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분 러닝타임도 끄떡없네... 심은경 연극 데뷔작의 힘

[안지훈의 연극 읽기] 한국적으로 재탄생한 체호프 희곡, 연극 <반야 아재>

"우리 살아가요. 힘겨운 낮과 기나긴 밤들이 영원히 반복되어도, 하루하루 살아나가요."

천만 배우 심은경이 무대 중앙에 서서 수분 동안 홀로 대사를 이어간다. 러시아의 대문호 안톤 체호프의 대표작 <바냐 아저씨>를 한국적으로 번안한 연극 <반야 아재>에서 '서은희' 역을 맡은 심은경의 대사는 반야 아재 '박이보'를 연기하는 배우 조성하를 향하는 동시에, 객석에 앉은 관객들에게 도달해 박수 갈채를 자아낸다.

지난 26일 관람한 연극 <반야 아재>는 공연이 종료되는 31일까지 약 1200석에 달하는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을 전석 매진시킨 화제작이다. 안톤 체호프의 대표 희곡이 대극장에서 공연된다는 소식에 연극 마니아들이 몰려들었고, 심은경의 한국 연극 데뷔작으로 알려지며 일반 관객들도 극장을 찾았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조성하에 더해 손숙, 남명렬 등 연극계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배우들의 출연 소식도 전해지며 화제를 모았다.

 연극 <반야 아재> 공연 사진
연극 <반야 아재> 공연 사진국립극단

러시아의 '바냐 아저씨', 이렇게 바뀌었다

원작 <바냐 아저씨>의 배경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러시아의 시골 영지다. 한때 예술과 학문을 동경했으나 이젠 늙어버린 남자 '바냐'가 작품의 주인공이다. 그는 시골 영지를 관리하며 한평생 매형이자 학자인 '세레브랴코프'의 생활비를 지원했다. 매형이 언젠가 위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길 것을 기대했으나, 변변치 않은 학자로 전락하고 바냐는 한탄한다. 매형의 무능과 이기심이 바냐의 한탄을 한층 심화시키고, 바냐의 어머니까지 매형 편을 드는 탓에 한탄은 분노로 이어진다.

긴 세월의 흐름 속에 켜켜이 쌓여 폭발하는 한탄과 회한을 그려내는 것은 체호프 희곡의 대표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체호프는 굵직한 사건보다는 축적되는 시간에 주목했고, 비범한 능력을 지닌 주인공이나 극적인 해결을 그려내는 것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또 바냐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들의 회한도 그려내며 주인공 외의 캐릭터들도 입체적으로 만들었다.

세레브랴코프의 딸이자 바냐의 조카인 '소냐'는 바냐와 함께 시골 영지에서 일하며 아버지를 후원하는 인물이다. 소냐에게도 회한이 느껴지지만, 오히려 소냐는 한탄하는 바냐를 위로하며 앞으로의 삶을 이야기한다. <바냐 아저씨>의 소냐는 <반야 아재>의 서은희로 재탄생했고, 서두에 소개한 배우 심은경의 긴 독백이 바로 바냐를 위로하는 연극의 명대사다.

소냐는 서은희로, 바냐는 박이보로 재탄생했다. 세레브랴코프는 서병후, 그의 새 아내인 옐레나는 오영란, 바냐의 어머니인 마리야는 양말례로 변신했다. 재탄생은 러시아 시골이라는 배경이 1939년 충북 영동의 한 정미소로 바뀌었기에 가능했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이 겹쳐지며 일본 식민주의의 수탈이라는 또 다른 억압 구조도 <반야 아재>에 담겼다. 익숙한 우리 의복과 말씨를 통해 도시와 시골, 지식인과 노동자 계층의 차이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연극 <반야 아재> 공연 사진
연극 <반야 아재> 공연 사진국립극단

흥행의 또 다른 이유

<반야 아재>가 화제가 된 또 다른 이유는 같은 시기 다른 극장에서 공연 중인 <바냐 삼촌>의 존재다. 국립극단이 백상예술대상, 동아연극상 등을 수상한 중견 연출가 조광화와 손잡고 <바냐 아저씨>를 한국 정서에 맞게 번안한 <반야 아재>를 선보인다면, LG아트센터는 배우 겸 연출가 손상규와 협업해 <바냐 삼촌>을 선보인다.

