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보는 일의 무력함을 생각한다. 여기 벌어지는 일이 있고, 저기 보는 내가 있다. 목격하는 나와 목격되는 것 사이엔 지울 수 없는 거리가 놓인다. 일, 그러니까 있기 전으로는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의 벌어짐이 여기가 아닌 저기에서 일어난다. 여기와 저기 사이만큼, 때로는 그보다도 더, 나와 일 사이엔 거리가 있다. 그 거리를 극복할 수 없다면 지켜보는 일은 오해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도망친 여자>는 홍상수의 24번째 장편영화다(2020년 9월 개봉). 홍상수의 여자이고 그의 페르소나라고 내가 오해하는 김민희의 7번째 출연작이기도 하다. 머리-가슴-배랄까, 세 부분으로 토막난 영화는 주인공 감희(김민희 분)가 세 여자, 그리고 한 남자를 만나는 이야기다. 남편과 5년 간 떨어질 일 없었다는 감희가 남편의 출장으로 주어진 혼자만의 시간을 오래 못 만난 친구들을 만나는 데 쓰기로 한 것이 영화의 출발이다.
시작은 영순(서영화 분)이다. 교외에서 한가롭게 농사지으며 사는 영순은 중년의 이혼녀다. 동성 룸메이트와 살며 마음 편하고 몸 편하게 사는 삶이랄까. 텃밭을 돌보고 버려진 개를 키우며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챙겨주는 게 일과의 전부다. 감희와 식사하며 고기 하나는 끝내주게 굽는 룸메이트를 자랑하는 영순의 모습을 카메라는 꽤나 힘주어 담아낸다. 세대도, 취향도, 이혼녀와 혈연 관계는 아닌 여자동생이라는 좀체 어우러지지 않는 듯한 두 사람의 기묘한 조합이 그런대로 즐거운 일상을 빚어내는 모양이다.
▲도망친 여자스틸컷
한국영상자료원
이 여자의 평범하고 특별한 하루를 보라
일순 평온이 깨지는 순간이 있다. 이웃집 사내가 찾아와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지 말라고 시비를 트는 장면이던가. 영화는 여자들의 선선하고 수수한, 또 다분히 극화된 대화를 무례한 남자의 불유쾌한 언동과 꽤나 의미심장하게 대비한다. 또 하나 인상적인 건 감희의 시선으로, 감희는 두 여성과 불청객 남성 사이의 다툼을 다소 떨어진 자리에서 가만히 목격한다. 이 목격이란 말 대신 '관찰'이란 단어를 써도 딱히 틀리지는 않을 테다.
감희가 다음으로 걸음하는 건 친한 언니 정은(송선미 분)의 집이다. 오랜만에 둘은 정은이 내온 차와 음식을 나누며 그간 밀린 이야기보따리를 푼다. 대부분 풀리는 건 정은의 보따리다. 정은이 인왕산이 내다 보이는 이 멋진, 제대로 된 건축가가 지었다는 빌라에 시세보다 1억 원 쯤 싸게 들어올 수 있었던 건 집주인이 예술가를 우대하는 때문이라고.
감희는 정은이 예술을 한다는 게 금시초문인 듯한데, 정은은 제가 2~3년에 작품 하나 씩을 올리는 무용가라고 말한다. 필라테스를 가르치며 소일하는 그녀는 꽤 오래 교사 생활도 했다는데, 덕분에 모아둔 돈이 전세금을 포함해 10억 원은 된다고. 이런저런 얘기가 나왔다 들어가는 도중에 벨 소리가 울린다.
영희는 정은을 찾아온 어느 젊은 시인이 집에도 들어오지 못한 채 정은에게 거절당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집 안 인터폰 옆에 달린 작은 화면으로 정은이 시인을 거절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한참 뒤에야 다시 집에 들어온 정은으로부터 저간의 이야기, 그러니까 술 먹고 하룻밤 같이 잤으나 질척이는 그를 받아줄 생각은 없다는 얘기를 듣는다. 감희가 '아, 그렇구나' 하는 표정을 지었던가.
▲도망친 여자스틸컷
한국영상자료원
에무시네마서 찍은 특별한 장면
마지막은 보다 노골적이다. 감희는 시간이 좀 남았는지 극장을 찾는다. 복합문화공간인 그 극장에서 일하는 우진(김새벽 분)을 영화는 각별히 인상적으로 등장시킨다. 그리고는 감희와 우진을 한 테이블에 앉힌다. 그로부터 아마도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테이블신이 펼쳐진다.
