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달빛이다. 검푸른 어둠 속에 둥근 달이 걸려 있다. 그 아래로 억새가 무대 가장자리까지 번져 있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억새는 흔들리는 것 같다. 무대 중앙에는 기울어진 너럭바위. 집 같기도 하고, 마당 같기도 하고, 누군가 오래 앉아 울다 간 자리인 듯하다. 바위는 단단하지만 반듯하지 않다. 애초에 이 세계가 기울어져 있다는 듯, 무대 한가운데 비스듬히 놓여 있다. 연극 <춘섬이의 거짓말>(작·연출 김정숙)은 바로 그 기울어진 세계 위에 한 여자를 세운다. 이름은 '춘섬'이다.
우리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로 알려진 홍길동을 잘 안다. 적서차별과 신분제의 모순이 <홍길동전>의 핵심이라는 사실도. 그러나 그 문장 이전에 한 여자가 있었다는 사실에는 무심했다. 홍길동이라는 이름은 영웅담의 중심에 남았지만, 그를 낳은 어머니는 이름보다 역할로 기억됐다. 홍길동의 분노는 문학사에 남았지만, 춘섬의 고통은 관심 바깥이었다. <춘섬이의 거짓말>은 그 빈칸으로 들어간다. 홍길동의 어머니, 혹은 영웅의 배경으로 불리던 여자를 무대 중앙으로 불러낸다. 그리고 묻는다. 홍길동은 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단지 한 남자의 울분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그 울분이 태어나기 전, 한 여자의 몸에는 어떤 일이 지나갔는가.
춘섬은 열여덟 살이다. 홍대감 댁에서 대대로 종살이를 해온 집의 딸이다. 그는 숯 굽는 개불이와 마음을 나누며 장래를 꿈꾼다. 그 꿈은 크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자기 몸을 자기 뜻대로 두고,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이라 부르는 정도다. 그러나 그 소박한 꿈조차 춘섬에게는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가난한 부모는 딸을 씨받이로 보낼 생각을 한다. 태몽을 꾼 홍대감은 세상을 바꿀 아이가 태어날 운명이라 믿고 춘섬을 자기 욕망의 자리로 끌어당긴다. 그 순간 한 여자의 몸은 사랑의 자리가 아니라 가문과 권력과 남성의 운명이 지나가는 통로가 된다. 이것이 이 작품이 붙잡는 지점이다. 홍길동의 출생을 영웅의 시작으로만 보지 않고, 한 여성의 상처와 선택의 시간으로 다시 읽는다.
거짓말은 어떻게 삶을 지키는 말이 되는가
▲연극 <춘섬이의 거짓말> 공연 장면
촬영 FOTOBEE/ 제공 서울연극협회
연극 제목은 <춘섬이의 거짓말>이다. 그러나 무대를 보고 있으면 이 거짓말이 우리가 흔히 아는 거짓말과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다. 춘섬은 자기 이익을 위해 누군가를 속이지 않는다. 책임을 피하기 위해 말을 꾸미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진실이 짓밟히지 않도록 거짓말을 한다. 진실을 말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세계가 있다. 양반의 말은 진실이 되고, 종의 말은 거짓이 되는 세계가 있다. 그 안에서 춘섬은 말 하나를 붙잡는다. 그 말은 위험하지만, 그에게 남은 거의 유일한 도구다. 춘섬의 거짓말은 죄가 아니라 생존의 방식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진실을 지키기 위해 택한 마지막 말이다.
무대는 이 마음을 말보다 먼저 보여준다. 달빛 아래 억새밭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에는 불안이 섞여 있다. 억새는 부드럽지만 날카롭고, 흔들리지만 쉽게 꺾이지 않는다. 춘섬의 삶도 그렇다. 그는 흔들린다. 두려워한다. 무너질 뻔하다. 그러나 끝내 자기 말을 만든다. 무대 중앙의 너럭바위도 흥미롭다. 그것은 대감 댁 대청이 되었다가, 춘섬의 방이 되었다가, 사람들이 모여드는 마당이 된다. 무대장치가 크게 바뀌지 않아도 공간은 계속 달라진다. 홍대감이 그 바위 위에 있을 때 그것은 권위처럼 보인다. 춘섬이 앉아 있을 때 그것은 외로운 방처럼 보인다. 여인들이 함께 모여 앉을 때는 세상의 눈을 피해 숨 쉬는 작은 공동체가 된다.