원작을 번안한 <반야 아재>와 달리 <바냐 삼촌>은 '아저씨'를 '삼촌'으로 바꾸고 일부를 각색한 채 원작의 배경은 유지했다. <바냐 삼촌>이 5월 7일 개막해 22일 개막한 <반야 아재>보다 먼저 관객과 만났다. 개막일은 다르지만 두 작품 모두 31일 폐막하며, 연극 중에서는 드물게 1000석 이상 대극장에서 공연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높은 객석 점유율을 자랑하며 고전 연극의 힘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건, 역시 스타 배우들의 출연이다. <반야 아재>가 조성하와 심은경의 조합을 내세웠다면, <바냐 삼촌>은 이서진과 고아성의 조합을 내세웠다. 이서진과 고아성은 고전으로 생애 첫 연극 도전을 한 셈이다. 연출을 맡은 손상규는 배우 이서진의 '본캐'에서 바냐 삼촌의 이미지가 떠올랐다며 캐스팅 배경을 밝혔고, 손상규의 끈질긴 설득 끝에 이서진이 출연을 결심한 비화도 소개된 바 있다.

국립극단과 LG아트센터라는 대형 프로덕션이 같은 시기에 같은 연극을 상연하는 것은 그 자체로 화제인데, 놀라운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2025년 5월에는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대표작인 <헤다 가블러>를 국립극단과 LG아트센터가 동시에 공연했다. 당시 국립극단은 '연극 여제' 이혜영을 주인공으로 내세웠고, LG아트센터는 '한류 스타' 이영애를 주인공으로 발탁한 바 있다.

 연극 <반야 아재> 공연 사진
연극 <반야 아재> 공연 사진국립극단

정면 돌파 선택한 '반야 아재', 고전의 힘을 증명했다

콘텐츠가 점점 빠르고 자극적으로 변화하는 시대적 흐름에서 연극도 자유로울 수 없다. 최근 대학로 일대 연극들은 러닝타임을 단축하는 것을 중요하게 고려할 정도로 빠른 템포를 추구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70분이라는 <반야 아재>의 러닝타임, 소위 '도파민 터진다'고 수식되는 굵직하고 드라마틱한 사건의 부재는 그야말로 리스크다.

하지만 국립극단은 <햄릿> <벚꽃동산> <헤다 가블러> 등 고전 연극을 선보일 때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당당히 정면돌파를 택했다. 그 결과는 전석 매진을 기록할 정도의 대성공. 국립극단은 <반야 아재>를 통해 느리고 진득한 고전 연극의 힘을 다시 한번 증명해 보였다.

<반야 아재>는 처음부터 끝까지 잔잔하다. 중간에 한번 바냐의 권총 소동이 발생하긴 하지만, 곧이어 다시 잔잔해진다. 잔잔한 일상의 사건들이 축적되어 깊고 심오한 삶의 회한을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연극이 허무주의나 회의주의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엔딩을 장식하는 서은희의 독백은 그럼에도 삶은 살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체호프의 메시지를 그대로 전한다. 긴 시간을 감내한 극중 인물들처럼 170분 동안 객석을 지킨 관객들의 마음은 극장을 빠져나오는 순간 요동친다.

필자가 주목한 한 가지는 무대 중앙에 있는 연못과 그 위의 방(room)이다. 방은 둥근 연못 위로 시계 방향으로 회전한다. 그러다 한 순간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데, 바로 바냐가 분노를 이기지 못해 권총 소동을 벌일 때다. 총알이 빗나가거나 발사되지 않아 권총 소동은 무산되지만, 여기서 방의 회전 방향에 담긴 의미를 나름대로 유추할 수 있었다.

시계 방향으로의 회전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 반시계 방향으로의 회전은 주어진 것에 저항하는 시도를 함축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 저항은 우습게 실패하고, 방은 다시 시계 방향으로 회전한다. 시곗바늘처럼 돌아가는 무대가 종국에 가리키는 건 켜켜이 쌓인 일상을 통해 드러난 운명의 굴레, 더 냉정히 말하자면 구조적 억압이다. <반야 아재>, 그리고 체호프의 고전은 미시적 일상을 통해 거시적 구조를 저격했다는 점에서 대담한 시도가 아닐 수 없다.

 연극 <반야 아재> 공연 사진
연극 <반야 아재> 공연 사진국립극단
공연 연극 반야아재 바냐아저씨 국립극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