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조한 히틀러가 예상하지 못한 한 가지

[리뷰] tvN <벌거벗은 세계사>

아돌프 히틀러(나치 독일)와 이오시프 스탈린(소련)은 나란히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로 꼽히는 인물들이다. 운명처럼 동시대에 활동했던 두 독재자가 맞붙게 된'독일-소련전쟁'은 2차세계대전의 향방을 가른 전쟁이자, 전후의 세계질서에도 큰 영향을 미친 대사건이었다.

25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히틀러 VS 스탈린, 최후의 대결, 독소전쟁'편을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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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독일의 정권을 장악한 이후, 베르사유 조약을 폐기하고 대대적인 군사력 증강과 극단적 인종주의를 내세워 유럽의 평화를 위협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러한 히틀러의 영토확장에 위협을 느끼고 뒤늦게 대응에 나섰다.

서유럽 제패를 노렸던 독일에게 전쟁의 최대 걸림돌은 바로 배후의 소련이었다. 히틀러는 내심 공산주의를 혐오했지만, 현실적으로 양면 전선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전략상 동쪽의 소련을 적으로 돌리지 않아야만 했다.

소련도 이미 히틀러와 나치독일의 위험성을 일찍이 경계하고 있었지만,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고위 장교들이 줄줄이 숙청되거나 목숨을 잃고 대혼란에 빠지면서 당장 독일과의 전쟁을 감수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또한 스탈린은 영국과 프랑스가 나치 독일의 위협 앞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고, 서방보다 히틀러와 손을 잡는 것이 더 실리적이라고 판단했다.

1939년 8월 23일, 독일과 소련은 결국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며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당시 미국은 히틀러과 스탈린을 신혼부부에 비유한 만평을 올리며 '달콤한 신혼생활이 얼마나 오래 갈까'라고 비꼬면서 물과 기름 같은 두 독재자의 동맹이 어차피 오래 가지 못할 불안한 관계임을 예언했다.

소련의 위협을 차단한 독일은 마침내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2차대전을 일으킨다. 독일은 파죽지세로 유럽 전역을 정복해 나갔고, 1940년 5월에는 프랑스까지 점령하며 서유럽 일대를 손아귀에 넣게 된다. 하지만 섬나라인 영국은 고립된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저항을 계속됐다.

히틀러의 선택

전쟁이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초조해진 히틀러에게는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히틀러가 타깃을 변경하며 영국에서 눈길을 돌린 것은 바로 소련이었다. 히틀러는 일시적으로 불가침조약을 선언하기는 했지만, 이념과 인종이 다른 소련을 적대하며 언젠가는 무너뜨려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히틀러는 강대국인 영국보다 소련이 더 정복하기 수월한 상대라고 생각했고 장기전을 대비하여 소련의 광대한 자원을 손에 넣으려는 야심을 품었다.

히틀러는 외교적 기만전술로 소련의 침공 계획 사실을 철저히 은폐했다. 방심하고 있던 소련은 불가침조약의 일환으로 독일에 다양한 물자까지 지원했다. 사실 소련도 정보전을 통하여 독일의 대규모 병력이동과 침공 준비에 대한 첩보를 입수했지만, 정작 최고지도자인 스탈린은 이를 '독소관계의 결렬을 바라는 영국의 음모'로 치부하며 전혀 믿지 않았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실행하며 전체 독일군의 80%에 이르는 148개 사단, 약 350만의 지상군이 투입되어 독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침공작전을 펼친다. 바로 2차대전의 운명을 바꿀 독소전쟁의 시작이었다.

전쟁 초반에는 독일이 기습공격으로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지 3개월 만에 소련의 주요 거점도시를 점령하고 승승장구한다. 독일의 침공에 전혀 대비하지 못했던 소련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삼면으로 침공한 독일 지상군은 주요 도시인 키이우를 함락하고 레닌그라드를 포위하여 수도 모스크바로 진격한다.

침공 직후만 해도 히틀러의 배신을 믿지 못했던 스탈린은 뒤늦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며 뼈저리게 후회했다고 한다. 1941년 7월 3일 스탈린은 공식 입장을 발표하고, 독일에 대한 단호한 항전 의지를 밝힌다.

