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갇혔을 때 돌파하세요.
JTBC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이하 모자무싸) 초반에 자주 등장한 건널목 차단봉에 달린 문구는 작가의 전작 <나의 해방일지> 속 염미정(배우 김지원)의 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전 해방이 하고 싶어요. 해방되고 싶어요. 어디에 갇혔는지 모르겠는데 꼭 갇힌 것 같아요."(미정)
그러니까 <나의 해방일지>가 '갇혔을 때 해방'하는 이야기라면, <모자무싸>는 '갇혔을 때 돌파'하는 이야기이다. "갇혔을 때 돌파"하란 문구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앞뒤로 차단봉이 내려와 꼼짝없이 갇혔을 때는 나를 가둔 차단봉을 부수고라도('작은 파괴') 달려오는 기차에 치여 죽는 '큰 파괴'에서 벗어나란 것.
그래서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다른 작품의 인물들보다 큰 '파워'가 필요하다. 황동만(배우 구교환)이 2차 세계대전 때 총에 맞아 죽은 러시아 병사가 입던 총알구멍이 난 가죽 코트를 늘 입고 다니는 이유이기도 하다(물론 그 가죽코트는 가짜였지만).
▲모자무싸 스틸컷
JTBC
2. "나는 파괴적인 인간이 아니다!"
주인공들을 옴짝달싹할 수 없게 앞뒤로 옭아매는 건 다름 아닌 병리적 감정이다. 동만이 지독한 열등감에 따른 자기붕괴감 내지 자기혐오에 몸서리치는 존재라면, 변은아(배우 고윤정)는 어린 시절 엄마에게 버림받은 트라우마에서 기인한 유기불안에 시달리는 인물. 동만은 무리에서 따돌림으로 사회적 고립을, 은아는 불안이 올라올 때마다 코피를 흘리는 신체화 증상으로 이미 죽음(=큰 파괴)에 근접한 경험을 하고 있다.
이렇게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는 주인공들에게 작가는 감정워치를 채워준다. 작가의 이전 작품 <나의 아저씨>에서 이지안(배우 아이유)이 도청이란 장치를 통해 박동훈(배우 고 이선균)의 속내를 알게 되며 동훈을 이해하고 좋아하게 되었다면, 이번 작품에선 감정워치를 통해 자기 자신의 진짜 감정을 마주하고 스스로를 이해하고 인정하게 된다.
가령 동만이 은아가 교통사고가 날 뻔한 순간 한달음에 달려와 은아가 무사한 걸 보고 안심하면서도, 초조하게 자신의 감정워치를 확인하는 신이 그렇다. 동만은 다른 사람이 파괴되는 걸 보면 설렘, 흥분 같은 감정이 떠오르고, 그런 자신을 다시 혐오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자신이 사랑하는 이가 다칠 뻔한 순간에 놀람, 걱정 같은 정상적인 감정이 감정워치에 뜬 것을 확인하고 "나는 파괴적인 인간이 아니다!", "나는 괴물이 아니다!"라고 포효한다. 자기 자신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게 된 것이다.
▲모자무싸 캡처화면
JTBC
3. "오백원 뿌려줄게요!"
동만의 포효는 이제 더 이상 '큰 파괴'가 일어나지 않을 거란 안도와 자기확신의 발로이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초견성(初見性, 성품을 처음 본 것)한 선승의 오도송(悟道頌, 선불교에서 수행자가 견성을 얻은 뒤 그 체험과 통찰을 시의 형식으로 표현한 글)처럼도 보인다. 이어지는 은아의 "집 어디에요? 오백원 뿌려줄게요!"라는 대사는 먼저 깨어난 존재에 대한 응원이자, 그간 겪었을 동만의 고통에 대한 절절한 위로이다(오백원은 동전 앞면의 날아가는 새의 문양 그대로 해방을 상징한다).
왕따인 동만은 다른 사람이 망하는 걸 보면 악담과 악플로 공격을 일삼는 인물이다. 은아는 자신이 공격받는다고 느낄 때마다 코피를 흘리는데, 이때 미세한 초능력처럼 상대가 곤경에 처하는 장면이 뒤따른다. 즉 동만은 세상이 파괴됐을 때 같이 파괴되고, 은아는 자신이 파괴될 때 세상도 파괴된다.
▲모자무싸 캡처화면
JTBC
4. '날씨를 만들어드립니다'
동만이 쓰는 시나리오 제목은 <날씨를 만들어 드립니다>이다. 극에서 날씨는 "통제되지 않는 그 무엇", 즉 인간의 감정을 상징한다. 인간의 감정을 자연의 날씨에 은유한 것이다. 이를 실마리 삼아 보면, 은아를 한 인격체인 동시에 세상 그 자체로도 볼 수 있다. 즉 은아가 파괴되면 은아를 둘러싼 세상도 함께 파괴되는 거다.
안 그래도 작품 곳곳에서 '세상을 전부 황동만으로 떡칠할 거다'라거나 '여기도 은아씨가 있고, 저기도 은아씨가 있다'는 등의 동만의 대사가 자주 언급됐다. 불교 화엄사상에서 말하는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즉 티끌 하나에 온 세계가 들어 있다는 원리나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하나가 곧 만물이요 만물이 곧 하나라는 세계관을 떠올릴 수 있다.
은아가 더 이상 코피를 흘리지 않는 순간, 단지 세상도 파괴되지 않고 그대로인 것이다.
▲모자무싸 스틸컷
JTBC
5. "나는 당신의 말로 죽을 수 없는 존재"
극중극 <날씨를 만들어 드립니다>는 통제할 수 없는 날씨에 '만들어 준다'는 인위성을 더해 인간이 날씨를 다스린다는 이야기이다. 즉 비를 멈추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비를 견디게 하는 이야기란 것. 이는 은아의 심리치유 과정과도 맥이 통한다.
불쑥불쑥 올라오는 불안과 공포의 감정은 통제하기 힘든 날씨처럼 은아를 수시로 무너지게 했다. 하지만 그 감정이 무엇인지 감정워치를 통해 정확히 이름 붙이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그 순간 감정의 강도가 엷어지고, 감정에 얽힌 스토리는 약해진다. 그리고 냉정하게 그 감정의 뿌리까지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심리학 용어로 '감정 명명하기(Affect Labelling)', 불교 용어로는 여실지견(如實知見), 즉 있는 그대로 보기이다.
그렇게 감정의 뿌리를 그대로 정확하게 들여다보면 마침내 "나는 당신의 말로 죽을 수 없는 존재"(은아)라는 자각에 이른다. 은아는 마지막화에서 친엄마 오정희(배우 배종옥)의 독설에 코피를 흘리지 않았다. 맞서서 싸우거나 좌절하지도 않았다. 은아도 돌파에 성공한 것이다.
12부작인 이번 작품의 최종회는 '돌파하는 이야기'답게, 작가의 이전 작품들에 비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 것 같다. 드라마는 끝이 났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감정워치의 도움을 받았듯, 우리도 이 드라마를 도구 삼아 자기 감정의 뿌리를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각자가 처한 한계상황을 돌파해보면 어떨까.
▲모자무싸 캡처화면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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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노무사. 노동자의 산재와 해고 사건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매일노동뉴스'에 드라마와 영화를 노동의 관점에서 리뷰한 [조영훈의 미디어×노동]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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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무싸' 변은아가 더 이상 코피를 흘리지 않게 된 까닭