붉은 천이 펼쳐지는 순간에는 무대 온도가 바뀐다. 달빛과 억새가 만들던 푸른 정서는 붉은빛 앞에서 뜨거워진다. 그 붉음은 사랑 같기도 하고, 피 같기도 하고, 출산의 고통을 지나 생명으로 번지는 빛 같기도 하다. 춘섬이 감당해야 하는 운명은 말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색이 되고, 천이 되고, 몸의 떨림이 된다.
이 작품은 춘섬을 불쌍한 피해자로만 세우지 않는다. 그는 억압받는다. 선택을 빼앗긴다. 그러나 끝내 자기 삶을 남의 손에만 맡기지 않는다. "이건 너하고 나하고 짓는 팔자여!"라는 대사는 그래서 크게 울린다. 팔자는 주어지는 것이라 여겨지던 시대에, 춘섬은 팔자를 짓겠다고 말한다. 그것도 혼자 짓는 것이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와 함께 짓겠다고 말한다. 그 순간 거짓말은 부끄러운 말이 아니다. 자기 삶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된다.
배우들이 지켜내는 무대의 온도
▲연극 춘섬이의 거짓말 공연 장면
촬영 FOTOBEE/ 제공 서울연극협회
<춘섬이의 거짓말>은 한 여자의 이야기이지만, 혼자의 이야기는 아니다. 춘섬 곁에는 어머니가 있고, 안방마님의 몸종 쫑쫑이가 있고, 홍대감 댁 찬모 끝네가 있다. 이들은 영웅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큰 구호를 외치지도 않는다. 대신 밥을 짓고, 말을 삼키고, 문을 닫고, 누군가의 눈치를 살핀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서로의 편이 된다. 그 연대는 정치적 선언보다 생활에 가깝다. 그래서 더 마음에 남는다. 여성들이 서로의 곁에 앉는 장면은 이 작품의 가장 따뜻한 순간이다. 그들은 대단한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다만 무너지지 않기 위해 서로의 곁에 앉는다. 그 단순한 행위가 이 무대에서는 강한 장면이 된다.
배우들의 안정감도 이 공연의 큰 힘이다. 출연 배우들은 발성이 단단하고 감정선이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전통 연극의 호흡을 오래 익힌 배우들이 참여해서인지 말맛과 몸의 중심이 좋다. 대사가 관념으로 흐를 수 있는 순간에도 배우들은 그것을 몸으로 붙잡는다. 과장하지 않는데도 감정이 전달되고, 격정으로 밀어붙이지 않아도 장면의 결이 무너지지 않는다. 쫑쫑이와 끝네 같은 인물들은 극의 숨을 바꾼다. 춘섬의 고통이 무겁게 내려앉을 때, 이들은 웃음과 생활의 감각을 끌어온다. 그 웃음은 가볍지 않다. 차별과 폭력의 세계를 너무 잘 아는 사람들이 겨우 만들어내는 웃음이다. 관객은 그 웃음 속에서 슬픔을 느낀다. 웃고 있지만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 그래도 살아야 하기에 웃는 사람들의 몸짓이 거기에 있다.
안방마님 역시 단순한 악역으로만 남지 않는다. 그는 홍대감의 정실부인이라는 자리에 있지만, 그 자리 또한 온전한 권력의 자리는 아니다. 가문의 질서 안에서 그는 또 다른 방식으로 갇혀 있다. 그가 춘섬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질투와 모멸, 불안과 체념이 뒤섞인다. 작품은 인물들을 쉽게 선악으로 나누지 않는다. 홍대감의 욕망은 분명한 가해의 구조를 만들지만, 그 주변의 인물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그 구조 안에 묶여 있다.
무대와 연출은 파격보다 정공법을 택한다. 달빛 아래 억새밭, 기울어진 너럭바위, 붉은 천은 작품의 정서를 분명하게 만든다. 억새는 흔들리지만 꺾이지 않는 춘섬의 삶을 떠올리게 하고, 기울어진 바위는 애초부터 불균형한 세계를 상징한다. 붉은 천은 사랑과 피, 출산과 수치, 생명의 기운을 동시에 품는다. 이 이미지들은 과장되지 않고 작품의 중심을 성실하게 떠받친다. 정공법은 때로 익숙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그 익숙함은 단점으로만 남지 않는다. 오히려 고전의 빈자리를 차분히 들여다보게 하는 힘이 된다. 관객을 놀라게 하기보다 한 인물을 오래 바라보게 한다. 그 성실한 시선 위에 배우들의 안정된 연기가 얹히면서, 무대는 끝까지 흐트러지지 않는다.