복수를 선언한 소련은 먼저 무기공장과 기계시설을 모두 해체하고 우랄산맥 동쪽으로 이동시켰다. 1941년 말까지 대형군수공장 약 1500여개와 2500만명의 노동자가 동쪽을 이동하며 전쟁을 위한 대규모 군수공장 단지를 건설한다. 이렇게 건설된 산업시설은 훗날 독일을 향한 반격에 중요한기반이 된다. 소련을 낙후된 원시적인 국가로 얕보고 전쟁을 조기에 끝낼 것이라고만 믿었던 히틀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독일은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에 병력을 집결시켜 총공세에 나선다. 하지만 스탈린은 모스크바에서 직접 열병식을 주관하는 퍼포먼스를 보이며 단호한 항전의지를 드러냈다.

설상가상 독일이 예상하지 못한 또 다른 변수는 소련의 '날씨'였다. 모스크바로 진격한 독일 기갑군은 해빙기와 폭우로 도로가 진흙탕이 되는 라스푸티차 현상으로 인하여 진군과 보급품수송에 애를 먹었다. 여기에 겨울에 접어들며 소련 특유의 극심한 한파가 독일군을 덮쳤다. 겨울이 오기 전에 소련을 정복할 줄 알았던 독일군은 방한 대비가 되어있지 않아 곤경에 처했다. 모스크바 전투에 참전했던 독일군의 동상 환자만 2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소련은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독일의 침공을 격퇴하며 본격적인 반격의 서막을 알린다. 자신의 계획이 틀어지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히틀러는, 지휘관들에게 모스크바 공격을 독촉하며 고언을 하는 지휘관은 해임하는 등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1942년 독일은 소련의 보급선을 끊기 위하여 병력을 재정비하여 주요 물자가 집결되는 산업도시 스탈린그라드를 공격한다. 이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독소전쟁의 최대 격전지이자 인류 역사상을 통틀어서 가장 치열하고 처절한 전투로도 회자된다. 이 전투에서만 독일군 약 20만, 소련군 약 40만의 병력이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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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한때 스탈린그라드의 90%를 장악하며 승리를 눈앞에 뒀다. 하지만 소련군의 지휘관 게오르기 주코프는 독일군의 역포위하는 '천왕성 작전'을 시행하여 전세를 극적으로 뒤집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에서 무려 30만 명의 독일군 포로가 사로잡혔고 소련은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다. 이전까지 백전무패를 달리던 군사 강대국 나치 독일을 최초로 지상전에서 격퇴하고 포위까지 성공한 소련의 저력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한다.

기세를 탄 소련은 1943년 7월 '쿠르스크 전투'에서는 독일이 자랑하던 정예 기갑군을 완전히 격퇴하며 독소전쟁의 승기를 잡게 된다. 1943년 8월부터 공세로 전환한 소련군은 독일이 차지했던 폴란드와 동유럽 일대를 점령하며 독일 본토까지 몰아붙였다. 1945년 4월에 이르면 소련군은 독일의 수도 베를린 코앞까지 진격하게 된다. 미국은 물자보급에 허덕이던 소련군을 위하여 전투식량인 '스팸' 등 다양한 보급품을 지원했다.

1945년 4월 21일, 소련은 마침내 베를린을 향한 마지막 총공세에 나선다. 나치 독일은 최후의 발악으로 노약자와 소년병까지 징집하며 저항했지만 이미 전세는 기울어진 뒤였다. 치열한 전투 끝에 베를린은 페허가 되었고, 약 40만 명의 독일군이 포로로 잡히게 된다. 소련군은 베를린의 심장부인 독일 제국 의사당에 소련의 깃발을 꼽는 데 성공하며 승리를 선언했다.

히틀러는 베를린의 지하벙커에 은신해 있었으나 패색이 짙어지자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그는 자신의 시신이 적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모두 불태울 것을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히틀러가 사망한 후, 1945년 5월 7일, 독일은 결국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1941년 6월부터 1945년 4월까지 이어진 독소전쟁은 소련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희생자를 남긴 이 전쟁은, 지도자의 잘못된 오판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를 수 있는지, 독일과 소련 모두에게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독일은 이후 분단국가가 되어 한동안 분할통치를 받아야 했다. 또한 2차대전이 막을 내린 후 전 세계는 미국과 서방이 주도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소련이 주도한 공산주의로 나뉘어 '냉전'체제라는 또 다른 긴장 관계에 빠져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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