둘은 한 때 꽤나 친했던 친구였던 모양인데 아마도 남자 문제, 지금은 우진의 남편이 된 이가 엮인 문제로 못 볼 사이가 된 모양. 거듭 사과하는 우진과 저는 별 생각 않고 있다며 내색 않는 감희 사이에 좀체 닿지 않는 말들이 오간다. 그리고 상영시간이 되고, 영화가 상영되고, 끝이 난다.
이번엔 감희가 우진의 사무실을 찾는다. 아까와 달리 둘은 제법 맥락 있는 대화를 주고 받는다. 우진의 남편은 베스트셀러 작가에다 TV에도 나오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는데, 지금도 이 극장 지하에서 북콘서트를 하는 중이라던가. 무튼 우진은 그가 너무 말이 많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 그래서 얘기에 진심이 담기지 않는다며 실망과 비난 사이의 이야기를 마구 쏟아낸다. 언제나처럼 감희는 가만히 들으며 맞장구를 칠 뿐이다.
우진과 헤어져 극장을 나오던 감희가 우진의 남편(유명인)과 마주치는 건 그대로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시종 차분하고 남의 얘기에 동조하기만 하던 감희가 격앙돼 날이 잔뜩 선 말들로 그를 찔러가는 순간이 매섭다. 그 흥분돼 날아간 말들은 얼마나 진심인가.
영화는 비로소 영순과 정은과 우진의 곁에서 목격자로만 존재하던 감희에게 주인공의 자리를 허한다. 그리고 관객은 앞서 감희가 그랬듯 이번엔 그녀 자신의 중한 일을 그녀와 한 걸음 떨어져 목격한다. 처음으로 관객과 감희가 분리된다. 전환이다. 오래 묵은 만큼 재미지는 전환이다.
▲도망친 여자스틸컷
한국영상자료원
'감희'가 '감히'가 되는 그 순간
감희 앞에 선 남자는 제 북콘서트엔 별 관심이 없다. 찾아온 팬들에게도 그렇다. TV에서 매번 같은 말을 반복한다는, 그래서 진심이 없고 말을 죽여야, 혹은 닥쳐야 한다는 감희의 비난에도 초연한 듯 대응하지 않는다. 진심을 잃어버린 '괜찮지 않은 너무나 흔한 한국 남자(앞서 괜찮은 놈 없다며 한국 남자를 싸잡아 비난하던 정은의 말이 꽤나 인상적으로 담겼다)'인 때문일까.
도망치듯 그로부터 벗어나 극장을 나오던 감희가 홱 돌아서선 다시 극장을 찾는 결말이 꽤나 인상적이다. 무엇도 진실로 알지 못하고 목격만 하면서도 훔쳐보기를 포기하지 못하고 아는 체 하는, 안다고 믿는 인간이란 얼마나 괜찮지 못한가. 정은이 한국에는 괜찮은 사람이 얼마나 적은가 한탄했듯이. 그래서 감희는 극장으로 돌아가 사람이라곤 하나도 안 나오는 영화 장면에 빠져드는 것이다. 도망치는 것이다. 관음하는 주제에 아는 척하는, 괜찮지 않은 인간들로부터.
영화 내내 감희는 목격자다. 관망하듯 떨어져 보고 전해 들은 것만으로 안다고 믿고 떠든다. '감히' 감희는 그렇게 한다.
▲홍상수 전작전포스터한국영상자료원
그러니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
홍상수가 저를 투영한 인물들을 배치해 때로는 비판하고, 때로는 변명하는 건 이제는 익숙한 일이다. 그는 우진의 남편처럼 같은 말을 진심 없이 반복하고, 제 팬들에게조차 관심을 두지 않은 채로 제가 하고픈 것만 이어간다. 인간이란 본래 그렇게 생겨먹어서 남 일에 관심 갖길 좋아하고 알지 못하며 떠드는 것일까. 그리하여 그는 감희가 그러했듯 감히 영화로 도망치길 택하고만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지켜보는 일은 무력하고, 나와 바깥의 존재 사이는 좁혀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우리는 끝없이 오해하면서도, 빌어먹을 관용하고 떠드는 '괜찮지 못한' 참견질을 거듭하는 것일지도.
그러나 그렇다고 어찌할 것인가. 홍상수는 같은 말을 반복하며 1년에 2편 씩이나 영화를 성실히도 찍어내고, 관객들은 거듭하여 그 영화를 보러 가는데. 어쩌면 지켜보는 일이란 인간의 가장 인간다운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바로 그래서 예술가는 영화를 만들고, 나는 영화를 보기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일 테다. 언젠가는 조금쯤 더 잘 알기를 꿈꾸면서.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