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형 인공지능(AI)이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는 현재, '예술'은 무슨 의미를 가질까? 작가나 기자라는 직업을 꿈꿔온 내게 요즘의 허망함은 AI에서 비롯된다. 글 한 편을 써내려가며 몇 시간을 끙끙 앓아도 AI의 몇 분과 크게 차이가 없어 보일 땐 절망감에 빠지기도 한다. 인간만이 그려낼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애써 위안을 삼지만, 그 위안이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던 때 뮤지컬 <팬레터>를 다시 마주했다. 10주년을 맞아 서초구의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에서 기념공연을 올렸던 <팬레터>가 종로구 홍익대아트센터에서 앵콜 공연을 6월 7일까지 올린다.
<팬레터>는 우리 말과 글을 빼앗긴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문인들을 모티브로 삼은 극으로, 문학인들이 모여 만든 '칠인회'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문학도 세훈이 '히카루'라는 필명으로 보낸 편지에 작가 해진이 여자라고 오해를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22일 공연 막바지 당일 출연진들이 커튼콜을 하고 있다. 팬레터는 매 회차 출연진이 함께 극 중 넘버 '넘버세븐'을 부른다.
한별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것
칠인회는 순수문학을 위해 모인 작가들의 모임이다. 구호나 전단지 대신 시와 소설, 수필로 자신들만의 사상과 생각을 전달한다.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나라를 빼앗긴 시대에 글을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문학을 사랑하는 그들의 마음이 '미친 놈의 작난질'로 치부되는 세상에서 여전히 조선어의 순수함을 살리고자 노력한다.
당장 수년 전 코로나 바이러스의 출현으로 모든 극장이 멈췄을 때, 사회 전반에서 관객들을 향한 시선도 곱지 않았다. 당시 관객들은 방역을 위한다는 이유에서 공연을 볼 때마다 자신의 신상정보를 적어내야 했다.
관객과 배우 모두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 '생활 필수재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등한시되던 그 시절에도, 한 편의 공연을 놓칠 수 없어 마스크와 손소독제를 챙겨 객석을 지킨 관객의 마음은 암담한 상황에서도 편지를 써내려간 세훈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해진의 '팬'으로서 그를 만나길 고대하던 세훈은, 동경하던 작가에게 여성으로 오해받으면서 걷잡을 수 없는 거짓말을 시작하게 된다. 그렇게 <팬레터>는 슬픈 결말을 향해 간다.
극을 보다 보면 좋아하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벌어진 일이 안타깝게 여겨진다. 세훈의 거짓이 마냥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좋아하는 마음은 상대는 물론 나조차도 통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 질문에 확답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22일 <팬레터> 출연진이 '슈가데이' 이벤트로 포토타임을 진행하고 있다. 슈가데이는 NOL 티켓에서 우수한 중소극장 공연을 발굴 및 소개하고 고객들의 문화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준비한 중소극장 공연 프로모션이다.한별
10년의 사랑, 그 이유
<팬레터>는 관객들을 위로하는 극이다. 엇갈린 사랑이 서로를 향한 진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기에, 이 극은 관객에게 위로가 된다. 문학을 사랑하는 문인들만큼이나 무대를 사랑하는 배우들이 있다. 창작진 역시 좋은 공연을 만들어내기 위해 묵묵히 노력한다. 그 노력을 알아봐주는 독자가 있듯이,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들이 있다.
우리는 <팬레터> 속 인물들과 같은 마음으로 무대와 객석에 함께한다. 모두의 마음이 하나가 될 때 예술과 낭만을 지킬 수 있다. 히카루의 존재를 밝힌 세훈을 원망한 해진이 결국 마지막 편지로 세훈을 위로하고, 해진의 편지를 받고 한 발을 내디딘 세훈처럼 관객들은 오늘의 공연을, 한 순간의 무대를 기점으로 삶을 살아낸다.
김유정과 이상 등 실제 문인들의 작품을 인용하고, 서정적이면서도 힘 있는 넘버로 임팩트를 보여준 것도 '롱런'의 비결이다. 창작 뮤지컬로서 꾸준히 극장을 넓혀간 <팬레터>는 많은 사랑을 받은 끝에 해외 수출에도 성공했다. 2018년 대만에서 오리지널 팀이 진출한 데 이어 2023년과 2024년에는 각각 중국과 일본에서 라이선스 공연으로 현지 관객을 만났다. 2024년에는 영국에서 쇼케이스를 하며 영미 진출의 가능성도 엿봤다.
<팬레터>가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사랑받은 것은 누구나 좋아하는 대상과 엇갈려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에 대한 마음은 모두 같을 것이다. 그것이 예전에도, 앞으로도, 어디서든 <팬레터>가 관객들의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상화의 시처럼 빼앗길 들에도 봄이 오듯, 기술의 발전 속에서도 낭만과 예술이 살아남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공유하기
일제 강점기 문인들의 모임, '7인회'를 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