춘섬은 왜 다시 불려야 하는가
▲연극 장면촬영 FOTOBEE/ 제공 서울연극협회
지난달 23일 본 작품에서 가장 아프게 남는 건 어머니라는 이름이다. 이 작품에서 어머니는 숭고한 희생의 상징으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춘섬은 아이를 위해 자신을 지우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아이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다시 알아가는 사람이다. 철부지 어린 여자였던 춘섬이 어머니가 되어간다는 것은 갑자기 성인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 몸에 닥친 일을 외면하지 않고, 자기 삶의 책임을 스스로 끌어안는 과정이다.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이 작품에서 침묵하는 일이 아니다. 말하는 일이다. 참는 일이 아니라 판단하는 일이다. "날 거짓말쟁이라고 욕해도 좋아요. 하지만 이 아이도 나도 진짜 참이어요." 이 말은 춘섬이 세상에 던지는 가장 아픈 항변이다. 진짜와 가짜를 누가 정하는가. 양반의 말은 진실이 되고 종의 말은 거짓이 되는 세계에서, 춘섬은 자기 존재가 참이라고 말한다.
그 말은 논리적 설득이 아니다. 몸으로 버텨낸 사람의 증언이다. 그래서 객석은 이 대사 앞에서 조용해진다. 춘섬의 말은 오래된 조선의 말 같지만, 동시에 지금 여기의 말이기도 하다. 오늘도 많은 사람의 삶은 타인의 이름 뒤에 가려진다.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어머니라는 말은 때로 한 사람의 고유한 이름을 지운다. 어떤 고통은 사건이 되고, 어떤 고통은 사연조차 되지 못한다. <춘섬이의 거짓말>은 그 보이지 않는 자리를 무대 위로 끌어올린다. 역사와 설화 속에서 눌려 있던 여성이 사실은 자기 방식으로 싸우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극단 모시는사람들이 이어온 '조선여자전'의 흐름도 이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맥락이다. 고전 속 여성들은 오래도록 누군가의 사랑을 증명하거나, 누군가의 효심을 완성하거나, 누군가의 영웅성을 빛내기 위한 인물로 소비되어 왔다. 이 작품은 그 틀을 뒤집는다. 춘섬은 홍길동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는 춘섬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자기 몸과 자기 아이와 자기 운명을 두고 끝내 물러서지 않기 때문에 중요하다. <춘섬이의 거짓말>은 거대한 파열보다 조용한 복원의 힘을 지닌 작품이다. 홍길동의 어머니를 배경이 아니라 인물로, 운명이 아니라 선택하는 사람으로 무대 위에 세운다. 고전의 바깥에 있던 이름을 불러와, 그 이름 안에 사랑과 두려움과 거짓말과 결단을 채운다.
공연이 끝난 뒤 오래 남는 것은 홍길동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춘섬의 얼굴이다. 그리고 그 곁에 앉아 있는 여자들의 손이다. 춘섬은 세상을 바꿀 영웅을 낳기 때문에 중요한 인물이 아니다. 자기 삶이 짓밟히는 순간에도 자기 방식으로 참을 지키려 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의 거짓말은 세상을 속이는 말이 아니라, 세상이 외면하는 진실을 끝까지 놓지 않기 위한 말이다.
달빛 아래 억새는 흔들린다. 이야기는 아주 낯선 길로 달려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 흔들림 속에서 춘섬이라는 이름 하나가 다시 보인다. 그것만으로도 이 공연은 제 몫을 다한다. 팔자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가장 약한 사람들이 서로의 손을 붙잡고 다시 짓는 것이라고. <춘섬이의 거짓말>은 그 말을 오래된 고전의 빈칸 위에 조용히 새겨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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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문화예술계에서 글을 써왔다. 월간지<문화+서울> 편집장(2013~2022)으로, 한겨레신문 필진(2016~2023)으로 취재와 예술가를 인터뷰했다. 현재는 서울 대학로 일대에서 공연&전시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을 만나 이아기를 전하며, '서울문화투데이'와 '더프리뷰' 등 매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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