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는 화성에 도착하기 일주일 전 일어났다."
연극 <화성에서의 나날>(작·연출 윤성호)을 여는 짧은 문장이다.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사고가 났다. 시작하기도 전에 실패는 예고되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간다. 지구에서 화성으로, 현재에서 미래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혹은 희망이라는 이름의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말이다.
제47회 서울연극제 공식선정작 <화성에서의 나날>은 화성을 배경으로 한 공상과학(SF) 연극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바라보는 것은 우주가 아니라 인간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끝을 예감하면서도 다시 시작하려는 인간의 끈질긴 생명성을 다룬다. 무대 위 화성은 붉은 행성이지만, 그곳에 갇힌 두 사람의 말과 침묵을 따라가다 보면 관객은 어느새 지구의 풍경을 떠올린다. 우리가 망가뜨린 세계, 그럼에도 우리가 사랑했던 세계,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리워지는 세계를 말이다.
공연이 펼쳐진 곳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이다. 관객이 극장 안으로 들어서는 방식부터 낯설다. 일반적인 공연처럼 정문 게이트를 지나 객석으로 향하지 않는다. 관객은 극장 2층 사이드 동선을 따라 무대 옆으로 진입한다. 이 때부터 극장은 익숙한 관람의 방향을 잃는다. 무대와 객석, 바라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의 위치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극장 안에 들어서면 더 분명해진다. 객석은 기존 대극장 객석을 그대로 쓰지 않는다. 러너웨이 양쪽에 관객을 앉힌 것처럼 가변식 좌석이 놓여 있다. 약 100명 남짓의 관객이 양쪽으로 나뉘어, 가운데를 바라본다. 관객은 서로를 마주 보기도 하고, 그 사이를 오가는 배우를 보기도 한다. 무대 중앙에는 바퀴 달린 이동형 의자가 열 개가량 흩어져 있다. 그 의자들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다. 우주선이고, 행성의 표면이고, 인물들의 불안정한 몸을 지탱하는 중요한 도구다.
두 배우는 그 의자에 앉고, 밀고, 타고, 미끄러지듯 이동한다. 바닥에 단단히 붙어 걷는 것이 아니라, 무중력의 상태로 떠다니는 듯한 움직임을 잘 표현했다. 앉아 있지만 떠 있고, 멈춰 있지만 흔들린다. 그 미끄러짐은 화성으로 가는 우주선의 감각이자, 목표를 잃은 인간의 상태로 보인다.
두 객석 사이에는 천장에서 커다란 판이 내려오며 공간을 둘로 가른다. 양쪽으로 나뉜 관객은 같은 장면을 보면서도 서로 다른 거리와 각도에서 본다. 함께 있으나 완전히 닿지 못하고, 같은 공간에 갇혔으나 같은 절망을 겪지는 못하는 두 사람. 무대 구성은 처음부터 이 연극이 화성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인간 사이의 거리감을 예고한다.
지속 가능하지 않은 세계에서 떠난 사람들
▲연극 '화성에서의 나날' 공연 장면
촬영 FOTOBEE/ 제공 서울연극협회
작품 속 지구는 이미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세계 인구는 35억 명까지 줄어들었다. 기후위기는 더 이상 경고가 아니라 결과가 되었다. 해수면은 상승했고, 바다는 병들었고, 농업은 무너졌고, 도시는 침수와 산불과 질병 앞에서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경고는 있었고, 확률은 높아졌고, 과학은 더 명확해졌다. 하지만 확률의 증가는 대처의 증가로 이어지지 않았다.
인간은 몰라서 망한 것이 아니다.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개인은 자기 삶을 살아내느라 벅찼고, 국가는 집단의 복잡성 속에서 늦었고, 사람들은 익숙한 생활 수준보다 더 불편해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렇게 '지속 가능'이라는 말은 점점 무의미해졌다.
그 폐허 위에서 화성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2029년 화성 북반구에 거대한 얼음 소행성이 충돌하고, 대기량이 증가하고, 물이 생성된다. 화성에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한국을 포함한 7개국은 화성 탐사 계획에 착수하고, 무인 로켓으로 물자를 먼저 보낸 뒤, 5년간의 교육 훈련을 거쳐 최종 7인의 개척대원을 선발한다. 이들이 오르는 우주선은 돌아올 수 없는 편도행이다.
이것은 과학의 진보인가, 정치의 이벤트인가, 인류의 희망인가, 아니면 지구가 더는 감당할 수 없게 된 절망의 유배인가. 작품은 그 어느 하나로 단정하지 않는다. 출발 현장에는 군중과 카메라와 기자와 정부 관계자와 국회의원이 있다. 그리고 온갖 시위대도 있다. 우주 탐사는 자원 낭비라는 사람들, 화성으로 가는 것은 신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라는 사람들, 지구 위기는 거짓이라는 사람들, 화성 탐사 자체가 음모라는 사람들. 그 소란 속에서 개척대원들은 우주선에 오른다. 마치 거대한 역할극 속 자기 자리를 향해 걸어가듯이.
