딩크레딧이 모두 오른 뒤에 깜짝 상영되는 방식이다. 그러니 반드시 이 영화를 극장서 보려는 이들이 안달할 밖에.

50:50 스틸컷
50:50스틸컷한국영상자료원

홍상수 영화를 90초로 말한다면

<50:50>은 과연 그럴 만한 관심을 받을 만한 작품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세계에서 독특한 지위를 점하는 때문이다. 러닝타임은 고작 90초, 그러니까 1분30초가량의 짧은 영화다. 단편도 아닌 초단편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칸과 베를린, 베니스 등 세계 최고의 권위를 가진 영화제들로부터 작품세계를 인정받아온 거장이 전과 다른 방식의 작품을 제작한 건 무려 베니스국제영화제 측의 요청에 따라서였다고. 일정 관계로 공식석상에 서지 못했으나 영화만큼은 보내주길 바란 베니스의 요청에 그는 이 독특한 작품으로 화답했단 이야기다.

당시 베니스는 홍상수 외에도 모두 70명의 전 세계 거장들에게 같은 요청을 했다고 전한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지아장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같은 쟁쟁한 이름들이 포함된 '베니스 70-퓨처 리로디드' 프로젝트로, 한국에선 홍상수와 김기덕 감독이 요청을 받았다. 70편의 초단편이 모여 한 편의 영화를 이룬 이 작업 가운데서 홍상수와 김기덕 감독은 각자의 영화세계가 어떤 터전 위에 서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향하는지를 전한다. 영화제가 이들에게 던졌다는 '영화의 미래는 무엇인가'란 짧은 질문에 홍상수는 어떻게 응답했는가.

주연은 모두 세 명의 배우다. 김의성, 서영화, 문소리로, 홍상수 감독 영화 가운데 특별히 기억될 얼굴들이다. 어느 날 화창한 낮이다. 숲 가운데 놓인 벤치에 남편(김의성 분)과 아내(서영화 분)가 나란히 앉아 있다. 그런 그들 곁에 다가온 여자(문소리 분)가 대뜸 이중 남편에게 '라이터가 있느냐'고 묻는다. 남자가 라이터를 찾아 건네고, 여자를 바로 그를 받아 불을 붙인다. 여자가 곁으로 물러나 담배를 태우는데 남자가 곁으로 다가서 말을 건다.

50:50 스틸컷
50:50스틸컷한국영상자료원

모든 문제는 둘 중 하나, 벌어지거나 그렇지 않거나

'몇 밀리그램 짜리를 피우느냐' 하는 대화들로 시작하여 아내가 몹시 아프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는 말까지도. 확률은 50대50이라고. '50대50', 그러니까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이 말이 홍상수에겐 영화의 미래와 닿는다. '사모님에게 돌아가셔야죠'하는 여자의 밀쳐냄에 남자는 어떻게 응답했을까. 홍상수 특유의 고정된 카메라가 옆으로 도는 팬전환으로 내보이는 여자의 모습과 능글맞게 새 여자 곁에서 담배를 태우며 긴장된 대화를 이어가는 무능력하다는 남자, 또 그런 그가 싫지만은 않은 여자로부터 관객은 무얼 보게 되는가.

숫자는 명징해 보이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50대50이란 확률은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환산했다기보다는 일어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상징한다.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가만 보자면 모든 것이 그렇다. 아내는 외로울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아내는 병으로 죽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남자와 새 여자 사이 관계며 감정이 싹틀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영화는 그저 남자가 모르던 여자에게 다가서 몇 마디 말을 붙이도록 하는 것만으로 모든 가능성들을 연다. 영화는 사건이 아닌 자리만을 보여줄 뿐이지만, 이 짧은 영화의 앞뒤로 있을 수 있는 여러 가능성들을 관객에게 내다볼 수 있도록 한다. 어쩌면 그 내다봄이 사실과 가까울 수도, 아닐 수도 있다. 50대50이다.

영화는 화면, 그러니까 프레임 바깥에서 불청객처럼 침입하는 사람을 보여준다. 처음엔 여자가 부부에게 침범하더니, 다음엔 남자가 홀로 담배 피우던 여자에게 침입한다. 그 돌발적 넘어섬이 사건을 만든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던 개인의 존재가 돌연 관계로 확장된다. 어쩌면 불안할 수도, 불쾌할 수도 있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는 일이다. 평온하거나 즐겁거나 아름다울 수도 있다. 행하지 않으면, 다가서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을 관찰해 담아내는 감독의 관심이 언제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빚어지는 무언가를 비추고 있단 건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홍상수는 사건과 결과에 매이는 여타 창작자들과 궤를 달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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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50스틸컷한국영상자료원

홍상수가 말하는 영화의 미래

그렇다면 영화의 미래는 무엇인가. 그건 정말로 일어나기 전까진 무엇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진실이다. 가능성은 정말이지 모든 것에 존재한다. 무엇이 싹틀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마침내 죽지만 정말 죽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오늘은 아닐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가능성을 불변의 확언으로 만드는 것이 또한 영화란 예술이다.

어떤 일은 정말로 일어나 그곳에 그대로 박제돼 변치 않는 것으로 되어 버린다. 50대50 중 어느 한 가지 가능성이 100이 된다. 50이 100이 되기까지를 관객은 전인미답의 땅에 발을 들여놓는 탐험가의 마음으로 바라본다. 그 안에서도 50대50의 미묘한 긴장이 자리한다. 영화는 과연 그의 영혼을 흔들어 깨울 것인가, 그를 움직일 것인가, 그 의식을 확장할 것인가, 아니면 그렇지 못할까. 정말이지 모든 것이 가능한 일이다.

홍상수의 영화 세계 가운데 이 영화 <50:50>은 분명히 제 자리를 점하고 있다. 이 영화 상영에 앞서 한국영상자료원 직원이 나아가 "이 영화가 홍상수 감독 영화를 더 깊게 이해하도록 도와줄 것"이라 이야기했다. 어쩌면 정말로 그러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 영화를 찍기까지, 베니스가 띄운 질문에 응답한 홍상수의 자세가 결코 안이하지 않았음을 알겠다.

홍상수 전작전 포스터
홍상수 전작전포스터한국영상자료원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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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