그들은 영웅처럼 보이지 않는다. 7인의 개척대원은 인류를 구하러 떠나는 기념비적 존재가 아니라, 각자의 상처와 욕망과 회피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다. 누군가는 인류를 위해 왔다고 말하지만, 그 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시간이다. 누군가는 화성에서 자전거를 타고 싶어 하고, 누군가는 공원을 만들고 싶어 한다. 누군가는 더 오래 살고 싶었을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죽기 위해 왔을지도 모른다. 거대한 명분은 언제나 아주 사적인 상처 위에 세워진다.
화성 착륙을 앞두고 사고가 일어난다. 우주선은 불시착하고, 통신은 끊기고, 동료들은 사라진다. 남은 것은 몇 년 치 식량과 산소 발생기, 그리고 서로만 남은 두 사람이다. 환과 욱. 그들은 무엇을 하든, 무엇을 하지 않든, 끝까지 함께 있어야 한다.
가장 끔찍한 것은 이들이 곧바로 죽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산소도 있고, 식량도 있다. 운동도 할 수 있고, 죽을 때까지 봐도 다 볼 수 없을 만큼의 영화와 드라마와 음악도 있다. 생명에는 당분간 지장이 없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더 잔혹하다. 살아가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살아갈 이유가 없다. 몸은 살아 있는데 목표가 사라졌다. 이것이 이 연극의 진짜 조난이다.
목표 없는 이인극, 그래도 끝낼 수 없는 삶
▲연극 '화성에서의 나날' 공연 장면
촬영 FOTOBEE/ 제공 서울연극협회
<화성에서의 나날>은 우주 조난극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속살은 부조리극에 가깝다. 환과 욱은 기다린다. 구조선을 기다리고, 통신 회복을 기다리고, 모래 폭풍이 그치기를 기다리고, 어쩌면 자신들의 끝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이 기다림은 구원의 확신이 아니다. 아무것도 오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지속되는 기다림이다.
두 사람은 일지를 쓴다. 노래를 튼다. 게임을 한다. 농담을 한다. 신나는 이야기를 해보자고 한다. 말도 안 되는 종교 놀이도 한다. 화교, 수교, 금교, 지교 같은 터무니없는 종교를 만들어내고, 하느님의 질량을 따지고, 천국이 태양계 밖에 있는지 묻는다. 객석에서는 웃음이 난다. 그런데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는다. 말장난은 자꾸 죽은 사람의 이름에 닿고, 농담은 실패한 구조와 끊어진 통신과 사라진 식량으로 돌아간다.
이들의 장난은 웃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다. 대화는 생존 장치다. 서로를 붙잡기 위한 줄이다. 그러나 그 줄은 자꾸 팽팽해지고, 어느 순간 끊어질 듯 흔들린다. 혁이의 죽음이 그 중심에 있다.
젊고 밝았던 혁이는 모두가 안쓰러워하면서도 기대던 사람이다. 그는 우주선 외부 수리 중 생명줄이 끊어져 우주 공간으로 멀어진다. 남은 사람들은 손을 뻗지만 닿지 않는다. 더 잔혹한 것은 무전이 한동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가족에게 말을 남기고, 선장과 대화를 나누고, 끝내 "지구가 안 보여"라고 말한다. 그 한마디는 이 작품에서 가장 외로운 문장이다. 인간이 우주에서 죽는다는 것은 마지막 순간 돌아갈 곳의 모습마저 잃는다는 뜻이다.
욱에게는 또 다른 상실이 있다. 그는 딸을 잃었다. 기후변화로 확산된 질병 앞에서 아이는 너무 일찍 죽었다. 아내는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아내가 남긴 쪽지에는 화성이 있었다. 딸이 화성을 좋아했다는 말, 딸은 여기가 맞지 않아 화성에 간 것이라는 말, 자신도 같이 가야 할 것 같다는 말. 욱에게 화성은 인류의 미래가 아니라 죽은 딸과 아내가 있을지도 모르는 장소다. 과학적 가능성이 아니라 상실의 방향이다.
그래서 환과 욱의 충돌은 단순한 성격 차이가 아니다. 환은 미래를 보려 한다. 구조선이 올 것이라고 믿고, 버티고, 다시 시작하려 한다. 욱은 희망의 잔혹함을 본다. 희망은 사람을 살리지만, 때로 사람을 너무 오래 고통 속에 붙잡아둔다. 욱은 말한다. 이제 희망하지 말자고. 환은 말한다. 살아서 돌아갈 거라고. 너도 같이 돌아갈 거라고.
이 대립은 쉽게 어느 한쪽의 승리로 정리되지 않는다. 희망은 필요하다. 그러나 희망은 때로 폭력적이다. 절망은 위험하다. 그러나 절망은 때로 거짓을 멈추게 한다. 환이 식량 절반을 우주로 날려버렸다고 고백하는 순간, 이 연극은 가장 차가운 곳까지 내려간다. 그는 더는 못하겠다고 말한다. 네가 영원히 시작하는 것을 더는 못 보겠다고 말한다. 그것은 배신이면서 구조 요청이다. 함께 살아남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함께 죽어가는 일일 수 있다는 것을, 작품은 잔인할 만큼 정직하게 보여준다.
▲연극 장면
촬영 FOTOBEE/ 제공 서울연극협회
후반부로 갈수록 이 작품의 공간 사용은 더 흥미로워진다. 배우들은 중앙의 좁은 길 위에만 머물지 않는다. 대극장 본래의 붉은 객석 사이를 오가며 화성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객석의 빨간 의자는 그 자체로 화성의 붉은 흙이 된다. 관객이 보통 무대를 바라보는 자리였던 곳이 어느 순간 행성의 표면처럼 보인다. 아무도 앉지 않은 붉은 의자들 사이를 두 배우가 걸어갈 때, 그 빈 공간은 이상한 울림을 만든다. 사람이 사라진 도시 같기도 하고, 모래 폭풍이 지나간 뒤의 화성 같기도 하다. 극장은 더 이상 극장이 아니라, 생명이 거의 사라진 행성의 표면이 된다.
이 장면이 인상적인 까닭은 단지 무대가 특이하게 쓰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객석과 무대의 위치가 뒤바뀌는 순간, 관객은 자신이 안전하게 바깥에서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느낀다. 우리가 앉아야 할 자리, 우리가 세계를 구경하던 자리가 붉은 폐허가 된다. 배우들이 그 사이를 지나갈 때, 관객은 화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비워낸 지구의 미래를 보는 듯한 감각에 놓인다. 이 연극에서 화성은 멀리 있는 행성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만들어가고 있는 어떤 풍경이다.
후반부, 화성에 비가 내린다. 현실인지 환상인지 분명하지 않다. 우주복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진동, 묘지를 지나고, 태양광 화분으로 꾸민 작은 공원을 지나고, 물줄기 앞에서 작게 움직이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욱은 화성의 생명과 마주한다. 그는 묻는다. 너는 누구냐. 언제부터 여기 있었느냐. 영원히 사느냐. 그리고 끝내 딸을 찾는다. "혹시 아이 하나 오지 않았어?" 네 살 되기 전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이. 웃을 때 보조개가 있고, 화성을 좋아했다던 아이.
그 순간 하늘에서 우주선이 보인다. 구조선이다. 환이 말했던 미래다. 환이 맞았다. 그것은 시작이다. 그러나 욱은 곧 묻는다. 그렇다면 우리 딸은 어디 있느냐. 하느님은 어디 있느냐. 미래가 온다고 해서 과거의 상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구조선이 온다고 해서 혁이가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살아남는다고 해서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살아남고, 살아남은 자는 다시 살아야 한다. 이것은 축복이면서 형벌이다.
▲연극 화성에서의 나날 공연 장면촬영 FOTOBEE/ 제공 서울연극협회
작품은 쉽게 위로하지 않는다. 귀환의 장면은 꿈처럼 무너진다. 푸른 땅은 붉은 흙으로 바뀌고, 아스팔트와 건물과 사람들이 사라진다. 동물도 식물도 강과 바다도 미생물도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는 꿈에서 깨어난다. 구조선은 정말 왔는가. 그는 정말 돌아갔는가. 아니면 화성의 고립 속에서 마지막으로 지구를 꿈꾸었는가.
정답은 없다. 대신 질문을 던진다. 왜 살고자 하는 이는 죽고, 죽고자 하는 이는 살아남는가. 희망은 거짓인가. 아니면 거짓인 줄 알면서도 인간을 살게 하는 마지막 장치인가. 실패한 뒤에도 시작한다는 것은 용기인가, 습관인가, 저주인가.
마지막에 남는 말은 다시 "시작"이다. 이 말은 밝지 않다. 씩씩하지도 않다. 오히려 너무 지친 사람이 겨우 몸을 일으키며 내뱉는 말에 가깝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진실하다. 인간은 위대해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답을 알아서 다시 시작하는 것도 아니다.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옆에 누군가 있기 때문에, 죽은 이들의 꿈이 등 뒤에 남아 있기 때문에 다시 시작한다.
<화성에서의 나날>은 화성에 관한 연극이 아니라 지구에 관한 연극이다. 더 정확히는 지구를 망가뜨리고도 끝내 지구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인간에 관한 연극이다. 우리는 실패한다. 또 실패한다. 그러면서도 밥을 먹고, 음악을 틀고, 농담을 하고,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 다시 시작한다.
극장을 나서면 묻게 된다. 우리가 지금 사는 이곳도 이미 어느 정도는 화성 아닌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고립되어 있고, 희망을 말하지만 믿지 못하며, 끝을 예감하면서도 내일의 일정을 잡는 세계.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간다. 무언가를 하고, 하지 않고, 다시 말하고, 다시 기다린다. 그래서 이 연극의 붉은 화성은 멀리 있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서 있는 세계의 다른 이름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20여 년간 문화예술계에서 글을 써왔다. 월간지<문화+서울> 편집장(2013~2022)으로, 한겨레신문 필진(2016~2023)으로 취재와 예술가를 인터뷰했다. 현재는 서울 대학로 일대에서 공연&전시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을 만나 이아기를 전하며, '서울문화투데이'와 '더프리뷰' 등 매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